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참회는 타협할 수 없다
특집 : 참회 ! 나를 사랑하고 넘어가라 1. 보현행원품 참회분 / 광덕 스님
『화엄경』 「보현행원품」 ‘참회분’에는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보살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과거 무시겁중에 탐진치로 인해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모든 악업이 한량없고 끝도 없으니, 만약 이런 악업이 모양이 있다면 허공도 그것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라며 참회의 한량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본래 마음이 자성청정하다는 것을 경전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참회가 자기를 책망하는 죄책감이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밝고 청정한 본래의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참회를 통해 나를 아끼고 사랑하며, 나조차 넘어갈 수 있도록 자비심을 높이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살게 됩니다. 원효 스님의 「대승육정참회문」은 우리 불자들에게 이러한 대승의 지혜와 자비심을 일으키게 합니다. |
홍서원은 지리산 화개골 맥전마을에 있다. 이곳에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 이야기』,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행복 이야기』를 쓴 천진, 현현 두 스님이 스승 정봉 스님과 함께 산다. 정봉 스님이 화개골에 온 것은 1994년도다. 산속 동굴에서 미숫가루만 먹으며 3년 간 수행한 뒤, 헌 나무와 헌 문짝들로 한 평 남짓한 토굴을 짓고 살았다.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았다. 스님 밑에서 공부하길 원하는 수행자가 한 명씩 찾아올 때마다 손수 토굴을 지었다. 홍서원을 찾아와 법을 청하는 이들에게는 지극한 법문으로 불법의 인因을 심어주었다. 그 법문을 책으로 묶어 세상에 회향한 다음, 3년 무문관으로 수행을 이어나갔다. 무문관을 들어가기 전과 마친 이후, 정봉 스님의 법문은 줄곧 ‘참회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왜 참회 수행일까? 참회를 화두로 지리산을 향했다.
자기를 잘 살피는 것이 참회의 시작이다
공양시간을 막 지나 들이닥친 객을 위해 밥을 짓느라 공양간이 분주한 가운데, 종이로 빚은 연꽃으로 가득한 법당에서 정봉 스님이 객을 맞이했다. 정봉 스님의 깊은 눈매는 달마 대사를, 평온한 미소는 관세음보살을 닮아 있었다.
- 스님, 한 해를 보내며 불자들과 생각거리를 나누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스님께서 평소 ‘참회 수행’을 무척 강조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참회라고 하면 무엇을 참회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먼저 앞서는데요, 무엇을 참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지금 저를 본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봉 스님이 여기 앉아서 법문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몸뚱이, 저는 이런 존재가 아니거든요. 그것,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참회를 하세요. 당장에.(웃음)”
- 말씀이 어렵게 들립니다.
(스마트폰 들어 보이며)개는 이거 못 보잖아요. 의식의 차원 따라서 수준 따라서 근기 따라서 자기 세계로 자기 마음으로 오는 것이지, 하나도 진정한 게 없어요. (스마트폰을 가리키며)지금 우리가 이것을 보잖아요. 하얀색이고, 딱딱하고…. 그것은 공업共業의 안경을 끼고 이 세상에 와서 같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또 다른 의식의 차원에서는 다르게 보지요. 그런데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본다고 믿고 있으니 착각으로 어리석게 사는 것에 대한 참회를 해야지요.”
- 모든 수행에 앞서 참회를 먼저 해야 하는 이유를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성인이든 성인이 아니든 죄 안 짓고 존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몸을 짚으며)이게 그 증거거든요. 이 사대오온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무지무명의 산물입니다. 왜냐면 이 몸뚱어리는 남의 생명을 취해야 존재하는 거니까요. 중생세계에서 미혹되어 살아가는 것, 다른 생명에 대한 업보를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참괴심을 갖고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참회를 하면 그때부터 불보살님의 권속이 돼요. 그 사람 하는 일에, 걸음걸음마다 불보살님이 보호를 해줍니다. 그렇게 하는 게 불교 입문입니다.”
- 진정으로 참회하는 마음을 내려면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참회를 해야 한다는 것조차 생각 못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지요.
“아난 존자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안 계시면 저희들은 어떻게 수행해야 됩니까?’ 물었거든요. 그때 부처님이 ‘잘 살펴라, 사념처 수행, 관 수행을 해라….’ 이렇게 얘기하셨어요. 살피는 것, 그것이 참회의 시작이죠. ‘자기를 살펴봐라.’ 하는 그 속에 ‘잘못된 것을 고쳐나가라.’ 이것이 포함되거든요. 몸도 살펴보고 마음도 살펴보고 정신도 살펴보고, 내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디로 가는지, 착각으로 가는지 무지무명으로 가는지 잘못된 길로 가서 악도에 떨어지는 일을 하는지, 이런 걸 잘 살펴보라는 겁니다. 잘 살펴보다보면 자기 허물이 보이죠.
| 깨달은 사람도 업보는 반드시 받는다
- 세속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참회라는 것이 죄책감이나 죄의식 이런 쪽으로 흐르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들켰기 때문에 그래요. 잘못됐을 때, 그때 스스로 자기 자신한테 들키는 거예요. 그러기 전에는 참회를 안 하죠. 적당하니 넘어가다가 사고 나고 일이 생기면 아, 내가 뭔가 잘못해서 이런가보다 하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고 겁을 내잖아요. 그때 참회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데 그것도 잠깐 하고 끝나요. 진정한 참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살피는 데 있어요. 자기가 자기를 잘 살펴보고 나쁜 길로 가는 자기 행동을 알아차리고 금방 바꾸면 생각 바꾸는 동시에 참회가 되는 거죠. 아는 것과 동시에 참회가 되는 거예요. 그 외에는 가짜 참회예요.”
- 일시적인 참회일지라도 그러한 경계를 자꾸 체험하면서 참회를 경험하고 진정한 참회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그리, 안 될 겁니다. 세상일은 결국 세상일로 끝나요. 가령 예를 들어서, 꿈속에 내가 황금을 주웠어요. 너무너무 기뻐서 갖고 있는데 꿈을 딱 깼단 말이에요. 그 황금을 바깥으로 못 가져와요. 현실의 세계하고 꿈속의 세계는 별개거든요. 마찬가지로 진리의 세계면 진리의 세계고, 중생의 세계면 중생의 세계예요. 이 사바세계와 진리의 세계는 결코 함께할 수 없어요. 세속적인 입장의 참회는 언제든지 타협할 수 있는 참회거든요. 감출 수 있는 참회고. 그래서 언제나 진리 쪽을 향한 마음을 내야 합니다.”
- 참회를 이야기하다 보면 참회의 다른 한 편에 과보라는 단어가 함께 짝을 이루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과보라는 것은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잖아요.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어요. 살인을 딱 해놓고 나서 너무너무 잘못했다,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하고 거기 엎드려서 눈물 흘리고 참회를 한다고 해도 과보는, 결과는 받아야 되잖아요. 사람을 죽였으니까. 행동하기 전에 참회를 해서 자기 의지력으로 실행을 하지 않으면 결과 과보에 대한 실질적인 효과가 있지만, 죄를 저질러 놓고 뒤에 알아차리고 참회를 한들, 과보는 받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셨죠. 깨달은 사람도, 어떤 누구라도 업보는 반드시 받아야 된다, 인과응보가 분명하다. 개미새끼 한 마리 죽여도 어느 한 생에는 자기가 죽어야 됩니다. 생명의 무게는 똑같습니다. 존재계 법칙이 그래요. 평등성, 그게 진리거든요.”
- 그렇다면 공空의 의미는 참회할 과보가 없다거나 참회를 통해서 과보가 없어지는 것과는 다릅니까? 참회와 공을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어떤 것이 바른 이해인지요?
“깨달으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인과는 안 없어져요. 인과의 법칙이 더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예요.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과거 생에 지었던 행위 과보를 다 받으셨어요. 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법칙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진행된다는 뜻도 있어요. 광대무변한 허공 속에서 그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규정대로 탁탁 맞아떨어져서 살아가죠.”
| 진정한 참회의 아름다운 과보
- 인과와 공이 결국은 하나로 돌아가는 법칙이라는 말씀이군요. 불자들이 참회를 통해서 과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마음 편한 것이 과보가 줄어드는 것과 같아요. 저는 초등학교 때 땡땡이를 많이 쳤어요. 점심에 집에 가서 밥 먹고 다시 학교를 가야 되는데, 가다보면 개울도 있고 둑도 지나요. 물가에서 한량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죠. 놀다가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학교 한 번 쳐다보고, 어? 이거 안 되겠네 하고 뛰어가면 벌써 오후 수업이 끝나갈 때쯤 돼요. 회초리를 맞는 거죠. 이때 달게 받겠다는 마음 때문에 아픈 것을 충분히 감내할 수가 있어요. 진정한 참회는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 내가 참 무지해서 이런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하고 그대로 수용하는 거예요. 잘못한 것을 진정으로 알았을 때 받는 그 과보는 아름다운 겁니다. 아름답게 받아야 돼요. 나는 그래서 종아리 걷고 기분 좋게 회초리를 맞았죠. ‘너희들은 앉아서 고생했다, 나는 실컷 잘 놀다 왔다.’ 하고.(웃음)”
- 그러면 내가 지은 행위 과보를 달게 받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난 뒤에는 참회기도를 어떤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어떤 방법’이라고 하면 추해져요, 진정으로 우러나야지. 잘못된 것을 바꾸려고 참회하는 건데, 그럴 때는 바깥의 문제가 전혀 상관없어야 돼요. 남이 욕을 하던지 잘한다고 하던지 아무 상관없잖아요, 남 보라고 참회하는 게 아니고 칭찬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회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문제죠. 어떤 방법을 논하기 전에 내가 참, 정말 잘못했다 진짜 이건 고쳐야 된다 하는 마음이 백퍼센트라고 하면, 그냥 그 자리에서 참회를 하는 거예요.”
- 스님의 제자 천진, 현현 스님이 쓴 책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이야기』에 ‘금강살타 백자명진언’이 나옵니다. 이 진언이 참회수행에 도움이 될까요.
“티베트불교에서는 백자명진언 많이 하죠. 저도 티베트불교를 조금 접해봐서 이건 참회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구나 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방법들이 많이 있겠죠. 그런데 스스로 참회하는 데에 힘이 부족해서 불보살님들의 가피를 빌리는 것이니까, 백자명진언 같은 것을 할 분들은 일단은 불자여야 하고 계를 받으신 분이어야 됩니다. 불자가 아닌 사람이 하면 진정으로 우러나질 않을 거예요, 그런 진언들이.”
- 마지막으로 참회와 관련해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요.
“고통과 괴로운 일,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지금 시대가 오탁악세라서’ ‘권력 쥔 자, 부자들이 잘못해서’ 이렇게 원망하지 말고 반드시 자기를 살펴보고 자기한테서 문제를 찾아야 됩니다. 바깥에 상관없이. 어떻게 하면 옳은 일이고 어떻게 하면 그릇된 일인가 잘 판단을 못하는 우리는 지혜롭게 판단을 하신 분의 말씀을 따르는 게 제일 좋은 일이죠. 부처님 가르침 따라가라는 겁니다. 반드시 채식하고, 계를 지키세요.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이예요. 돈 많이 벌고 부자 된 사람들이 대부분 보면 남을 이롭게 하고 나도 이로운 생각을, 전생이던지 이생이던지 그런 큰마음을 갖고 일을 했기 때문에 그 과보로 잘 사는 거예요.”
- 고맙습니다, 스님.
“오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밥 다됐나 …. 밥 맛있게 잡숫고 가세요.”
홍서원을 나서는 길, 손에는 정봉 스님으로부터 받은 ‘일일기도문’이 들려 있다. 스님은 아침저녁으로 기도문을 독송하고 채식하며 계를 지킬 것을 신신당부했다. “부탁입니다. 이것만은 반드시 하셔야 합니다.” 기도문은 귀의와 참회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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