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특집 | 연등회 | 목동 법안정사 부부불자회
여기 우산이 있다. 인터넷 가격으로 1,200원. 가냘픈 뼈대 위에 반투명한 비닐을 덧댄,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우산이다. 보잘 것 없는 중국제 우산처럼 보이지만, 올해만큼은 조금 특별하다. 서울 목동 법안정사 부부불자회의 연등이 되어줄 우산이기 때문이다.
| 비싼 장엄등 대신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사람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던 그런 날이었다. 하지만 법안정사 바로 곁의 공원에는 주말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쪽에서는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가 보였고, 유모차를 밀고 봄바람을 담으러 나온 가족들은 입가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회색빛 구름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봄날이었다.
지난해 쇼핑백을 이용한 연등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법안정사 부부불자회(회장 맹도영, 이하 부부불자회)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목동의 아파트 숲 한가운데 우뚝 솟은 전통양식의 법당 건물이 제법 웅장하게 느껴진다. 부부불자회 회원들은 지하 공양간에 모여 연등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테이블마다 펼쳐진 우산이 한가득이다. 사람들은 이 우산 위에 빨갛고 파란 그림을 입히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빨간 연꽃이 피어나고 파란 들판이 우산 위에 펼쳐진다.
“부처님의 법비를 맞자는 의미를 담았어요. 그래서 우산을 선택한 거죠. 우산의 네 귀퉁이에는 4개의 작은 컵등을 달 거예요. 4개의 컵등은 사홍서원을 의미하죠. 연등행렬에서 만나는 외국인이나 시민들에게 이 컵등을 떼어서 전해줄 겁니다. 독특하죠? 아이디어가 우리의 주무기입니다.”
맹도영 회장의 설명이다. 획일화된 연등 대신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부부불자회만의 연등. 지금까지 봐왔던 연등과는 확연히 달랐다. 법안정사가 매년 준비하는 연등은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기로 정평이 나있다. 지난해에는 쇼핑백을 활용한 연등을 선보여 큰 화제를 모았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로 그들은 특별한 연등을 만들어왔다. 커다란 장엄등을 만들면 보기는 좋지만 문제는 예산이다. 개당 200~300만 원의 제작비가 소요되는데, 불자회의 예산으로 충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보기 위해 부부불자회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부부불자회가 준비하는 연등의 또 다른 특징은 부부가 함께 만드는 연등이라는 점이다. 매년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전국의 많은 절에서는 연등을 만드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보통은 주말을 이용해 절의 신도들이나 어린이·청소년법회에 나온 아이들이 꽃잎을 비비고 풀을 발라 연등을 만든다. 보살들이 연등을 만드는 모습은 흔하지만, 거사들이 여기에 동참하는 모습은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참여한다 해도 한두 명 수준에서 그친다. 더구나 부부가 함께 연등을 만드는 모습은 정말 보기 드물다. 그런데 여기, 법안정사에서는 매년 부부가 함께 연등을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부부불자회의 연등회 준비는 2월부터 시작된다. 월초 법회에서 연등 아이디어 공모를 발표하고 약 2개월에 걸쳐 접수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부부불자회 운영위원 50명이 함께 참여해 컨셉을 확정짓는다. 본격적인 제작은 4월 초부터 시작이다. 올해는 조금 늦었다. 4월 11일에 제작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회원들의 사정상 18일이 돼서야 처음으로 모여 연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평일에 시간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들의 사정상 주말에만 제작이 가능한 탓이다. 올해는 100개의 우산등을 만들었다. 우산에 그림을 그리고 컵등을 달고, LED등을 설치하려면 다소 빠듯한 일정임에도 회원들은 대다수의 작업을 기한 내에 마무리 지었다. 모든 것이 불자회 자체적으로 결정되며, 결정이 이뤄지면 일사천리다. 이게 가능한 것은 부부불자회의 역사가 이미 22년에 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철저히 사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 부처님의 법비를 함께 맞기 위하여
“처음 2~3년 동안은 회주스님께서 불자회를 이끌어주셨어요. 그 뒤부터는 법회 집전부터 운영까지 모든 걸 신도들에게 맡기셨어요. 그만큼 우리를 믿어주셨지요. 부부들이 함께 하는 불자회가 자리 잡아가면서 모범사례로도 많이 알려졌어요. 소문을 듣고 관계 개선을 위해 찾아오는 부부들도 많아요. 심지어 저 멀리 상계동에서 오는 부부도 있을 정도니까요.”
말만 요란한 게 아니다. 부부불자회가 얼마나 잘 운영되고 있는지는 정기법회 참석인원을 보면 알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저녁 7시에 열리는 부부불자회 법회에는 평균 100쌍의 부부가 참석한다. 200명이 넘는 숫자다. 여기에 그날 법회의 법문을 맡은 법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인근 불자들까지 합하면 대법당은 발 디딜 틈 없이 신도들로 가득 찬다. 부부불자회는 연초에 16개의 법회 주제를 정하고 각 주제에 맞는 인물을 법사로 선정해 직접 섭외한다. 조계종을 대표하는 고승이라면 대부분 부부불자회의 법사로 참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고의 석학으로 손꼽히는 학자들도 부부불자회 법회의 법사 명단에 대부분 이름을 올렸다. 불러주지 않아 섭섭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회원들은 입을 모은다. 법회 법문의 주제는 항상 부부에게 도움 될 수 있는 것들로 선택한다.
이만큼 부부불자회의 모든 활동은 부부회원들에게 도움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래서 회원들의 신뢰가 깊고, 참여도도 높다. 심지어 월 2만 원의 회비를 강제하지 않음에도 모든 회원 부부가 자발적으로 회비를 납부하고 있다. 이런 자발적인 신행활동은 부부사이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올해로 10년째 법안정사에 다니면서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사실 부부가 함께 살다보면 의견이 안 맞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잖아요. 싸우기도 많이 싸워요. 전날 싸워놓고 다음날 같이 나와서 이러고 연꽃을 비비고 있어요. 그러면 꽁해 있다가도 다른 분들이랑 섞여서 농담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화가 풀려있어요. 이제는 아이까지 세 식구가 같이 절에 다니고 있는데, 가족들이 화합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김경호·박혜선 부부)
연등을 만드는 동안 여기저기에서 시끌벅적하다. 유쾌한 농을 건네고 받는 사이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나고, 알록달록한 우산 위에 연화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수많은 부부가 함께 담아낸 긍정의 힘이 우산등으로 완성된다. 이 우산은 봄날 밤하늘에 뿌려질 법비를 맞이하는 등이 되어 서울 거리를 수놓을 것이다. 그 우산을 함께 쓰고 걷는 부부의 밝은 미소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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