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혜초 스님의 시를 읽었다. 시 ‘여수旅愁’였다. 여행자가 길을 떠나 객지에서 느끼게 되는 쓸쓸함과 시름을 표현한 시였다. 내용은 이렇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鷄林으로 날아가리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떠나온 곳과 도달할 곳 사이에 있는 것이 여행의 행로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객수客愁가 없을 리 없다. 구법의 여행을 떠났던 혜초 스님도 그런 감정을 잠시 느끼셨던 모양이다.
마치 헤르만 헤세가 “나의 방랑이 끝난 북쪽 나라에 인사를 하며 모자를 흔든다. 뜨거운 생각이 가슴속을 지나간다. 아, 나의 고향은 아무 데도 없구나.”라고 썼던 것처럼.
하루에도 시작과 끝이 있고, 계절에도 시작과 끝이 있고, 한 해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하나의 사건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가령 나는 최근에 제주도 한림의 한 곶자왈에서 아침 산책에 나섰다가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조용조용하게 울다 포르릉 나의 시야로부터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도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었던 셈이다. 이 사건은 내게 생명의 발랄한 생기를 안겨다 주었다. 한 컵의 시원하고 깨끗한 물처럼.
물론 하나의 시간과 사건의 끝은 새로운 시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루의 끝은 새로운 하루가 동터오는 아침과 연결되어 있다. 가을이라는 계절의 끝은 나목과 한천寒天의 겨울과 연결되어 있다. 한 해의 끝은 새로운 해의 일출日出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내겐 이 끝과 시작의 어딘가에 운동장과 같은 공간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무도 없는 막막한 운동장이 그 끝과 새로운 시작의 틈에 펼쳐져 있다는 느낌이다. 시간의 비좁은 틈에 비교적 넓고 한적하고 그래서 외로운 생각을 갖게 하는 그런 운동장이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또 생각해보자. 한 장의 책장을 넘길 때 그리하여 다음의 책장을 펼칠 때, 그 사이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는 과연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두 책장의 경계면에 이 운동장 같은 것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숨겨져 있는 이 운동장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뭔가를 만들려는 마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뭔가 계속해서 진행시키려는 의욕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무력감이 없었을 리 없다. 절벽이 하나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운동장에 서면 비로소 무력감과 낙망의 절벽이 이내 서서히 사라지고 새로운 지평의 미래가 환하게 열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삶의 고비와 고단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의 아버지께서 매일 고단한 농사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밤새 앓으면서도 새벽이면 들에 나가셨다. 아버지는 앓으면서 회복되셨던 것이다. 앓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앞서 말한 운동장 같은 곳에 홀로 서 계셨을 것이다.
받아 든
금간 시간
가만히
바라보면
수묵 빛
산그늘이
서늘하게
고여 있다
적막과
마주한 겸상
얼핏, 그가 그립다
유재영 시인(1948~)은 시조 ‘겸상兼床’에서 이렇게 썼다. 새로운 시간은 옛 시간과 연결되어 있다. 견고하게 혹은 이 시에서처럼 희미하게. 옛 시간이 새로운 시간으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애초부터 갖고 있던 맑음과 따뜻함과 긍정심을 점차 회복하게 된다. 다음의 일을 설계하게 된다. 난초에서 새로운 촉이 돋듯이 우리의 마음속에도 움직임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맞는 새해의 첫날처럼.
문태준
199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등이 있다.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동서문학상, 서정시학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불교방송 PD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