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아 스님
일아(一雅, 69) 스님의 이력은 이채롭다. 서울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를 역임하였으며 가톨릭 신학원을 졸업하였다. 조계종 비구니 특별선원 석남사에 법희 스님을 은사스님으로 출가하여 운문승가대학을 졸업하였다. 가톨릭 신학을 공부한 스님은 기독교에서는 경전을 닳도록 꿰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누구인지,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지 명확히 답해줄 경전이 없다는 것이 답답하였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태국 위백아솜 위빠사나 명상 수도원과 미얀마 마하시 위빠사나 명상 센터에서 2년간 수행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초기불교를 공부하려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스토니부룩 주립대학을 거쳐, 웨스트 대학에서 빠알리 니까야를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를 마쳤다. 박사 논문으로는 「빠알리 경전 속에 나타난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있다. 역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빠알리 경전에서 선별한 예경독송집』, 『담마빠다』, 『숫따니빠따』가 있고 저서에는 『아소까 - 각문과 역사적 연구』, 『우리 모두는 인연입니다』가 있다. 최근에는 빠알리 니까야에 나타난 ‘부처님은 누구신가?’를 집필 중에 있다. 다음은 미국 현지에 있는 일아 스님과 진행한 이메일 인터뷰이다.
- ‘부처님은 누구이고,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가?’라는 궁금증이 풀렸나요?
“그렇습니다. 빠알리 니까야처럼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환히 볼 수 있는 경전은 없습니다. 빠알리 경전을 전공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볼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안개에 가려 있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어디로 가셨는지, 누굴 만났는지,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제자들이 말하는 부처님의 진솔한 모습은 어떤지 등, 정말 부처님의 모습을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빠알리 니까야를 전공한 것은 행운이었고 아주 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늘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바른 가르침으로 저 자신을 항상 챙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스님이 생각하는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요?
“나는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였고, 뉴욕 스토니브룩 주립대학 종교학과에서 세계의 중요 종교를 다 공부하였지만, 부처님만큼 완벽한 성자는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인품에서, 수행과 바른 견해, 빼어난 가르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부처님은 내가 추구하는 면모를 모두 가지신 분입니다.”
- 왜 우리들은 그분을 존경해야 하는가요?
“빠알리 니까야 경전은 모두 이렇게 시작됩니다. ‘거룩한 분, 존경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과 빼어난 면모로, 여러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귀의하였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은 존경받아 마땅한 분입니다.”
-빠알리 경전에서 부처님의 자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나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상윳따 니까야』에 이렇게 나타납니다.
‘누구에게 공덕이 밤낮으로 늘어납니까?’
‘동산과 숲을 조성하고 나무를 심어, 그늘을 드리워 지친 나그네 쉬어가게 하고, 다리를 놓아 물을 건너가게 하고, 우물가 정자를 세우고, 우물을 파 목마른 이 마시게 하고, 객사를 지어 나그네에게 쉬어가게 하는, 이런 이에게 공덕은 밤낮으로 늘어난다네.’
이렇게 부처님의 자비의 실천행이 확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나는 인도 부다가야에서 여름 4개월을 명상하면서 보냈습니다. 인도의 여름은 참기 어려울 정도로 덥습니다. 그러니 더위에 지칠 때 나무그늘은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당시는 차가 없으니 모두 걸어 다녔지요. 그러니 나무그늘이야말로 사람들의 안락에 필수였습니다. 또한 냇가는 다리가 없어 물이 불면 오도 가도 못합니다. 우물은 유일한 물 공급원이었기에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부처님의 따스한 자비였습니다.”
- 부처님 출가전의 가장 중요한 삶의 장면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문유관입니다. 이로 인해 출가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 부처님은 사문유관으로 출가했다고 하는데 사문유관은 누구나 겪고, 느끼는 문제 아닌가요?
“싯다르타 왕자는 궁성에서 너무나 귀하게 자랐기 때문에 생, 노, 병, 사의 실상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왕자는 사문을 만나게 되었는데 ‘삶과 죽음에서 벗어나 해탈을 구한다는 것, 이 세상 모든 것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 나는 욕망을 소멸한 해탈을 구하며, 늙고 죽음이 없는 그런 경지를 구한다.’ 는 사문의 말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였습니다. 당시 우파니샤드의 영향을 입어 윤회를 벗어나 해탈을 얻고자, 고행과 수행을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출가는 보편적 삶의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왕은 절대권력과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모든 부귀영화를 단호히 떨쳐 버리고 출가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진정 위대한 출가였습니다.”
- 경전에 싯다르타는 스승을 떠나 고행에 들어갑니다. 뱃가죽을 만지면 등뼈가 만져졌고 등뼈를 만지면 뱃가죽이 만져졌다는 경전의 표현을 보면 그 고행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수행의 과정에서 고행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요?
“고행은 완전히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식욕, 수면욕, 나태함의 유혹, 세속적 욕망, 모든 고뇌와 번뇌와의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이 모든 내적 투쟁에서 부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 싯다르타가 얻은 깨달음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부처님은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연기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즉 이것이 있게 된 원인을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원인 없이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게 된 원인은 집착이며, 그 원인인 집착을 소멸해야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결론으로 그 괴로움을 없애는 길인 팔정도를 깨달으셨습니다. 연기의 도리를 축약한 것이 바로 사성제입니다.”
- 부처님은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이를 대중들에게 알려줄 것인지 주저하십니다. 왜 그러셨는지요.
“왜냐하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심오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서였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세속적 욕망에 찌들었으므로 부처님은 그들이 이런 심오하고 숭고한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후 열반에 들기까지 가장 기뻤던 시기는 어떤 시기이며, 왜 그런가요?
“부처님은 수행을 통하여 희노애락의 어떤 감정에도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면, 마음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정의 경지에 이릅니다. 부처님은 항상 평정 속에 머무는 분이었기에 기쁨이나 슬픔에 초연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35세 이후 가르침을 여신 초창기에 가장 처음 다섯 명의 비구가 깨달음을 얻은 일, 초기 교단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출가하여, 빠른 기간에 1,250명에 이르게 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들에게 가르침을 설하여 제자들이 수행이 진전되어 깨달음을 얻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후 열반에 들기까지 기간 동안 가장 슬펐던 시기는 어떤 시기이며, 왜 그런가요?
“역시 부처님은 슬픔에도 초연하셨습니다. 『상윳따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바깥 노천에서 비구들에 둘러싸여 앉아 계셨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열반에 든 지금 이 모임이 내게는 텅 빈 것 같다…. 한 쌍의 제자가 열반에 들었는데도, 여래에게 슬픔과 비통이 없으니 그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생겨나고 존재하고 조건 지어진 것은 붕괴하고 만다. 붕괴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부처님은 슬픔 속에서도 무상의 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리뿟따는 빠알리 니까야에 학식, 덕성, 품성이 가장 뛰어났던 제자, 여래의 계승자, 경우에 따라 부처님을 대신하여 비구들에게 설법하기도 하는 훌륭한 제자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만약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 열반 후에도 살아있었더라면, 아마 불교의 교리가 더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을 것입니다.”
- 재가불자들에게 부처님처럼 살자고 한다면 어떤 점을 가장 우선 받아들여야 하는가요?
“부처님처럼 살고자 한다면 가장 확실한 대답은 팔정도를 따라 바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훌륭한 면모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닮아야 할 부처님의 훌륭한 면모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부처님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중도의 길을 가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무엇이든 지나치면 문제가 생깁니다. 식사의 적당량을 아는 것, 분노가 극단적으로 치솟지 않도록 감정을 조절하는 것, 좋아하는 감정, 싫어하는 감정도 극단에 흐르지 않게 자기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운동이나 일에도 중독되어 극단적으로 거기에만 빠져 있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대인관계도 지나치게 가깝지도 않고 지나치게 멀지도 않고 알맞은 거리를 아는 것, 생각도 극단적으로 치달릴 때 조절할 줄 아는 것 등, 삶의 모든 현상은 중도의 이치와 연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승가의 계율을 따지기 전에 인간다운 따스함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계율도 인간의 행복을 위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도 자녀에게 부모의 따스한 사랑이 전달된다면 자녀는 달라질 것입니다. 부처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완전히 떠난 분이었습니다. 『맛지마 니까야』에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부처님의 양모)가 부처님께 자신이 손수 만든 법복을 드렸지만, 부처님은 그 법복을 승가에 보시하라고 세 번이나 거절하신 점을 보더라도, 부처님은 얼마나 물질에 초연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누누이 물질, 이득, 명예, 찬탄은 무서운 갈고리와 같다고 경계하셨습니다. 물질, 이득, 명예, 찬탄에 걸리면 갈고리에 걸리게 되어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제자가 잘못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그 당사자를 불러서 정말 그런지를 확인하셨습니다. 남의 이야기로만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거의 모든 경우, 말하는 사람의 이익이 깔려 있어 진실되지 않은 일이 많습니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판단하게 되면, 많은 경우 진실을 왜곡하게 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고한 사람을 비난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생애 중 어떤 장면을 가장 닮고 싶은가요?
“너무나 많지만, 『상윳따 니까야』에 부처님은 빠세나디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이 천지사방으로 다 돌아다녀도, 어디서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지 못하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 자신은 소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남을 사랑하라. 남을 해치지 말라.’는 수백 마디의 말보다 이 가르침은 마음을 울리는 명언 중의 명언입니다. 나도 군더더기 말잔치보다 이런 마음을 울리는 지혜를 갖기를 발원해봅니다.”
- 부처님은 자애로운 분이면서 가장 냉철하며 이성적인 분입니다. 부처님의 삶에서 가장 자애로운 장면과 가장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판단을 했던 장면을 꼽는다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자애로운 장면은 『율장』 「마하왁가」에 나옵니다. 부처님은 비구들의 방사를 둘러보시다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병든 비구를 손수 물로 씻기신 후, 모든 비구들을 모으고 어디에 병든 비구가 있는지, 간호하는 사람이 있는지, 무슨 병인지를 물으신 후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에게 시중 들 사람이 있다면 그 병든 비구를 돌보아라. 은사나 방을 함께 쓰는 비구가 돌보아야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승단이 돌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몸도 마음도 고통으로 지칠 대로 지친 병든 사람을 돌보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자비입니다. 부처님은 시자도 있고 수많은 비구들이 있었지만, 당신이 손수 씻기셨습니다. 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 병자는 부처님의 따스한 손길에 아주 큰 위로를 받고 더 빨리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또 부처님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즉 현실을 직시하는 지혜입니다. 『맛지마 니까야』에 말룽까뿟따 비구가 열 가지 형이상학적(추상적, 관념적) 질문을 하였습니다. ‘세상은 영원한가, 유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등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장황하게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말씀하신 독화살의 비유가 좋은 대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말씀하시길, 다만 그런(추상적, 관념적) 질문은 청정한 삶의 근본에 적합하지 않으며, 깨달음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질문에 휘말려 이론을 펼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말들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어, 정확한 답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논쟁을 일삼기 때문입니다.”
- 부처님은 부모와 가족을 모두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세속의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삶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요? 세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 수는 없는 것인가요?
“세속에 살면 당연히 많은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에 살더라도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간다면, 그것도 또한 좋은 일입니다.”
- 부처님의 삶에서 가장 갈등을 일으켰던 사건이 있는가요? 부처님은 그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려고 했는가요?
“『율장』 「쭐라왁가」에 부처님의 사촌인 데와닷따 존자는 명성, 이득, 찬탄에 눈이 어두워 부처님의 자리를 탐내게 되었습니다. 그가 부처님께 다섯 가지 극단적인 제안을 한 것으로 봐서도 그의 생각은 너무나 극단에 흐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극단에 흐를 때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그는 부처님 교단을 차지할 목적으로 비구들을 부추기고, 부처님을 비난하여 드디어 부처님 교단을 분열시켰습니다. 분열 후 포살이나 기타 예식을 따로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그에게 누누이 교단을 분열시키지 말라고, 교단을 분열시키는 것은 아주 큰 잘못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영축산에서 바위를 굴려 부처님을 해치려 했지만, 바위의 파편인 돌 조각이 부처님 발가락에 맞아 피가 흘렀습니다. 이 사건은 가까운 사촌이 부처님께 아주 큰 괴로움이 된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극단으로 흐르면 앞도 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판단이 정상에서 벗어나 요지부동으로 움직이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는 자신의 불행을 자초할 뿐입니다. 『율장』 「쭐라왁가」에 나타난 데와닷따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도,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에 후대에서 이야기를 덧붙여서 확장된 듯합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데와닷따가 교단을 분열하고 부처님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 부처님은 보통의 사람들처럼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릅니다. 부처님은 보통의 사람들과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가요?
“같은 점은 육신을 가지고 생노병사를 겪은 일입니다. 하지만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 모습을, 빼어난 용모에 풍채가 좋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눈에 보이는 외관이 출중했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보통 사람들은 해내기 어려운 6년의 고행으로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 번뇌를 완전히 깨부수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깨달음의 지혜를 열었습니다. 이 세상에 성자가 많지만, 깨달은 성자는 오직 부처님뿐입니다. Buddha(붓다)라는 빠알리어의 의미는 ‘깨달은 사람, 모든 존재 가운데서 가장 으뜸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누구일지라도 ‘붓다’라고 말하고 빠알리어 그대로 ‘Buddha’라고 씁니다. 전 세계 공통어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너무나 심오하고 확실하였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에 허덕이는 중생에게 알려주어, 그들도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할 수 있기를 발원하며 가르침을 여셨습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부처님의 대자비의 광명을 중생에게 비추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상가, 논객들은 부처님을 떠보지만,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굴복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왕과 왕비, 왕자, 제관, 다른 교단의 수행자, 억만장자, 가난한 사람, 남녀노소, 천민, 심지어 살인자까지도 부처님께 귀의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폭넓은 계층의 사람이 모두 귀의했다는 것은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었나를 증명해줍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덕행을 함께 갖추고, 거기다 훌륭한 인품과 바른 견해까지 갖추고 견줄 바 없는 빼어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부처님은 진정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무한한 카리스마가 있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부처님을 만난 여러분은 정말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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