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상 스님과 함께 시금치 찾아 떠난 여행길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 가람 배치를 볼 새도 없이 원주실에 들러 도안 스님과 농감農監인 서일 스님께 절을 올린다. 절은 인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몸을 내리는 행위이니, 본디 사邪가 없다고 하였다. 여담인데, 남이 절하는 모습을 보는 건 뭐랄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스님이 차를 내시는데 무차다. 그러니까, 무로 만든 차라는 말이다. 무는 밭에서 흔히 자라는 작물이니 선골이 느껴질 리 만무하지만 통도사에서 마시는 차인 까닭일까, 머리 뒤 척추를 타고 긴장이 서늘하다.
“감 좀 드셔보세요. 선방 앞에 감나무가 있어요. 올해 감이 잘 되었어.”
달고 은은한 대봉이다. 이 즈음 원상 스님이 드신다. 겨울 준비에 유달리 바쁜 철, 스님들 안색에 피곤이 내렸다. 김장을 마친 지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연료부터 챙겨야 했던 옛 월동준비보다는 덜 하지만, 그래도 머무는 스님에 대중들까지 워낙 붐비는 절이라 그 준비가 여간하지 않을 것이다.
통도사는 우리나라에 다섯밖에 없는 총림이다. 총림叢林이란 수행하는 선원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 계를 교육하는 율원을 모두 갖춘 사찰을 이른다. 통도사를 비롯하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등이다. 절 살림의 무게가 바위 같고, 폭은 바다처럼 넓으리라. 아닌 게 아니라 농감 계신 사찰이 어디 흔하던가. 서일 스님은 햇빛에 그을고, 바람에 거칠어진 풍모다. 원상 스님의 안내로 통도사에서도 외부인에게 금문禁門인 전통적인 부엌을 구경한다. 장작 때는 커다란 가마솥이 위엄 있다. 완벽하게 닦이고 정리되어 있어 통도사의 율법이 저 공양간의 솥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걸 알겠다.
알다시피 통도사는 영축산靈鷲山에 자리한다. 영축은 신령스러운 독수리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설법했던 인도의 산 이름과 같다. 1,081미터의 악산惡山으로 험하기로 소문난 영남 알프스의 한 축이기도 하다. 그 산 봉우리 사이에 통도사가 자리 잡고 있다. 서일 스님의 안내로 산 쪽으로 차를 몰았다. 거칠고 좁은 길을 따라 흔들리는 차창에 겨울 산의 위엄이 우뚝하다. 그리고는 잠시 경탄이 나오는 장면이 연출된다. 놀랍게도 그 험한 영축산의 봉우리들 사이로 마치 무릉의 복숭아밭이라고 해도 될 너르고 평안해 보이는 들판이 쭉 펼쳐져 있다. 과거부터 천 석의 농사를 지어냈을 것 같다. 지각 변화로 생겨난 자연의 결과물이라고만 말하기에는 그 영험함이 다 설명될 것 같지 않다. 흙은 따사롭고, 기름지다. 김장이 끝난 지 오래되지 않아 원상 스님의 무용담(?)이 궁금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김장이 있었을 테니까.
“모르겠어요. 그저 배추를 씻고 절이고 양념치고, 해야 되니까 하는 일이고 그것이 순리대로 다 잘 되었어요. 누가 언제 그렇게 엄청난 배추 무를 보기나 했나 뭐(웃음).”
이런 걸 부처님 가피를 입었다고 하나. 잠시 웃음꽃이 핀다.
서일 스님의 농감직은 불보사찰 통도사의 공식 직책이다. 10개의 주요부서 가운데 하나를 차지한다. 농사는 통도사의 정신적 육체적 수행의 한 방편이면서 동시에 오랜 전통이다. 바로 그 너른 천 석의 땅에서 말이다.
| 농사란 자식 기르는 것과 같은 일
겨울 초입이 지났는데 아직도 들에 푸름이 남아 있다. 꼿꼿한 대가 솟아 있는 상추며 근대다. 잎은 작으나 얼마든지 더 따먹을 수 있겠다.
“움이 봄까지 계속 올라와요. 저 봉우리를 보세요.(산세가 험한 돌산이 너른 들판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저기, 저것이 어미의 젖처럼 생겼습니다. 젖이 끊임없이 흘러 이 들판을 적시지요. 만물이 어미의 품에서 자랍니다.”
그러면서 서일 스님이 상추 한 포기를 어루만지면서 “아직도 살아 있네.” 하며 혼잣말한다.
들판이 너르고 평안해 보이지만, 가혹한 영남 알프스의 자락은 여지없다. 밤이면 바람소리가 매서워 선승들의 잠을 깨운다. 영축산의 깊이와 너비를 위력하듯, 돌풍이 불어서 만물의 고요를 뒤집어버린다.
“농약은 칠 일이 없고. 대신 퇴비를 잘 해야지요. 퇴비도 그저 준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서일 스님의 생육론은 좀 독특하다. 퇴비를 조금 모자란 듯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작물이 저마다 자라기 위해 애를 쓰고 그것이 맛과 영양으로 응축된다는 것이다. 결핍이 만들어내는 각성이랄까. 갑자기 서늘한 겨울바람이 온화하던 들판에 휘몰아친다. 서일 스님의 청동빛 얼굴이 바람에 거칠다.
“이렇게 키운 푸성귀가 후원後園으로 가서 공양간 음식이 됩니다. 양이 충분해요. 요즘 절에서는 드문 일입니다. 다 영축산 이 들판의 힘입니다.”
들판을 잘 보려거든 서 있지 말고 앉아야 한다. 그래야 들의 시선으로 작물을 보게 된다. 더 낮게 시선을 내리니, 밭과 흙이 보인다. 겨울인데 밭을 갈아두었다.
“겨울에 이미 농사가 시작됩니다. 갈아두어야 겨울에 내리는 눈과 비가 알갱이 사이사이로 들어가 공간이 생깁니다. 나중에 거름을 주면 그 공간을 집삼아 들어앉게 되지요. 무작정 거름 준다고 땅이 다 받아주는 게 아닙니다.”
거름이 흙에 붙자면 그만큼 땅에 대해 이해하고 사랑을 주어야 한다. 씨가 뿌리내리고 양분을 빨아들여 자랄 수 있게 해야 한다.
“농사란 자식 기르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오직 겨울 들판에 시금치가 혼자 푸르러 제철이다. 섬초라고 부르는 종자의 시금치가 나오기는 아직 이르고, 이 노지에 잎이 넓고 키가 훌쩍 큰 시금치가 자란다. 뿌리까지 뽑지 않고 솎아내면 계속 자라서 넉넉히 제 살을 준다. 쌈도 되고 샐러드도 되고 물론 나물도 된다. 이 겨울, 김장 말고 푸성귀가 없던 시절에 시금치는 너무도 귀중한 푸르름이었을 것이다.
| 노지에서 바람과 싸워 이겨낸 채소임에랴
농감스님을 뵈오니, 수월 스님의 수행을 생각하게 된다. 경허 스님의 제자로 오직 장작 패기와 가마니 짜기, 농사 짓기와 마당 쓸기로 불법을 이루었던 수월 스님. 다라니를 칠 때면 불처럼 방광이 일어 민가의 사람들이 산중에 불이 난 줄 알았다던 수월 스님.
“정혜사에 수월 스님이 주석했었지요. 저도 그 절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통도사는 법회를 하면 1천 명이 넘는 대중이 모이고, 스님만 해도 1백50이 넘으니 조석으로 찬거리 대는 일이 고된 절이다. 수도하는 데 좋은 음식을 대는 것이 농감스님의 의무이기도 하다.
“싱싱하고 약성 좋은 채소를 내고 스님들이 입맛을 잃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겨울을 넘기고 봄에 움을 틔워 자라는 채소가 아주 약성과 맛이 뛰어나다고 스님은 말한다. 그것도 노지에서 바람과 싸워 이겨낸 채소임에랴. 겨우내 살기 위해 영양을 뿌리와 잎에 응축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곧 ‘맛’이라고 부른다고 하신다.
“쓴 채소가 정진에 좋습니다. 건강도 지켜주지요.”
뿌리의 생장점만 건드리지 않으면 겨우내 채소가 죽지 않고 버티고 있다가 봄을 맞아 싹을 틔운다. 놀라운 이 자연의 위대함이라니.
“그러다가 온도가 더 높아지면 씨를 맺어요. 따뜻한 땅에 새끼를 낳는 것이지요. 생명의 신비, 놀랍지 않나요.”
봄에 싹이 올라오는 채소가 맛과 향이 강하다. 겨우내 응축되어 있던 것이다. 한창 푸성귀의 수확이 많을 때는 매일 점심은 쌈이 되는데, 상치와 풋고추, 호박잎, 쑥갓 같은 것들을 오래 댄다.
가을 겨울 봄까지 수확하고 먹는다. 이런 시금치는 약성이 강하고 맛도 좋다. 이런 쓴 채소들은 수행 정진에 좋다. 입맛을 돋워 건강을 지켜준다. 그것이 농감의 소박한 의무이기도 하다.
시금치를 딴다. 뿌리를 뽑아본다. 건강하고 힘이 세다. 향이 더덕이나 인삼 못지않다. 뿌리가 이렇게 튼튼하니, 그것이 피워낸 잎은 얼마나 건강하고 맛이 있을 것인가. 뿌리를 씹어본다. 놀라운 맛이다. 고소하고 진하며 알싸하다. 이런 시금치 뿌리라면 말려서 덖은 후 차로 마셔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일 스님은 출가 후 밭이 많은 곳에서 수행하다보니 농무를 많이 하게 됐다. 원래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 것이 그 인연이 되었다.
“농사가 인간사의 한 압축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매기도 그래요. 자, 여기 시금치 보세요. 잡초랑 섞여 있어요. 서로 사이좋게 돋아나 있습니다. 그러나 땅 아래서는 서로 살기 위한 뿌리 싸움이 치열합니다. 잡초를 무조건 김매기 잘해준다고 작물에 좋은 게 아니에요. 경쟁에서 이기도록 유도해 주는 것도 농사입니다. 그러다가 잡초보다 먼저 쑥쑥 자라서 햇빛 경쟁에서 이기면 자연스레 잡초는 무너지지요.”
농사가 무릇 도라고 했던가. 이 절묘한 생명의 법칙. 전율이 인다.
인간이 맛있으면 작물이고 맛이 없으면 잡초다. 다 같은 풀인데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윤회와 출생이 더욱 공교롭고 감사할 뿐이다. 어떻게 덕을 쌓고 수행해야 할지 깨닫게 될지니.
원상 스님과 함께 시금치를 따서 생명과 자연의 맛을 가르치는 교육장으로 이동한다. 서일 스님이 손을 흔드신다. 스님은 다시 저 바람과 싸워갈 것이다. 원상 스님을 도와 시금치를 손질한다. 시금치는 부드러워서 샐러드나 쌈으로 먹기 좋고 국으로 끓여도 훌륭하다. 물론 오늘 요리처럼 전을 부쳐도 최고다. 겨울의 힘이 응축되어 있는 푸성귀다.
“겨울 시금치는 아주 고마운 존재지요. 생명이 없는 것 같은 들판에서 푸르게 싱싱하니까.”
또 스님과 헤어져 서울로 온다. 짧은 하루가 진다. 겨울을 견뎌내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박찬일
‘문학과지성사’가 운영하는 ‘로칸다 몽로夢路’의 헤드셰프이자 작가. 어머니 치맛자락 앞에서 콩나물과 마늘을 다듬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몇몇 히트식당을 열었으며, 한국 식재료를 이용한 이탈리아 요리는 그가 최초이다. ‘글쓰는 요리사’로 『뜨거운 한 입』,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보통날의 파스타』 등 그만의 따뜻한 시선과 감성어린 문장이 돋보이는 책들을 냈다.
원상 스님의 겨울 별미
시금치 녹두전
재료
녹두 불린 것 1컵, 시금치 50g, 두부 30g, 홍고추 1개, 소금, 들기름, 부침유
간장소스 :맛간장, 식초, 다진 잣 1ts
1. 시금치는 1cm 정도 크기로 자른다.
2. 불린 녹두를 믹서기에 갈아질 만큼의 물을 붓고 곱게 갈아내고, 갈은 녹두에 으깬 두부와 시금치를 잘 섞어 소금으로 간한다.
3. 후라이팬에 들기름과 부침유를 두르고 한 입 크기로 약간 도톰하게 구워낸다.
4. 홍고추는 동글동글하게 썰어 위에 한 개씩 장식한다. 다진 잣을 넣은 식초간장을 함께 곁들여 낸다.Tip_
tip. 시금치는 비타민 A가 많이 들어있고, 비타민 C, B1, B2, B6, 요오드, 칼슘 등의 영양소도 듬뿍 들어있다. 특히 빨간 뿌리에 들어있는 망간(Mn)은 피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성분으로 인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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