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에 그려진 스케이터, 흥천사 <감로왕도>
상태바
불화에 그려진 스케이터, 흥천사 <감로왕도>
  • 불광출판사
  • 승인 2015.05.04 16: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png
 

 


14.png
 


1939년 11월 봉안된 감로왕도 1점이 오늘날 주목받게 됐을 때, 감로왕도를 바라보는 입장은 각기 달랐다. 당시 사회상을 읽을 수 있는 창의성 넘치는 자료로만 봐도 좋을 것인지 조심스러웠다. 불화에서 당대 친일성향의 사회세태를 여실히 읽을 수 있었기에 근대자료로서 인정해야할 것인가라는 논의가 격렬했다. 보응문성普應文性 스님(1867~1954)이 편수를 맡고 남산병문南山炳文 스님이 출초한 서울 돈암동 흥천사의 감로왕도를 두고 하는 이야기다. 두 화승은 기존의 감로왕도 도상에 당시 사회상을 과감하게 담아냈다. 1930년대 후반은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이 강화되고, 치밀한 수탈이 이뤄졌던 시기였다. 흥천사 감로왕도에는 당시 한반도에 불어 닥친 시련들과, 근대화 되어가는 모습이 마치 빛바랜 사진처럼 그려져 있다.


| 일제강점기의 삶과 죽음을 그리다
감로왕도는 조선 전기부터 많이 그려지던 의식용 불화다. 유주무주 고혼의 천도를 목적으로 조성되는 감로왕도는 상·중·하 3단으로 그려진다. 흥천사 감로왕도 역시 육도윤회六道輪廻 속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이 배치된 하단下壇, 여법하게 재를 행하며 지옥도와 아귀도를 헤매는 중생들에게 감로甘露를 베푸는 중단中壇, 의식을 거쳐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불보살과, 극락세계가 그려진 상단上壇으로 구성돼 있다. 하단에서부터 상단까지 과거–현재–미래의 인과관계를 읽어낼 수 있다.

흥천사 감로왕도가 주목받는 이유는 과감함에 있다. 육도 중생들을 당대의 생활상에 빗대어 표현했고, 장면을 먹선으로 분할했으며, 서양화적 채색기법을 쓰는 등 창의적인 시도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특히나 하단을 보면 더욱 두드러진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상단과 중단은 전통 감로왕도의 도상과 크게 변화하진 않았지만, 하단은 산과 나무로 자연스럽게 구역을 나눠 담아내던 전통적 작화 방식과는 다르게 그려놓았다. 흥천사 감로왕도는 흡사, 오늘날의 만화 같기도 하다. 하단을 31개의 먹선 칸으로 나눠 서른 한 가지 중생계의 다양한 삶과 죽음의 모습을 당대의 눈으로 담아냈다.

죽음은 다양하다. 양복을 입은 어린아이가 호랑이에게 쫓긴다. 뱀에게 물려 죽거나, 강물에 휩쓸려서 죽기도 한다. 등산 장비를 챙기고 등산을 하다가 굴러 떨어져서,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낙사하기도 한다. 전쟁의 장면도 실감나게 묘사돼있다. 하늘에선 비행기가 포탄을 쏘아대고, 바다에선 전투함이 돌진한다. 육군은 탱크와 싸우고, 총검을 든 군사들은 불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현재의 아수라장,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1.png
 

 

 


여러 죽음의 장면 속에서 당시 시대상을 볼 수 있듯, 삶의 모습에도 근대적인 생활방식의 변화들을 읽어낼 수 있다. 전신주 위에서 작업하고 있는 남자, 전화를 걸고 있는 남자. 은행창구에 줄 서있는 사람들, 색의色衣를 입고 있는 사람들, 빙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남녀들. 불화를 면밀히 살펴보면 곧 뛰어올라 3회전 점프를 할 것만 같은 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전근대적 생활방식과 근대적 생활방식을 대비해 함께 묘사한 것도 독특하다. 자동차를 기다리는 가족,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가마꾼 행렬의 대비. 풍물놀이를 즐기던 사람들과 서커스를 감상하는 사람들. 관아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 놀이문화, 사회문화 등 불화에서 읽혀지는 생활상의 다양한 변화를 아는 것으로도 그 가치가 충분하다. 

중단에도 짚어볼 부분들이 많다. 의식을 진행하는 스님들 사이에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서있다.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아이와, 양장을 입은 소년도 작법의식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육수가사를 입고 작법무를 추는 스님의 고깔 바늘땀이 무척이나 섬세하다. 의식으로 감로를 받으려는 아귀의 모습에는 일본풍의 그림체가 느껴진다. 중단 의식 속 아귀 바로 밑에는 육도를 윤회하는 구제의 대상인 아귀가 전통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상단으로 시선을 향하면 다섯 부처님이 근엄하게 내려 보고 있다. 향좌측向左側에는 망자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과 육도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지장보살, 선인仙人, 뇌신雷神이 중생들을 마중 나가고 있다. 향우측向右側에는 극락에서 법을 설하는 아미타여래, 중생을 굽어보고 삼도팔난三途八難의 고통에서 구원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선인, 풍신風神이 자리하고 있다. 

그 밖에도, 감로왕도를 하나하나 면밀히 따져보면 몹시 감탄할, 때로는 충격 받을 요소들이 곳곳에 포진돼있다. 일제강점기 사회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흥천사 감로왕도. 당시 시대상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근대기를 대표하는 소중한 성보로 바라볼 수도 있고, 식민지배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념들이 문화적 차원으로 발현된, 소위 황민화운동에 앞장섰던 불화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불교중앙박물관(관장 희범 스님)에서 4월 12일까지 열리는 ‘불화에 담긴 근대의 풍경과 사람들’ 테마전에서 흥천사 감로왕도를 마주할 수 있다. 판단은 감상자의 몫이다. 


Information
‘불화에 담긴 근대의 풍경과 사람들’ 테마전
일정  4월 12일까지
장소  불교중앙박물관
입장료  무료
문의  02-2011-1960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