[특집] 대만 불광산사 서울법당 의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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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만 불광산사 서울법당 의은 스님
  • 김정현
  • 승인 2016.07.1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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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나누고 환희심을 베풀겠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수행하는 이유

    “이 공간에 있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미얀마인들을 위한 미얀마인들에 의한 미얀마인들의 안식처
    유럽에 한국의 禪을 심는 벽안의 스님 
    “대중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나누고 환희심을 베풀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한국불교 안에 세계불교가 있다. 티베트, 스리랑카, 대만, 미얀마, 헝가리 등에서 출가해 한국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다. 주로 국내에 있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전법활동을 하지만, 적지 않은 한국의 불자들도 이들이 세운 사찰에서 신행생활을 한다. 10여 년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일이다. 한국불교의 전통에 익숙한 불교의 모습이 다양화되고 있는 것이다. 또 외국인으로 한국에서 출가해 한국불교 전통인 선禪 수행을 국내외로 이어가고 있다. 이들이 한국에서 수행하는 이유를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한국불교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이 스님은 동국대 앞 작은 빌딩에 ‘서울 불광산사’를 세우고 전법의 원력을 실천으로 이었다. 이후 17년이 흘렀지만 불법을 홍포하려는 스님의 원력은 변함이 없다. 서울 불광산사 주지 의은 스님이다. 6월 6일 현충일 오후, 절에서 스님을 만났다.

 

| 선방, 도서실, 사경실, 그리고 다실

“올해로 대만 불광산사가 50주년이 됐습니다. 다양한 행사와 일정이 있어서 그간 쭉 대만에 있었어요. 한국 진각종과 대만 불광대학교가 함께 진행한 국제 세미나를 끝으로 대만 일정을 마치고 엊그제 귀국했어요.”

바쁜 일정을 소화한 뒤 한국에 돌아와 여독을 풀기도 전에 기자를 맞이한 비구니 의은 스님이 따뜻한 차 한 잔 건네며 눈웃음을 지었다. 노 스님의 첫인상은 수수했다. 차분히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님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말끝마다 깍듯이 존대했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도 잘 모르던 스님이 처음 한반도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대만 불광산사 개산종장이자 자신의 은사인 성운 스님의 제안 때문이었다. 국제포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내다본 성운 스님은 1980년대부터 세계 각국으로 제자들을 내보냈다. 스승 하나 믿고 출가의 길에 오른 지 10년쯤 될 무렵, “한국으로 가보라.”는 스승의 지시에 의은 스님은 두말하지 않고 바랑을 꾸렸다.

동국대에서 학업을 마친 후 국제불광회, 청년회 등의 모임을 만들어 대만불교를 한국에 알리고 포교를 이어가던 스님에게 당시 목정배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는 “도량이 있어야 포교를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목 교수에게 추천을 받아 1998년 동국대학교 인근의 작은 건물을 구매한 뒤 리모델링을 거쳐 1999년 개원한 곳이 바로 지금의 서울 불광산사다.

당시는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 단체를 설립하고 종교활동을 펼치는 것이 생경했기에,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 온전한 법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만 근 1년이 걸렸다.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외국인 종교단체 등록증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던 시절도 아니고, 어떤 자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누가 알려주면 따라 하기라도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으니…. 발품을 팔아 반 년 간 준비해서 제출했는데 서류가 맞지 않다고 다시 해오라고 하기도 하고…. 여하튼 고생 많았죠.”

우여곡절을 거쳐 대만불교의 한국 포교 거점으로 자리한 서울 불광산사는 지상 4층, 지하 1층의 규모로 법당과 기본 사무공간을 비롯해 선방과 소규모 도서실, 사경실, 강의실 및 다실 등을 갖추고 있다. 전 세계의 모든 불광산사 분원은 선방과 도서실, 사경실, 그리고 다실이 있어야만 창립을 할 수 있는데 서울도 예외는 아니다. 창립 원칙에 스며 있는 포교의 원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4층 선방에서는 참선과 명상, 체조를 하는 수선반 프로그램과 태극권 강좌가, 3층 강의실에서는 중국어 회화교습이 열린다. 절을 찾는 신도들이 공양간이자 다실로 애용하는 지하 ‘적수방’은 때때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역할을 겸하곤 한다.

 

| 새벽예불, 옛날엔 4시 지금은 5시 50분

스님을 따라 올라가 본 선방은 구조나 모양이 한국과 사뭇 달랐다. 좌복을 깔고 바닥에 앉는 한국과 달리 대만의 선방은 단상 위에 올라앉는 구조. 방 전체가 단상으로 빙 둘러져 있었다. 넉넉하게 30명, 많으면 50명까지도 둘러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에 앉아 참선 수행을 하다가 포행이 필요할 때면 아래로 내려와 선방 가운데를 중심으로 둥글게 걷습니다. 또 단상 밑에 달린 수납형 탁자를 꺼내면 앉은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도 있지요.”

반면 1층 법당의 풍경은 한국의 일반 대웅전과 비슷했다. 불단에는 석가모니불 양 옆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이, 맨 끝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닥에 좌복을 놓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50cm쯤 높이가 있는 방석(스님은 이것을 대만 방석이라고 했다.) 위에서 절을 한다는 것 정도였다. 문득 대만의 불교 의식이 궁금해졌다.

- 대만에서는 보통 어떤 기도를 하나요?

“일반 사람들은 부처님께 원하는 것을 바라는 기도를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불광산사는 대중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나누고 환희심을 베풀겠다는 기도를 하는 것이 원칙이에요. 불광산사는 보살도량입니다. 문수 지혜, 보현 실천, 관세음 자비, 지장 원력 등 4대 보살의 정신을 기반으로 보살행을 원력 삼아 기도를 합니다.”

- 예불은요? 한국과 많이 다른가요?

“한국은 예불이 절마다 시기마다 다 똑같지요? 우리는 내용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이 지장재일이라고 가정하면, 그 의미를 되새기며 『지장경』을 선택해 읽는 것이지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해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 횟수는 하루에 세 번인가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세 번 예불하는 것은 똑같아요. 다만 새벽예불의 경우 옛날에는 새벽 4시였는데 이제는 5시 50분에 합니다. 이건 대만을 비롯한 전 세계 각국의 불광산사가 모두 동일해요.”

- 새벽예불 시간을 2시간가량 뒤로 미룬 것은 꽤나 현대적인데요?

“이것은 스님 1,300여 명이 회의를 통해 결정한 부분이에요. 세계 전역에서 포교를 하는 스님들이 음력 7월이 되면 한자리에 모두 모이는 ‘강수회’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이 곳에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합니다. 예불시간 등을 비롯한 다양한 부분에 대한 의사결정을 진행하기도 하고요.”

법당 입구에 놓인 불전함 위에는 사탕과 함께 작은 쪽지가 수북이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스님은 경전 구절이나 선사들의 말씀이 적혀있는 쪽지라며 기자에게도 한번 뽑아보라고 권했다. 둥글게 말려 있는 종이를 펼치니 방거사의 ‘선불장選佛場’ 게송이 나왔다.

十方同聚會(시방동취회, 시방에서 함께 모여)

箇箇學無爲(개개학무위, 저마다 무위를 배우나니)

次試選佛場(차시선불장, 여기가 부처를 뽑는 곳이라)

心空及第歸(심공급제귀, 마음 비워 급제해 돌아가노라)

한문으로 쓰인 게송의 뜻을 설명해준 스님은 ‘선불장’의 의미를 재차 강조하며 기자에게 “집으로 돌아갈 때 급제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법문으로 들렸다. 스님과 인터뷰를 진행한 날은 음력 5월 2일. 의은 스님은 “어제가 출가한 지 40년째 되던 날.”이라며 겸연쩍어했다. 어떤 인연이었을까?

 

| 강원에 들어가 공부하다, ‘아, 참 좋다.’ 하고 출가 결심

-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 대만은 가난했고, 또 사회적으로도 힘들었어요. 집에서는 엄마가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죠. 낮에 일을 하고 밤에는 엄마를 위해 약방을 다녔는데, 어두컴컴한 먼 길을 걸어 다니며 어린 나이에도 많은 생각을 했죠. 왜 이렇게 삶이 힘들까. 당시 우리 할머니가 스님이셨는데 할머니 따라 절에 다니곤 했는데 문득 불교를 깊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 그럼 그때 바로 출가를 결심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고. 대만이랑 한국이 좀 문화가 달라요. 한국의 강원은 스님들만 갈 수 있죠? 대만은 일정 자격만 갖추면 재가자들도 강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할 수 있어요. 나도 불교 공부를 하고 싶어서 강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아, 참 좋다.’ 하고 출가를 결심한 거지. 시기적으로는 학교 졸업하고 직장 다니던 때였어요.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 ‘아 이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있었던 거 같고….”

비슷한 고민으로 방황하는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근기가 서로 다르니 다양한 포교방법을 구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전 세계 300여 곳에 분원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 예술, 학술, 체육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포교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곳이 바로 대만 불광산사이기에 스님의 말에 무게가 더 실린다. 그래서 질문을 틀었다.

- 그렇다면 한국에 가장 필요한 포교는 무엇일까요?

“한국은 개인의 수행을 많이 강조하죠. 그런데 수행을 왜 하나요? 대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대중을 위한 포교가 곧 개인을 위한 수행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일이 곧 수행입니다. 우리는 다 대승불교잖아요. 항상 대중을 생각해야 해요.”

- 그런 뜻을 펴기 위해 한국에 오셔서 지금껏 계시다고 해석해도 되나요?

“…(조용히 웃음)”

- 마지막까지 한국에서 포교에 매진하실 계획이세요?

“그야 대만에서 인사 조정을 통해 결정하는 것이니 확답은 못하죠. 하지만 원력과 인연도 무시를 못해요. 그런 면에서 난 한국과 인연이 있는가 봐요. 부처님은 국경을 넘어 평생을 걸으셨어요. 우리 큰스님이 국제 포교에 힘쓰는 것도 같은 의미라고 봐요. 한국은 ‘우리나라’, ‘우리 민족’ 이런 배타성이 없지 않잖아요. 그걸 넘어설 수 있다면 한국불교와 손잡고 세계평화에 한걸음 일조할 수 있을 것도 같아요.”

- 남은 기간 꼭 하나 한국에서 일구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요?

“한국 사람들이 불교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전하는 거요. 진짜 불교를 알면 삶을 바꿀 수 있거든요. 한국은 참선을 좋아하니 참선과 생활 선을 접목시킨달지, 생활 속에서 선 수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달지 하는 것이 고민이에요.”

‘한국에서 무엇을 일구고 싶은가’라는 질문 끝에 “한국도 스님과 대중들이 좀 평등한 관계를 지니면 함께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가 나왔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스님이 “대만은, 불광산사는 비구 비구니 관계가 비교적 평등한데 한국, 특히 조계종을 보면 ‘아닌데…’ 싶은 부분이 조금 있죠?”라고 조심스레 되물었다. 까칠한 기자가 “조금이 아니고 많이 있죠.”라고 답하자 스님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진중하지만 무겁지 않게 한국불교가 가야할 이정표를 툭 내놓았다.

“비구와 비구니는 새의 날개와 같고 사부대중은 집을 지탱하는 네 기둥과 같아요. 모두가 중요하죠. 불광산사에서는 스님들뿐만 아니라 재가자들도 종종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곤 해요. 서로 다른 입장에 선 대중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는 풍토가 갖춰져야, 단체나 집단의 역량도 더욱 커지는 것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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