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지진 속을 걷다–여섯
‘나는 무사합니다.’
산행기간 동안 꺼 놓았던 휴대폰을 켜니 안부를 묻는 메시지가 많이 들어와 있다. 보통은 트레킹을 마칠 때까지 휴대폰을 켜지 않는데 지진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을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지진에 관한 정보도 검색하기 위해 이번에는 휴대폰을 잠시 사용하기로 했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할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형제들에게 먼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하고 안부를 물어온 도반, 지인들에게 차례로 별 일없이 하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실 출가해서 오래도록 가족들하고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집을 나와 가족들과 계속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출가자에게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가족들이 내가 살고 있는 거처를 알게 되어 지금은 가끔 찾아가고 오는 관계가 되었지만 어머님이 돌아가신 줄도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절연하고 살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집을 떠났는데 내 몸을 준 사람, 혈연들을 외면하고 아프게 했으니 생각해 보면 그리 현명한 결심은 아니었다. 비록 사는 방식이 다르고 생각이 같지 않아도 나를 위호해주는 제일의 울타리는 가족이라는 것을 소통하며 알게 되었다.
티베트에서는 출가를 하게 되면 가족이 뒷바라지를 해준다. 가족은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하는 후원자이면서 도업을 이루고 나면 가장 먼저 도업의 시혜를 받는 대상이기도 하다. 구조적으로 승가는 재가자들의 외호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재가 신도는 가족에 다름 아니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사적인 혈연관계를 말하지만 연기적 존재방식으로 보면 모든 생명체가 다 가족이다. 이 관계 속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는 역시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분명하다. 나는 집을 떠났지만 그들의 집속에는 항상 내가 있었다. 특히 어머님은 죽을 때까지 당신의 가슴속에서 나의 손을 놓지 않으셨다고 한다. ‘나는 무사합니다.’ 내가 전한 이 한마디에 가족들의 집속에는 다시 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남체에는 시설은 허술하지만 사우나도 있다. 카트만두의 전력이나 물 사정을 알 수가 없어 여기에서 대충 수염도 깎고 몸을 정리했다. 숙소로 돌아와 TV를 보니 다른 지역의 지진피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몇 년 전에 갔던 랑탕 마을은 이번 지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이 숙소의 며느리는 랑탕이 집이라고 하면서 표정이 매우 어둡다. 요리를 하면서도 시선은 텔레비전에 가 있다. 가서 직접 가족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싶어도 쉬이 갈 수 없으니 그 애타는 마음이 짐작이 간다. 뭐라 위로를 할 수가 없다. 삼층으로 된 숙소에서 각자 방을 정했지만 아직도 여진 때문에 안심이 되지 않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층 식당에 잠자리를 정했다. 삼층에는 아무도 머무르지 않는다. 오직 나 혼자다. ‘삼계에 위태롭지 않은 곳이 있는가.’ 호기 아닌 호기를 부리며 잠을 청한다.
|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옛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의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끔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따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 한용운, ‘꽃이 먼저 알아’
고도가 낮아지니 산들이 녹색으로 바뀌며 생기가 넘친다. 산은 이제 숲이 되어 푸른빛을 흘리며 따라 내려온다. 밭에는 따뜻한 봄볕에 작물들이 자라고 있는 모양새가 우리네 밭과 다르지 않다. 감자, 유채, 근대, 고수, 부추, 파, 마늘 등 친근한 밭작물들이 점점 푸름을 더해가고 있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쪽에서 차를 마시며 해바라기를 한다. 평화롭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졸음이 밀려온다. 오래 쉬고 싶다.
무너진 돌담사이로 냉이가 하얀 꽃을 내밀며 하늘거린다. 질긴 생명력을 지닌 냉이꽃에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아무리 땅이 척박해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저 냉이처럼 시간이 흐르면 그들은 예의 환한 미소를 다시 돌담너머로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슬픔이 그들 곁에 맴돌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굳게 닫힌 가게들이 눈에 띤다. 가이드인 빠상이 말하기를 이번 지진으로 죽은 셀파의 집이란다. 어제 화장을 해서 산에 뿌렸다고 한다. 젊은 죽음들이 푸른 슬픔으로 봄빛에 섞여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낮은 곳에서 화장을 하고 돈이 많거나 유명한 스님들은 높은 곳에서 화장을 한다고 하니 그들의 풍습이니까 이해는 하지만, 죽어서도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에 의해서 화장하는 장소까지 달라진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씁쓸하다. 죽은 셀파의 아내가 흘렸을 눈물들이 길가에 피어있는 저 꽃들 어디에 한 방울쯤은 떨어졌으리라. 그 꽃들이 그들의 죽음을 피어있는 내내 조문하리라.
| 다시 일어나 히말라야처럼 우뚝 서기를
이제 거의 내려왔다. 내일이면 공항이 있는 루크라에 도착할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모레쯤에는 카트만두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비행기가 며칠째 뜨지 않는다고 하니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출발하는 날은 날씨가 좋기를 바라는 수밖에 지금은 도리가 없다. 첫날 묵었던 팍딩을 지나 가트ghat에서 묵기로 하고 곰빠 곁에 있는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숙소 이름이 ‘라마’여서 물어봤더니 곰빠의 주지스님 아들이 미국에 가서 돈을 벌어 롯지를 지었는데 이름을 스님을 뜻하는 ‘라마’로 지었다고 한다. 밤이 되니 숙소의 주인과 아이들 일하는 사람 모두가 마을 공터에 설치되어 있는 텐트촌으로 잠을 자러간다. 롯지는 손님들 밖에 없다. 여기서 그 동안 수고했던 가이드, 포터, 주방 팀들을 위해서 파티를 열어주기로 했다.
트레킹이 끝나면 고생한 가이드와 포터들을 위해 요즈음 말로 한턱 쏘는 게 관행이다. 여느 때 같으면 꽤 요란하게 잔치를 벌였을 텐데 비상상황이다 보니 조촐하게 하기로 했다. 롯지에 있는 맥주와 과자로 상을 차리고 판을 벌렸다. 네팔 사람들은 흥이 많은 사람들이다.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판이 무르익자 자연스럽게 네팔의 대표적인 민요인 ‘렛쌈 삐리리’가 흘러나오고 춤판이 벌어진다. 가이드인 빠상이 경험이 많아 노련하게 판을 주도해간다. 노래와 춤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슬리퍼를 신고 추레한 옷차림에 무거운 짐을 지고 히말라야를 오르내리는 포터들도 춤 솜씨만큼은 일품이다. 곰빠의 노스님도 중간에 구경하러 오시고 그런대로 적당한 흥겨움이 함께한 판이었다. 지진으로 인한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마음껏 소리치며 시끌벅적하게 놀지는 못했어도 그들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위로해주는 판은 되었다.
밖으로 나오니 채 만월이 되지 않은 달이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보인다. ‘오늘이 음력 12일이니 보름달은 카트만두에서 볼 수 있겠구나. 저 달이 점점 차올라 둥글게 되듯이 지진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 땅과 사람들, 불안과 공포로 생기를 잃고 쓰러져 가로로 길게 누운 마음들이 다시 일어나 히말라야처럼 우뚝 서기를, 히말라야의 흰 빛처럼 다시 순수해지기를, 히말라야의 너른 품처럼 넉넉해지기를.’ 달빛아래서 바람에 펄럭이는 룽다에 기원을 실어본다.
12월호를 마지막으로 ‘히말라야에서 듣다’ 연재를 마칩니다. 설산 히말라야의 치열하고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담아 보여주셨던 만우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만우 스님
계룡산 갑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강원에서 잠시 수학하고 월간 「해인」 편집위원과 도서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미황사 부도암 한주로 머물며 히말라야를 여행하고 돌아와 낯선 곳에서 만난 낯익은 삶에 대한 특별한 기록들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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