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인욕은 본래 참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하셨다. 나를 내세울 때 인욕은 참는 것이 된다. 또는 참지 못하는 것이 된다. 아상我相이다. 참으면 내부의 독이 되고, 참지 않으면 외부의 독이 된다. 도리어 참을 것이 본래 없다는 그 이치를 안다면 긍정과 공감이 일어난다. 하심과 받아들임이 들어온다. 겸손과 존중이 나타난다. 바로 인욕바라밀이다. 오늘 한국사회 곳곳에 아상이 넘치고 있고, 인욕하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 다시 인욕바라밀을 꺼내는 이유다. 여기, 스스로 철저한 인욕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간 수행자가 있다. 한 수행자의 삶의 궤적에서 지금 우리가 다시 돌아보아야 할 인욕바라밀의 의미를 읽는다.
|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인욕수행자
출가 후 40년 동안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새벽예불 전, 한겨울에도 찬물로 목욕하고 법당을 청소한다. 많게는 하루 8시간씩 ‘나무아미타불’ 정근을 했고 2년 뒤면 만일이다. 세납 78세, 고불총림 백양사 율주 혜권 스님이다. 담양 용흥사, 스님의 주석처다. 시자스님을 통해 문자메시지가 왔다. “인터뷰 안 됩니다.” 스님은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이끌림이다. 인터뷰가 아니라도 좋다. 인욕, 온몸으로 그것을 살아낸 이에게 물으라는 내면의 목소리였다고 해도 좋겠다. 다행히도 스님은 객을 내치지 않는다. 방 안에는 낮은 책상 위로 몇 권의 책과 새벽 2시를 가리키는 알람시계 하나가 놓여 있다. 살림살이의 전부다. 탐심을 비우고 불편을 감수하는 자발적 가난. 스님의 방 그대로가 인욕의 공간이다.
“그래, 무슨 일을 하시는가?”
넌지시 건네는 스님의 질문에 찾아온 연유를 숨김없이 꺼낸다. 스님은 인터뷰를 거절했던 이유를 들려준다.
“내가 요즘 들어 해태심懈怠心이 나거든. 그래서 고민에 휩싸였어요. 이제 나이가 들어 그런가, 왜 그런가, 나름대로 곰곰이 살펴보는 중이야.”
스스로에게 솔직한 말씀이다. 철저한 자기점검이다. 스님의 척추가 지팡이 손잡이처럼 둥글다. 하루에도 여러 시간, 40년을 앉아 정근한 흔적이다. 목탁의 무게에 더해진 시간의 무게가 둔중하다.
“스님, 요즈음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늘 똑같지 뭐. 2시에 일어나서 찬물에다 씻어요. 백양사 화엄전 있을 때는 쌍계루 밑에 계곡에서 얼음 깨고 했고, 지금은 여기 세면장에서 해요. 그러고 나면 법당 청소지. 예불 하고 나무아미타불 정근 하고, 1시간 반에서 2시간씩 네 번을 하는 거야. 문을 닫고 시작하다가 중간에 열려도 그냥 두는 걸로 하고. 겨울이면 손이고 얼굴이고 죄 얼어버리지. 그래도 기도를 멈추진 않아.”
몸이 있는 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감각들.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비움의 인욕행이다. 몸이란 그저 땅, 물, 불, 바람의 조합이다. 나도, 나의 것도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스님, 꼭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냉수마찰? 그거 안 하면 내가, 부처님 앞에 예불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늙어서든 젊어서든 춥거나 덥거나 부처님 앞에 나가려면 그거는 꼭 해요. 한번은 쌍계루에서 냉수마찰을 하고 몸을 덥히느라고 엎드려서 팔을 굽혔다 폈다 했어. 어떤 이가 보고는 사진을 찍으면서 웃더라고. 그러건 말건, 나는 내 할 일 하는 거지.”
나의 모습을 누가 우습게 여겨도 개의치 않는다. 자존심이라는 이름의 아상에 함부로 걸리지 않는다. 일어나는 화를 참는 인내가 아니다. 화가 일지 않는 인욕바라밀이다. 스님은 이어, 어느 신심 깊은 염불수행자의 고사를 들려준다. “염불 잘해서 극락은 가겠으나 성불은 못하겠구나.” 하는 소리에 그만 상대를 해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인욕은 그럴 때 필요한 말이라고 덧붙인다. 수행자도 자칫 인욕의 고삐를 놓칠 수 있다는 경책이다.
| 인욕은 인과의 도리를 바로 보는 것
백양사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서옹 스님은 혜권 스님을 아꼈다. 혜권 스님에겐 국가를 이끄는 사람들이 불교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정치를 폈으면 하는 원력이 있었다. 정성스런 기도로 나라가 편안하기를 기원했다. 하루 7~8시간 하던 기도를, 어느 날인가 신심을 내어 하루 10시간씩 한 적이 있다. 그때 서옹 스님이 혜권 스님을 불러서 일렀다.
“그리 하면, 되겠다.”
지금처럼 기도하면 원을 이룰 것이라는 격려였다. 서옹 스님은 입적하면서 “동서남북에서 눈 밝은 사자 새끼가 나온다!”는 법문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에는 “이제 가야겠다.”며 혜권 스님을 불러오라 했다. 스님이 문을 여는 순간, 서옹 스님은 앉은 채로 좌탈입망坐脫立亡에 들었다.
“기도 잘하라고, 불국토 원력을 이룰 거라고 한 마디 일러주시려던 게 아닌가, 해요.”
이상적 정치. 그것은 중학생 시절부터의 꿈이다. 스님의 속가 부친은 서당 훈장님이었다. 만공 스님의 불공으로 얻은 귀한 아들은 천장암, 부석사 등 경허, 만공, 혜월 스님이 주석하던 방에서 10여 년 고시공부를 했다. 군에 간 동생이 어머니 약으로 고아 드시라고 보낸 노루뼈가 출가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눈앞에 노루의 죽음이 보였다. 과보의 두려움은 동생도, 어머니도 아닌 스님을 사로잡았다. 이십여 년이 흘러서야 알게 됐다. 노루는 과거생의 스승이었다.
“인욕이란 자신을 돌아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해요. 인과의 도리를 바로 보는 것이거든. 돌고 도는 윤회 속에서, 모든 인연이 다겁 부모, 다겁 스승이요, 결국은 둘이 아닌 이치인 거야. 내가 짓고 내가 받을 뿐이니,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거지.”
출가나이 36세. 해방 이후 가장 늦깎이스님이었다. 나이 어린 선배스님들에게 깍듯했고, 만나는 이마다 하심下心으로 대했다. 해인사 강원에서 수학할 당시에는 성적이 뛰어나 월반을 했다. 1976년 백양사에 들어와 각성 스님으로부터 화엄경을 전강하고 보광 스님의 법을 이어 곧바로 강의를 맡았다. 오랜 강사 생활과 강주 생활을 하며 백양사 산문을 나가지 않았다. 종단에서 강주 스님들을 불러 모을 때에도 강사 스님을 대신 보냈다.
스님은 경・율・론 중 특히 구사론, 인명론, 대승기신론과 같은 논論에 밝다. 지금도 매주 목요일마다 백양사 중관유식승가대학원에서 승가대 학인스님들과 율원 스님들에게 『사분율』을 강의하고, 용흥사에서도 『유가사지론』을 강의하고 있다.
“오늘은 이 정도 하지요. 또 봅시다.”
스님은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는 명함을 달라고 주문한다. 명함의 용처가 머릿속을 스친다. 스님은 사진을 찍는 내내 명함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인욕수행자 혜권 스님의 행원行願은 나의 이름 석 자를 넘어 시방세계에 두루 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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