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책]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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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책]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 김용석
  • 승인 2015.08.3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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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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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허상인 진리라 여기던 것들
 
『그리스인 조르바』의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작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심혈을 기울였던 갈탄 운송 케이블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며 모든 꿈도 함께 무너졌을 때. 그때 조르바는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마치 하늘을 향해 대거리라도 하듯 날뜁니다. 그러니까 조르바는 어떤 실패와 좌절로도 가둘 수 없었던 진정한 자유인이었다는 걸 상징하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조르바가 날 때부터 자유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자유인이란 게 부모님한테 물려받을 수 있는 유산도 아니고, 자유능력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얻으면 따낼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도 아니니까요.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겁니다. 모든 일에는 다 원인이 있는 법이니까요.
 
조르바는 젊은 시절, 조국 그리스의 자유를 위하여 터키, 불가리아 등 주변 국가를 상대로 테러를 일삼던 투사였습니다. 언뜻 보면 어려서부터 자유에 관한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조국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남자인 셈이니까요.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 조르바가 추구했던 자유는 가짜 자유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의 조르바에게는 자기의 조국만 있을 뿐 남의 조국은 없었습니다. 특정 국가에 속한 국민만 있을 뿐 우주의 구성원인 인간은 없었습니다. 나의 자유만 중요하고 남의 자유는 알 바 아닌 편파적이고 모순된 자유를 추구했던 가짜 자유인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과거의 조르바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강간하는 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습니다.
 
“내게는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 『그리스인 조르바』 中
 
한참 나이를 먹은 후에야 조르바는 젊은 시절 자신이 자유며 진리라 여기던 것들이 어쩌면 허상일 수도 있겠다는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애국심이란 게 자기편에게만 자유이고 진리일 뿐 남의 편에게는 얼마든 폭력이고 거짓일 수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거지요.
 
 
| 자유인 조르바의 탄생
 
이후 어느 날, 조르바는 보다 잔인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사실은 애국심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애국심을 가장한 증오심이었고, 증오심을 핑계로 약한 사람을 파괴하며 우월한 존재감의 쾌락을 즐긴 집단 광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조르바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도 없었고, 한 여인에게 의지할 수도 없었으며, 어떤 신에게도 용서를 구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실패의 순간에 미친 듯이 춤을 췄던 것도 어쩌면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기쁨의 표출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죽임 당한 이들에게 속죄하는 살풀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정리하자면,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을 통틀어 최고의 자유인으로 손꼽히던 조르바는 사실 과거 자유인이기는커녕 누구보다 지독한 관념에 사로 잡혀 있던 노예였습니다. 애국심이라는 실체 없는 관념의 노예가 되어 다른 생명들을 짓밟는 악행을 저지른 죄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죄를 짓고 있다는 걸, 관념의 노예란 걸 모르는 멍청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조르바는 영장류 최강의 자유인으로 거듭납니다. 자신이 영장류 최악의 노예이며, 바보였다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은 처음엔 조르바에게 거대한 고통을 줬을 겁니다. 별 문제 없었다고 자부했던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 당하는 느낌이 들었을 테니까요. 자기가 살육했던 악마들이 사실 자기와 별다를 바 없는 사람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더욱 끔찍했을 겁니다. 그 순간 자신이 악마가 되어야 할 테니까요. 어쩌면 차라리 악마인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가장 두려운 건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당당하게 멍청했던 자신의 진면목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조르바는 꽤 많은 시간 그 깨달음과 싸웠을 겁니다. 고통을 주는 깨달음이었을 것이므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조르바는 끊임없이 변명하고 회피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변명하고 회피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더욱 큰 역겨움과 환멸을 느끼다 마침내 그 깨달음을 온전히 인정하는 순간이 왔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자유인 조르바는 바로 그때 탄생한 겁니다.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과오를 저질렀는지를 직시하고 인정하던 그 순간이 탄생의 순간이었습니다. ‘과오’와 과오임을 알지 못했던 ‘무지’가 주는 고통과 수치심을 제대로 경험한 후에야 조르바는 그 고통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오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과오를 정확히 인지하고 나서야 스스로 사죄할 수도 있었습니다. 전에는 뭘 사죄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거든요. 더 나아가서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과오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과거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게 뭔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걸 조르바는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처럼 조르바는 깨달은 후 자유인이 되었던 겁니다. 
 
 
| 경험을 얻고 깨달음을 찾으려는 ‘뻗음’
 
세상은 어쩌면 균형을 지향하는 거대한 양손저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한쪽에 무게가 쏠리면 수평을 잡기 위해 반대편의 무게를 늘려야 하거나, 아니면 쏠린 곳의 무게를 덜어야 하는 저울 말입니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고 공과 색이 함께 있는 이치도 어쩌면 세상의 균형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에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땅 위로 솟은 나무 기둥과 땅 밑으로 뻗은 나무의 뿌리는 서로 비례해서 자랄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의 기둥이 높게 뻗으려면 뿌리 역시 깊게 뻗어야 합니다. 뿌리가 짧으면 기둥도 더 이상 자랄 수 없습니다. 그래야만 나무 전체가 지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해서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국가에 충성하려다 인류에 불충했던 조르바의 경우가 바로 그 예입니다. 지역감정에 연연하다 국가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하고 자기 가족을 위하려다 남의 가족을 짓밟는 현실의 모순 역시 조르바가 경험했던 악과 다를 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악이 다시 거대한 선으로 전환되기도 합니다. 악행을 경험한 후에 진정한 자유를 얻었던 조르바처럼 말입니다. 
 
결국 선과 악은 서로 대립하는 뭔가가 아니라 비례해서 함께 커지는 나무의 기둥과 뿌리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나무의 기둥과 뿌리가 저절로 함께 커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무의 기둥은 태양을 찾기 위해 스스로 몸을 뻗거나 뒤틀고, 나무의 뿌리는 물을 찾기 위해 바위를 뚫기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경험을 얻고 깨달음을 찾으려는 ‘뻗음’이 필요합니다. 두렵지만 부딪쳐보는 경험이 쌓여 깨달음의 토대가 됩니다. 또한 깨달음은 불필요한 경험을 줄이고 새로 경험해야 할 것들을 안내합니다. 그런 경험과 깨달음이 서로 밀고 끌다가 해탈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용석
「딴지일보」 편집국장. 2000년 「딴지일보」 공채 1기로 입사, ‘너부리’라는 필명으로 십여 년 이상 활동했다. 저서로 『고전문학 읽은 척 매뉴얼』이 있다. 필자 소개를 해달라고 하자 “외롭지 않게 사는 게 최고라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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