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큼 가야지요, 더 늦기 전에”
불교, 통일을 시뮬레이션하다 |
01 그리운 사찰, 그곳에 가고 싶다 : 그곳에 남은 절과 절터 / 하정혜 지난 봄, 한 케냐인이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쫓겨났습니다. 평창Pyeongchang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려던 그에게, 철자가 비슷한 평양Pyongyang행 비행기표를 건넨 여행사 직원의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평양으로 가는 하늘길이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북한은 대부분의 나라와 똑같이, 비자visa없이 입국한 외국인에게 강제출국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그동안 개성공단을 개방하고 금강산 관광사업을 남북공동으로 추진할 정도로, 북한은 더 이상 폐쇄된 사회주의국가가 아닙니다. 특히 북한의 젊은 세대는 자본주의의 가치들을 빠르게 학습하고 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것이 광복 70년, 분단 70년의 세월 동안 우리에겐 극단적 대립의 적국敵國이라는 화인火印으로 새겨져 있던 북한의 현주소입니다. 이념대립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통일의 실체는 아직 막연합니다. 지금, 불자와 불교계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동안 어떤 준비를 해왔을까요? 멀지 않은 시기에 통일이 된다면, 우리가 몰랐던 북한불교는 어떤 모습일지 이번 특집에서 살펴봅니다. - 편집자 주 |
“우리 아들이 오마니한테 어찌 이케 늦게 완?”
시인의 손등 위로 어머니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시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첫 글 ‘귀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분단 70년, 애타는 기다림은 세월에 늙지도 않고 펄펄 살아서 제 생의 종지부를 찍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때 남북교류의 급물살을 타고 잠시나마 고향땅을 밟았던 장인자 할머니는 올 가을, 생애 마지막 방북을 준비한다. 몇 번이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더는 기다릴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한국전쟁 때 폭격에 쓰러진 신계사 복원불사 도감으로 금강산에서 4년을 머문 제정 스님은 낮은 흙담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거기 절들이 지금…, 말이 아닙니다.” 스님의 눈길은 닿을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해 있다.
| 저 기차는 빽빽 소리만 내고, 내 언니는 왜 안 싣고 오나
장인자 할머니. 1923년생이니 올해 아흔셋이 됐다. 대대로 강원도 고성군 간성에 살았다. 이젠 이북이 된 땅이다. 강원도는 분단 후 남과 북으로 두 동강 났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간성 위로는 이북, 고성읍내 아래로는 이남이다.
아버지는 장질부사를 앓아 일찍 세상을 등졌다. 아래로 남동생 둘, 유복녀 막내여동생이 제각기 3살터울이다. 어머니 뒷바라지로 서울여상을 나온 처녀는 고향 고성에서 농협(당시 금융조합)에 다니다 스무 살에 혼인했다. 곳곳에 예배당이 생기고 신식결혼식이 유행하던 때다. 신실한 불교집안, 고성군수 자제와의 혼사라 금강산 신계사 주지스님이 기꺼이 산문을 열었다.
가만 있자, 사진을 어디에 뒀을까, 할머니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자개함이며 서랍 속을 뒤진다. 한참 만에, 신계사 대웅전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이 누렇게 속지가 바랜 앨범에서 나왔다. 잃어버릴까 싶어 만들어 둔 복사본이 더 있었다.
“이날이 1942년 11월 11일이던가, 날씨가 꼭 좋더라구요. 안 추웠어요, 그때는.”
사진 속 신부는 흰 치마저고리에 손주름을 잡아 만든 면사포를 썼다. 양복 입은 신랑은 법대를 나오고도 법관을 마다하고 도청에 다니던, 그때만 해도 보기 드문 스물여섯 노총각이었다. 그날, 신랑 신부는 가까이서 얼굴을 처음 마주했다.
“선 자리를 나갔는데 부끄러워 서로 얼굴도 못 봤어요. 보면 또 뭘 해?(웃음). 결혼식 날, 식구들하고 기차 타고 외금강이란 데를 갔어요. 18전 주고. 거기서 신계사가 가까워요. 몇 리나 될까, 5리도 못되지, 아마.”
결혼 후 원주군청 앞에서 세를 살다 전쟁이 났다. 미루고 미루다, 1.4후퇴 때 어린 아들에 시누이들까지 열너덧 식구가 대구로 가는 피난열차에 몸을 실었다. 낮에는 멈추고 밤에는 달리면서 꼬박 나흘을 갔다. 꼼짝 않고 끼어 앉아, 어떻게 그랬는지, 오줌을 눈 기억이 없다. 첫날엔 대구시청 마당에서 노숙을 했고, 다음날은 극장으로 갔다. 영화구경 온 사람들 옆에 앉아 하루 종일 똑같은 영화를 봤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꿈같이 멀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한다.
“우리 영감 돌아간 지가 32년 됐나. 5년 있다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가고, 며느리는 십이지장암으로 갔어. 손자손녀들만 남았지. 작은 아들은 미국에 가 있어요. 딸 둘은 한국에 있고. 여긴 나 혼자 살아요. 같이 살자는데 사위한테 미안해서. 인제는 일요일마다 요 앞 합정역에서 지하철 2호선 타고 잠실역 내려가지고, 불광사 일요법회 다니는 거, 그게 내 낙이에요.”
- 몇 년 전, 결혼식 올리신 신계사와 금강산에 다녀오셨지요?
“신계사요? 2013년인가, 모르겠어요. 이제 정신이 왔다 갔다 해. 금강산 가면 만물상 있잖아요. 어릴 때 보고 다시 보니까 너무 기막힌 거야. 겨울에 눈 속인데, 돌이 하늘을 콱 찌를 것 같아요. 어쩜, 도끼로 탁탁 찍어놓은 것 같아. 어떤 데는 이렇게, 부엉이가 내려다봐. 옛날에 올라 댕기던 데를 많이 못 가보고 왔어요.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한 민족인데, 어떻게 통일을 안 해. 근데 내 생전에는 안 되려나 봐. 고향 땅이 삼팔선에서 백리도 안 되는데.”
- 통일이 곧 될 겁니다. 통일 되면 고향에는 누가 계실까요?
(사진을 가리키며)“여기, 이 동생은 전쟁 터졌을 때, 얘가 인민군이에요. 부상병이 되가지고 절뚝절뚝 하면서 누님 보고 싶다고 나한테 다녀갔어. 막내여동생은 결혼식 때 헤어지고 영 못 봤지. 아마 할머니, 어머니 모시느라 집을 못 떠났을 거야. 아마 거기들 있을 거예요. 그것들도, 날 얼마나, 보고 싶을까. 내 고향집은 군사요지라 사람이 안 살아요. 근방에 10리쯤 떨어진 외갓집 동네로 건너가서 살지 않을까. 신계사 갔다 올 적에 버스 타고 지나는데 논 가운데서 추수를 해요. 드르륵 드르륵 하고. 나중에 생각하니까 거기가 우리 외갓집 동네 앞이야, 글쎄. 올 가을에 가면 더 자세히 보고 올 참이에요.”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동생들을 알아보실 수 있을지 물었다. 장인자 할머니는 내 생각에, 기억이 날 것 같아요, 여기 사진이 있잖아, 했다. 사진 속 동생들을 짚고 있는 할머니의 눈빛은 기억의 끈을 더듬고 있었다. 수만 번 되풀이해 선명하고, 이제는 오래되어 희미한 기억.
“나 서울여상 다닐 때 막내가 그랬대요. 저 기차는 빽빽 소리만 내고, 내 언니는 왜 안 싣고 오나.”
그 아이, 여태도 그러고 있을 거예요, 말하는 듯 할머니는 먼 하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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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금강산 안 산 스님 없다고
1951년 6월 25일, 전쟁의 한가운데. 미군 폭격기가 신록 짙푸른 금강산을 맴돈다. 명목은 빨치산 소탕이고, 파괴된 것은 금강산 곳곳의 사찰이다. 폭격기가 신계사 대웅전을 향한다. 한쪽 주춧돌을 중심으로 땅이 깊게 패고 대웅전이 그대로 쓰러진다. 법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묻힌다.
2004년 여름, ‘남북 공동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 도감직 모집 공고’에 수십 명의 스님들이 응시했다. 제정 스님은 마침 동국대학교에서 미술사학과 석사과정을 봄 학기에 끝낸 터였다. 혼자서 불사를 책임져야 했지만, 인연이었다. 그해 가을 신계사터엔 봄부터 목수팀이 들어와 대웅전을 완성해 놓고 있었다. 스님은 11월 낙성식으로 ‘금강산살이’를 시작했다. 금강산에 있는 현대아산 숙소에 머물면서 매일 신계사 현장을 오갔다.
“남에서 기술자와 자재를 대고 북에서 인력을 공급했지요. 신계사터가 큽니다. 4년 동안 발굴부터 목수, 단청, 기와, 석공에 경비직, 관리직까지 육칠십 명이 드나들었어요. 적은 예산에, 제때 물자를 들여오는 게 큰일이었지요. 자재를 신청하면 수속에만 일주일이 걸리니…. 무엇보다도 그쪽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 관건이었어요. 하루 10명이 일하는 날엔 넉넉히 15인분 음식을 하고, 새참으로 라면도 끓여다주고 했던 것이 추억이라면 추억입니다.”
통일,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가야 할까. 손에 쥐고 있던 검은색 폴더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스님은 단박에 “할 수 있는 것부터”라고 말했다. 역사 복원, 문화 복원이 그 첫 단추다. 북한사찰 복원불사는 우리에겐 부처님 성지를 다시 일으킨다는 의미다. 이북에는 어떨까? 그들에게도 사찰은 항일투쟁의 성지이자 국가유적지다.
“북한도 불교문화재가 70%를 넘습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라는 말이 있지요. 가보면 실감할 겁니다. 금강산 자락에서 반반한 터마다 파면 기와가 나와요. 다 암자터란 얘깁니다. 폭격에 소실된 거죠. 신계사 주변에만 20여 개가 있었어요. 아마 그때가 꼭 지금 시간쯤 됐을 건데, 저녁 6시쯤 신계사 관광객 다 내려가고요, 인민군 장교 안내를 받아 보광암터를 갔어요. 돌로 된 수곽만도 여러 개였어요. 규모를 짐작할 만하지요. 북한에 사찰이 59곳 있습니다. 내금강의 불일암, 마하연의 칠성각은 왕실 지원을 받은 화려한 불교건축물들이에요. 그런 곳들이 지금, 문짝은 떨어지고…, 차마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북한실정에 복원은 손도 못 대고 있는 거죠. 북한사찰 복원불사는 영통사, 신계사로 끝나선 안 됩니다.”
- 지금 북한에서 불교 신행상황은 어떤가요?
“승가대학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법타 스님이 가사불사를 하셨고, 불교가 왕래하면서 삭발염의는 최소한이나마 정착이 됐지만, 법을 이어야지요. 인재양성이 시급해요. 스님들에게 먼저 불교를 제대로 전해줘야 돼요. 아직 법회는 요원한 일이지만 신계사 불전함에서 이북 돈이 두 번 나왔어요, 새 돈으로. 아마 고위직일 겁니다.”
-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신행생활을 지켜본 나이 많은 고위직일까요. 신행의 씨앗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으로 읽히는데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북한에 지금 타종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해요. 불교 신도는 만 명이라고 합니다. 정서적으로 이북 사람들이 불교를 좋게 봐요. 불교는 역사 속에서 반민족적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럴수록 불교가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농업기술을 전하고 의료시설 확충도 해야죠. 생태도 마찬가지예요. 참나무마름병, 솔잎혹파리, 제선충병은 남북 공통의 골칫거리입니다. 사상은 시대흐름 속에서 바뀌더라도 금수강산은 힘을 합쳐 지켜야지요. 이런 부분들도 우리 불교가 할 일이라고 봅니다.”
제정 스님은 신행에 대한 질문을 복지로 확장해 답했다. 북한사찰 복원은 복지로 확장돼야 하고, 자연스럽게 관광과 교류의 물꼬로 연결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스님은 함경도 칠보산 개심사를 ‘한국의 그랜드캐년’으로 꼽는다. 통일되면 뱃길로 이어질 순례코스다. 경원선이 복원되면 청량리역에서 내금강이 금방이다. 한암 스님 출가터 장안사가 바로 거기다. 춘천 가는 itx 있죠, 그걸 생각하면 돼요, 한두 시간이면 당도할 거라고 스님은 말했다.
혹여 이북 인연이 따로 있었는지 물었다. 전생에 살았겠지, 금강산 한번쯤 안 산 스님 없다잖아요, 하며 스님이 빙그레한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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