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호구산 용문사–백련암–염불암
매화 꽃잎 떨어지는 봄 바다에는, 나고 또 죽는 시간의 가루들이 수억만 개의 물비늘로 반짝이며 명멸했다. 사람의 생명 속을 흐르는 시간의 풍경도 저러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봄 바다 위의 그 순결한 시간의 빛들은 사람의 손가락 사이를 다 빠져나가서 사람이 그것을 움켜쥘 수 없을 듯싶었고, 그 손댈 수 없는 시간의 바다 위에 꽃잎은 막무가내로 쏟아져 내렸다.
- 김훈, 『자전거 여행』 중
| 원효 스님이 세운 천년고찰
새가 날았다. 물비늘 반짝이는 바다 위를 지나갈 때, 새가 저 멀리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자유로워 보였다. 메마른 뱃구레에 못 이겨 밥 한 술을 갈구하듯,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던 일상의 팍팍함은 도시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로움을 갈구하게 만드는 법이다. 기왕이면 저 멀리 바다를 건너는 게 좋겠다. 그곳에서 소설가 김훈이 이야기 하는 물비늘의 반짝임과 봄이 오는 소리를 찾아보는 것도 이 시기의 즐거움일 터. 그렇게 겨울이 지나온 흔적을 거슬러 내려가며 봄을 찾아 남쪽으로 내달렸다.
목적지는 남해다. 몸을 웅크리고 누운 섬의 복판쯤에 용문사가 있다. 남해로 들어오는 길은 두 갈래다. 하동을 거쳐 남해대교를 건너는 방법과 사천을 지나 삼천포대교와 창선대교를 차례로 지나는 방법이 있다. 어느 길을 택하든 용문사로 가는 길은 차로 30분 남짓이다.
기록을 들춰보면 남해 용문사의 역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건주가 원효 스님이다. 본래 보광산에 ‘보광사(혹은 봉암사)’라는 이름으로 세웠다고 한다. 기록에 전하는 보광산은 지금의 금산이다. 국내 3대 관음기도처 중 하나인 보리암이 있는 그 산이다. 원효 스님이 이곳에서 선교의 문을 열어 명성을 떨쳤으나 조선 현종 원년(1660년) 백월 스님이 사운寺運이 다했음을 읽고 자리를 옮겼다. 그 자리가 현재의 용소리 호구산이다.
평일의 산사는 조용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인적이 드물었다. 자유로움이 고픈 객에게는 고요한 산사의 여백이 그저 고맙다. 다만 기대했던 동백과 매화는 아직 화사함을 감추고 있었다. 남쪽의 봄은 동백이 열고 매화가 단장하는 법이다. 그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건 두고두고 아쉬울 허전함이다.
| 승병들의 함성소리를 그려보다
용문사는 이미 꽤나 알려져 있다. 보리암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온 불자들은 으레 20~30분 거리에 있는 용문사까지 들렀다 간다. 바다 저 편으로 보이는 금산 보리암의 절경과 이쪽 용문사의 운치는 사뭇 다르다. 같은 바다지만 지중해와 태평양만큼이나 다른 느낌이다.
사람들이 용문사를 찾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용문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기거하며 근처 바다를 지나는 왜구들을 막아내던 사찰이다. 역사 속에 한 자락 굵은 이야기를 남긴 곳에는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야기의 흔적을 좇아 역사의 현장을 찾는다.
당시 얼마나 많은 승병들이 이 절에 숙식을 의탁했는지는 구유의 크기를 보면 안다. 본디 마소의 여물을 담아야 할 구유다. 그러나 갖춰먹기 힘든 전란 중에는 승병들의 밥그릇이 됐다. 이 커다란 나무 그릇에 1,000명분의 밥을 담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망운산 화방사에는 승병 1,500명 이상이 주둔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합이 2,500. 화방사에 대한 구술이 사실이라면 섬에 주둔한 병력치고는 대단한 숫자다. 이 섬은 그만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남해라는 섬은 인근의 관음포 등과 함께 노량해전의 무대가 됐다. 노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숨을 거둔 싸움이자, 임진란부터 정유재란까지 이어진 7년 전쟁을 끝낸 전투다. 그 치열한 전장 속에서 저 많은 승병들은 결코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운명을 달리했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이 벌어진 날짜는 11월 18일이다. 초겨울의 한파에 더해 죽음의 기운을 차갑게 뿜어냈을 바다 위에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바다에서 돌아와 전쟁을 끝낸 그날의 용문사는 승병들의 함성소리로 채워졌으리라. 훗날 숙종은 용문사 승병의 그런 호국지심을 치하하며 용문사를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기도 했다.
한데 모여 함성을 내지르는 승병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비록 용문사가 저편 금산자락에 자리했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그날의 감동은 이 자리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었다. 초겨울의 죽음을 이겨낸 승병들의 함성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농밀한 봄기운이 밀려들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드리운 경내를 거닐다 오솔길을 따라 백련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 암주스님이 내어준 야생 유자차
백련암은 영조 27년(1751년)에 창건됐다. 홍찬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앙상한 겨울의 자취가 채 가시지 않았음에도 암자는 깔끔하다. 보광전을 참배하고 나오는데, 저편 요사에서 비구니스님이 나온다.
“암주스님이신가요?”
“암주스님은 나가셨어요. 자리를 자주 비우셔서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럼 스님께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까?”
머뭇거리는 눈치다. 암자 밖으로 일을 보러 나가려던 모양이다. 스님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공양간으로 객을 들였다. 예까지 왔으니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는 마음넓이다. 스님은 유자차를 한 잔 내왔다. 신도가 야생 유자로 담근 차라는 설명을 붙였다. ‘남해 3자’라는 말이 있다. 유자, 치자, 비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만큼 남해 유자는 향이 좋기로 유명하다.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입 안을 알싸하게 감아 도는 향이 깊다. 야생의 것이라더니 시중의 유자차는 갖추기 힘든 도도함이 있다. 스님이 물어왔다.
“남해 사람들도 백련암은 잘 모르는데, 어떻게 알고 왔어요?”
“봄이 오는 자리를 찾아 왔습니다.”
“며칠만 더 기다렸다 왔으면 마당에 꽃이 참 예쁠 텐데, 아쉽네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스님의 정체가 자연스레 드러났다. 시치미 뚝 떼고 차를 내주던 이 스님, 알고 보니 암주 유승 스님이다. 이런 장난기 어린 상황이야말로 조그만 암자에서 만날 수 있는 재미다. 한 번 터진 웃음은 차담을 시원스레 이어줬다. 웃고 떠들고 다시 웃는 사이 탁자 위에 유자향이 가득 퍼진다. 절집 마당에서 만나지 못한 봄의 화사함이 스님 얼굴에 번져 있었다.
백련암은 창건 이래 수많은 고승들의 수행처가 돼왔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용성 스님의 수행처이기도 했지만 성철 스님도 1955년 하안거를 백련암에서 보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건 경봉 스님이다. 경봉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곳곳의 암자에 머무르며 가행정진을 했다. 그 중 한 곳이 남해 백련암이다. 당시 백련암에서는 몇 번의 봄을 맞았는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저 보광전의 편액과 백련암 편액에 남은 경봉 스님의 글씨를 보며 섬의 암자와 꽤나 인연이 깊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 선사를 닮은 염불암의 은행나무
유승 스님은 백련암 둘레로 무성한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 산 정상을 올라보길 권했다. 이곳 호구산은 숲의 보존상태가 좋다. 언뜻 길을 들여다봤다. 오솔길 좌우로 가득한 낙엽들 사이에 푸른 기색이 보인다. 봄이다. 비록 매화의 말간 얼굴을 보지는 못했어도, 이미 봄은 남쪽 바다 섬에 차분히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산 정상까지 올라 봄기운을 만끽하기에는 하루 해가 너무 짧다. 아직 염불암을 보지 못했다.
백련암과 염불암은 지척이다. 표식으로는 100m에 불과하다. 백련암 뒤로 난 길을 따라 굽이치는 걸음을 옮기면 저 멀리 차밭이 보인다. 염불암이 여기 있다고 알려주려는 것 마냥 너른 차밭이 산비탈을 타고 펼쳐져 있다. 염불암으로 꺾어 들어가는 길 위로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섰다. 500년을 살았다는 은행나무다. 속세의 흥망성쇠를 등질 생각인 양 뭍을 등지고 서서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먼 곳의 파도만 바라본다. 꽤나 꼿꼿한 성품인 모양인지 하늘을 향해 몸을 곧게 뻗었다. 오로지 수행처로 기능했던 염불암의 곁을 지키며 수행자의 성품을 닮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본디 세 칸 수행처였다는 염불암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한편으로 대웅전이 들어섰고, 별도의 요사가 마련돼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누추한 토굴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숙종 35년(1709년)에 각찬 스님이 세웠다. 이후로 백련암 못지않게 많은 납자들이 이곳에 기거하며 화두를 들었다. 가만 보면 암자가 앉은 자리부터 범상치 않다. 호랑이가 웅크린 형상이라는 호구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가 바로 이 자리인 듯하다. 많은 선객들이 선호할 만한 수행자리다.
| 선객들이 염불암을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
국내 최초의 현수교라는 남해대교가 섬을 뭍으로 이어준 것이 1973년이다. 그 전에는 배를 띄우지 않으면 뭍으로 나갈 수 없었고 섬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남해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그럼에도 옛 스님들은 꽤나 빈번하게 이 섬으로 배를 띄웠던 모양이다. 섬의 암자는 무문관이나 진배없다. 무문관에 자신을 가두듯 섬 속에 자신을 가두고 백척간두 위를 거닐 심산이었던 걸까. 무문관에 자리를 잡는 건 필부필부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각오다.
암자는 모두 돌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음 날 동틀 녘부터 백련암 옆구리로 터진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 호구산을 올랐다. 물이 올라 탄성을 뽐내는 가지를 헤치고 길을 열어 오른 끝에, 마침내 호랑이 품에 안긴 세 사찰과 멀리 바다를 한 눈에 담았다. 건너편 금산의 능선 위로 붉게 하늘이 열리고, 떠오른 해가 뿌려낸 빛은 바다로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시간이 가루처럼 빛으로 산화했다. 그리고 눈 밝은 사람들이 이 산을 지켰던 시절도 시간의 가루가 되어 저 바다의 물비늘 위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경내에 심어진 동백이 품을 열고 붉은 얼굴을 수줍게 밀어내고 있었다. 이제 곧 매화가 피어나고, 하얀 이파리가 날릴 것이다. 옛사람들의 시간이 그러하고, 우리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듯, 호구산 발치에 밀려오는 바다 위로 하얀 꽃잎들이 막무가내로 쏟아질 것이다. 푸른 기운이 바람에 섞여 따스하게 날아들었다. 봄은, 남쪽에서부터 그렇게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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