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다시 인욕바라밀
“수보리야, 인욕바라밀이라 하는 것은 여래가 설하되 인욕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신체를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나는 아상이 없었으며,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이 없었으며,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일 때에 만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함을 내었으리라.” - 『금강경』 ‘이상적멸분’ 中
이 말씀에 대해 육조 스님께서 해설하시기를,
“여래가 인행시因行時의 초지初地에 있을 때에 일찍이 인욕선인이 되어 가리왕에게 신체가 베이고 잘림을 당하되 마음에 한 생각도 아파하거나 괴롭다는 생각이 없으셨으니 만약 아프고 괴로운 마음이 있었으면 곧 화를 내고 원망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무엇으로 인하여 여래에게 아프고 괴로운 마음이 없었는가? 사상(四相,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다 나다 하는 상이 없는 까닭에 ‘인욕선인’도 없고 ‘가리왕’도 없다. 인욕선인과 가리왕이 공하여 없는 까닭에 가리왕과 인욕선인이 둘이 아닌 것이다.
즉, 잔인하게 죽이는 놈과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놈이 둘이 아닌 한 놈이다. 이를 확연히 알면 아프고 괴로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진리의 본질에서 보면 이와 같다. 어떻게 이와 같이 둘 아닌 도리(不二法)를 통달해 알 것인가?
너다 나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죽는다 산다,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일체의 분별망상이 바로 번뇌다. 이 무명無明은 지혜의 광명으로 인하여 스러지게 된다. 광명으로 인하여 어둠이 저절로 걷히는 것과 같다. 지혜의 광명이 밝아지려면 무명의 업식이 녹아야 한다. 이 업식을 녹이는 것이 인욕바라밀행이다.
흔히 보시를 행하면 풍요의 복덕이 생기고, 인욕을 행하면 반야의 지혜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보시가 복덕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인욕으로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어찌 그러한가?
누구나 경계가 닥치면 그 경계를 넘어가려 애쓴다. 애를 쓰는 가운데 지혜가 우러난다. 그 지혜로써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경계에 물들어 허우적거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경계가 주인이 되고 자신은 객이 되어 벗어날 기약이 없게 된다. 무명 악업은 더욱 확대 재생산되고 만다.
무명 악업의 경계가 닥치면 경계에 그대로 응하지 않아야 한다. 한 생각 쉬어버리면 업식이 녹아지고 마음은 밝아진다. 이로써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 지혜는 청정하게 비추는 광명이다. 일체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이며 반야광명이다.
인욕이란, 놓고 쉬는 것이다. 인욕에 본래 가지고 있는 반야광명을 더하면 바라밀이 된다. 이를 인욕바라밀이라 이름 한다. 그러므로 인욕바라밀이란 그냥 참는 것이 아니다. 놓는 것이고, 쉬는 것이다.
어디에 놓아야 하는가? 일체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 성품이 불성이다. 각성覺性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참나의 자리다. 이 자리를 믿고 모든 경계를 여기에 놓아야 한다.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 모든 존재는 진리의 깨달음을 이미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본래 부처다. 깨닫지 못한 일체 중생과 그 업식은 현재의식으로 발현한다. 이때에 자기의 근본 성품을 믿고 거기에 의지해야 한다. 이와 함께 부처님 말씀에 귀의하여 낱낱이 실천궁행한다면 이것이 인욕바라밀이다. 곧 인행因行을 닦는 때(時)가 된다.
인욕바라밀로써 인행을 닦아가는 것이 불과佛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아는 것, 이를 믿음을 이루었다(成信)고 한다. 믿음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진리의 체험, 즉 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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