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음식기행] 태양과 볕과 바람과 국수
상태바
[사찰음식기행] 태양과 볕과 바람과 국수
  • 박찬일
  • 승인 2016.04.11 14: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유 스님과 함께 국수 찾아 떠난 여행길
 
취재팀의 네비게이터에 ‘쌍송국수’를 입력했더니 겨우 120여 킬로미터다. 예산이 실거리로는 멀지 않다는 걸 기계가 알려주는데, 심리적인 거리는 만만치 않다. 충청도 하면 보통 교통요지인 대전과 천안 축선을 먼저 떠올린다. 그 길에서 한참 비켜선 예산은 그래서 이른바 경제발전과 도시화에서 멀어졌던 셈이다.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 언덕배기 위 국숫집이 있다
 
예산은 인근의 서산, 홍성 등과 함께 ‘내포’ 지방에 들어간다. 문화유산답사를 오래 다니거나 지역학을 하시는 학자들은 내포야말로 가장 충청도다운 곳이라고들 한다. 느릿하면서도 날카롭고 배타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이른바 충청도 정서가 바로 내포에 있다는 것이다. 그 내포의 핵심이라 할 예산은 아직도 ‘군郡’이고 시골다운 맛이 아직 살아 있다. 그 마을로 차를 몰아간다. 역시 120여 킬로미터는 금방이다. 길이 좋아진 것이다. 실은, 내 마음은 몹시 급했다. 자타 인정 국수 귀신인지라, 얼른 저 소문 속의 쌍송국수를 한 그릇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 언덕배기에 있다고 하여 지명이 쌍송배기이고, 그 이름을 따서 쌍송국수다. 가게 건물을 보면 다들 깜짝 놀란다는 말이 맞다. 일제시대 적산敵産 가옥 그대로다. 실제로 적산은 아니라고 한다. 해방 후에 지었는데, 그때의 건축방법이 아마도 일제식이었을 것이다.
 
“아휴, 말도 마세요. 이게 다 그나마 고친 거예요. 원래 저 안쪽(숙성실)에 방이 있었어요. 이 양반들(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이 얼마나 고집이 세신지 뭘 바꾸는 걸 안하세요. 하나씩 설득해가며 바꾼 게 그나마 이렇게 시설다워진 거예요.” 사장 김민균(35) 씨의 말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게 더 많다.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2층의 건조실도 그대로고, 국수기계도 거의 그대로다.
 
“이층은 보시다시피 벽이 휑하니 뚫려 있어요. 바람 잘 통하라고. 아버지가 해방 후에 지으셨다고 해요.”
 
아버지 김성산 씨는 5년 전에 작고했다. 살아계신다면 올해 67세. 너무 일찍 가셨다. 그리하여 어린 아들 김민균이 얼떨결에 국수기계를 잡게 됐다.
 
“아이고, 말도 마세요. 전 국수 싫어했어요. 저기다 인생을 바친다고는 절대 생각 안했죠.(웃음)”
 
그는 서울에서 대학 나와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그는 대를 이어야 할 팔자가 되었다. 물려받은 낡은 국수틀 한 대로 말이다.
 
3.png
 
| 잘 마른 국수, 국수 기다리는 재미
 
지유 스님(동국대 교육대학원 조리교육전공, 수국사 사찰음식 강의)은 불광 취재팀과는 처음이다. 예산의 이 노포 국수가게가 마음에 드시는가보다. 아래 위층을 오가고, 국숫발을 유심히 보신다.
 
“승소라고 하잖아요. 정말 국수들 좋아하시죠. 저도 좋아해요. 특히나 수련하는 어린 스님 시절에는 다들 국수라면 깜빡 죽지요.(웃음) 발우공양이 좀 엄격합니까? 국수가 나오는 날은 뭔가 격식을 덜 차리는 날이지요.”
 
큰 사찰에서 일주일에 두 번쯤 특식으로 나오는 국수는 단조로운 수도 생활에 방점을 한 번씩 찍어주는 음식이다.
 
“울력 같은 일을 마치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국수 기다리는 재미로 힘든 울력도 거뜬히들 하곤 했지요.”
 
스님이 오늘 준비한 음식은 버섯비빔국수. 쌍송국수의 잘 마른 국수로 썩썩 시원시원하면서도 꼼꼼한 요리가 이어진다.
 
“버섯와 다시마로 채수를 내고 물국수를 만들어내는 걸 보통 스님들이 좋아하시죠. 오늘은 비빔국수예요. 제 경험으로 좋은 국수는 비볐을 때 가치가 빛나기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김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국수라는 건 결국 잘 뽑고 잘 말리고, 그걸 다시 물에 넣어 끓이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수분이 아주 중요한데, 비빔국수는 삶아서 차갑게 헹궈내니까 탄력이 잘 유지됩니다. 그래서 국수의 질을 더 잘 느낄 수 있어요.”
 
요즘 국수의 대세는 소면이다. 이때 소면은 일본식의 흰 국수素麵라는 뜻이 아니라 가늘다는 뜻의 소면小麵이다. 사람들의 혀의 감각이 더 가는 면에 매력을 느끼는 시대가 되면서 중면中麵은 점점 사라져갔다. 요새는 마트나 가게에서 중면을 사고 싶어도 물건이 없다.
 
“저희 집은 그냥 국수라고 하면 중면이에요. 예산이 입맛을 잘 안 바꾸는 동네인가 봐요.”
 
이 집은 대면, 중면, 소면을 다 생산하지만 팔 할이 중면으로 나간다. 중면은 굵기가 적당하고 혀에 닿는 물리적 촉감이 넉넉하면서 매끈한 국수의 매력도 가지고 있는 중용의 면이다.
 
“저희 국수는 전국의 사찰에서 주문이 많습니다. 의식용(제사)으로 국수가 절에서 안 빠지잖아요. 물론 중면이지요.” 
 
제사는 본디 과거의 본을 따르는 것이니, 옛날식의 중면을 쓰는 게 맞다 싶다. 얼른 국수를 한 그릇 하고 싶다. 스님이 국수를 비벼낸다. 물을 넉넉히 잡아 센 불에 끓이되 중간에 찬물을 세 번 쯤 나누어 조금씩 더 붓는다. 국수 속까지 다 익으면서 탄력을 유지하는 비법 아닌 비법이다. 김민균 사장도 그 방법이 최고라고 인정한다.
 
“국수가 아무리 좋아도 잘 삶지 못하면 맛이 안 나요.”
 
4.png
 
| 20㎏ 밀가루 한 포대 소금물 네 바가지 반
 
요즘 이 집 국수는 대목이다. 계절적인 요인이 아니라 경기 탓이다. 경기가 나쁘면 대중들이 국수를 많이 먹는다고 한다. 쓸쓸해지는 마음이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1997~1998년) 때 참 많이 팔았다고 해요. 돈이 없으니 국수로 끼니를 때우는 거죠. 그래서 저희는 국수가 많이 나가도 좋아하질 않아요. 반가울 리 없죠.”
 
아닌 게 아니라 쌍송국수는 많이 팔고 싶어도 한계가 있다. 국수 기계가 달랑 한 대뿐이다. 시설을 더 늘리고 싶어도 어른들이 아직은 아니라고 만류한다. 그것은 품질에 관련된 중요한 결정이기도 하다.
 
“많이 뽑는다고 다가 아니에요. 말리는 게 중요한데 지금 저희가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가게 앞 건조실과 2층이 태양과 바람을 맞으며 국수가 마를 수 있는 땅의 전부다. 어떻게 보면, 70년 역사의 국수집에서 이렇게 변화 없이, 시쳇말로 ‘주변머리 없이’ 사업을 해올 수 있었을까 답답할 정도다.
 
“그러니까요. 아버지 생전에 그랬고, 어머니가 이렇게 일을 하시니 뭘 바꾸지를 못해요. 하하.”
 
국수는 태양과 볕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 이치는 참으로 오묘하다. 습도와 온도, 바람의 무게, 이런 복잡한 조건을 감으로 판단해서 말리고 숙성하고 내다 판다.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장인의 감각이다. 선친 김성산 씨와 그의 누이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반죽은 별 것 없슈. 20㎏ 밀가루 한 포대에 소금물 네 바가지 반. 습한 날은 소금을 더하고, 건조한 날은 좀 덜 허고, 그것뿐이쥬. 면을 뽑아 햇볕에 말리는데, 면이 늘어지지 않게 또 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말려야지. 그리고 응달에 좀 재 놨다가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밖에다 말려야 해. 원래 국수는 끓는 물에 팔팔 끓여 먹잖여. 그러니까 국수가 속까지 제대로 말라야, 먹을 때 부들부들하면서도 끈기가 있어.”
 
쌍송국수는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전국의 수제 국수집 어디든 닥쳤던 위기이기도 했다. 공장에서 만들어 불 때서 말린 대량생산 국수가 시장을 장악했던 것이다. 더 싼 밀가루로 더 빨리 만들어내는 데다가 유통망도 치고 들어가니 손으로 만드는 국수의 여지가 없어졌다. 뭐든 품질보다 효율이 지배하던 속도 우선의 시대였다. 70년대 이후 동네 국수가게가 고사되던 시기다.
 
“그것뿐이 아니에요. 하나 중요한 이유가 더 있었어요.” 무슨 이유일까? 김 사장이 말을 잇는다.
 
“예식장 때문입니다. 저희 국수를 그때 예식장에서 많이 사다 썼어요. 일반식당에서 피로연을 해도 국수를 삶아 대접했고요. 80년대 이후로 뷔페가 히트를 치면서 국수 발주가 딱 줄어들었어요.”
 
결혼식에 빠지지 않던 국수가 경제발전과 함께 뷔페식으로 대체되었다. 내리막길을 걷는 건 쌍송국수만은 아니었다. 명맥을 유지하던 수제 국수가게가 거의 문을 닫았다. 이제는 전국에 서너 집이 고작이다.
 
“그런데 다시 이렇게 인기가 되살아날 줄 누가 알았겠어요.” 
 
클래식. 나는 이 말을 떠올렸다. 클래식이란 본디 살아남은 전통이다. 없어지면 전설일 뿐이다. 쌍송국수는 애환을 겪으며 살아남았다. 인간사의 흐름처럼, 본디 인간의 숙명처럼. 윤회의 마디에서 버텨내기.
 
지유 스님의 국수를 젓가락으로 감아올린다. 딱 넣을 것을 넣고 거칠고 자극적인 것은 빼낸, 순수의 맛. 그저 태양빛에 말리고 응달에서 바람 쐰 저 국수의 본령을 표현하는 맛. 감사하게 한 그릇을 비운다. 지유 스님이 물에 손 넣고 불 때며 요리를 하게 된 것은 당신의 건강에 관한 고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면역에 대한 오랜 고민이 스스로 음식을 만들도록 길을 열었다. 희고 단정한 국수에 슴슴한 양념을 얹어 비벼내니, 그것으로 스님의 공양 뜻을 새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전국의 절에서 스님들을 웃게 만드는 이 단정하고 고운 음식을 다시 본다.            
 
 
촬영협조. 예산 쌍송국수, 041-335-7533     
 
박찬일
‘문학과지성사’가 운영하는 ‘로칸다 몽로夢路’의 헤드셰프이자 작가.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콩나물과 마늘을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몇몇 히트식당을 열었으며,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이탈리아 요리는 그가 최초이다. ‘글쓰는 요리사’로 『뜨거운 한 입』,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등 그만의 따뜻한 시선과 감성어린 문장이 돋보이는 책들을 냈다.
 
 
 
 
5.png
 
지유 스님의 새콤달콤 별미 버섯 비빔국수
 
재료
국수 한 줌, 생표고버섯 2송이, 만가닥버섯 1/2팩, 팽이버섯1/2팩, 어린잎 채소 한 줌
● 비빔장 : 고추장 2T, 고춧가루 1T, 간장 1T, 매실 엑기스 1T, 식초 1T, 후추 약간, 참기름 1t, 조청1T, 통깨1t
 
6.png
 
만드는 법
 
 
1. 각종 버섯을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물기를 뺀다.
 
 
 
 
2. 양념 재료를 모두 섞어 비빔장을 만들고, 비빔장에 버섯을 재워 놓는다.
 
 
 
3. 면을 삶는다. 물이 끓어오를 때 찬물을 조금 넣는 것을 세 번 쯤 반복하며 삶아낸다. 삶은 면은 찬물에 헹구어 물기를 뺀다.
 
 
 
4. 물기 뺀 면에 재워 놓은 버섯과 나머지 양념을 넣어 고루 무친다. 어린잎 채소를 얹어낸다.
 
 
 
 
 
 
 
 
 
 
 
 
 
 
 
Tip_
버섯에는 항암·항바이러스·콜레스테롤 조절·면역조절능력 강화 등 여러 효능이 있다. 맛과 건강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영양 식품이다.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