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스님들의 라오스 여행기 ①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 류시화, ‘길 위에서의 생각’ 중에서
| 신발 끈을 느슨하게 매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여행 가방을 꺼내어 툴툴 털어본다. 이 얼마만인가. 나의 여행길. 한국으로 들어온 지 6년 만에 떠나는 그곳은 다름 아닌 요즘 대세 ‘라오스’다. 낡은 옷을 챙기고 세탁할 때가 다가온 옷가지들을 넣는다. 크크. 이럴 땐 게으름도 지혜의 방편이다. 여행 중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고 버려도 좋을 법한 옷가지들만 꺼내어 촘촘하게 여행 가방에 개켜 넣었다. 이런 짐 싸기 노하우는 다년간 해외생활을 해온 나만의 비법이라 할 수 있다. 새것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편안한 여행을 준비하는 나만의 비결이니까.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나는 한껏 들떠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 여행가노라” 실컷 자랑을 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은 주책이었던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지만, 6년 만의 나들이 아닌가. 콧노래가 절로 났다. 어찌 보면 성지순례를 떠나는 일에 이토록 기갈 들린 사람처럼 흥분한 사람도 또 없을 테다. 그 정도로 나는 준비 단계부터 희희 낙낙했다. 여행의 아름다운 자극은 출발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준비는 바로 이것, 신발 끈을 느슨하게 매는 것! 허파로 들이쉬지도 단전으로 숨 쉬지도 않고 여행 중에는 오로지 발로써 호흡하리라. 신발 끈을 느슨하게 매고 자유로운 영혼들과 만나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자연을 사랑하리라. 또 얽히었던 생각들 모두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걸으리라. 그렇게 하리라. 꼭!
엄동설한에 떠난 라오스는 더웠다. 밤늦게 공항에 도착했는데도 입고 간 겨울옷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아침저녁으론 쌀쌀했지만, 그래도 후끈한 열기가 공기 중에 남아있었다. 어두운 밤길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버스에서 내다보니 군데군데 낯선 이국의 언어들이 그림처럼 보였다. 왠지 보기만 해도 혀가 꼬부라질 것 같은 둥근 모양의 ‘라오 문자’다. 그리고 우리나라 도심에선 좀체 찾아보기 힘든 야자수가 길가에 즐비하게 서있다. 호텔에서 짐을 풀고 잠깐 눈을 붙였더니 어느새 멀리서 닭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 드디어 라오스의 아침이 밝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라오스의 아침이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꽃들이 만발한 정원을 하하호호 수다를 떨며 산책한다. 산뜻한 공기에 밝은 웃음이 여기저기 울려 퍼진다. 요샛말로 ‘공기 반, 웃음 반’이다. 함께 떠난 나의 ‘영 패밀리(원영가족)’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해피바이러스 감염자들처럼 마냥 즐겁단다. 나는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렸다. 라오스의 아침을 포옥 껴안아 보려고.
| 부처님의 가슴뼈가 모셔진 탓루앙 사원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모두 모였다. 버스에 올라타 일행들을 체크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버스가 서서히 출발한다. 현지여행의 본격적인 시작이니 인사도 나누고 좋은 말 한마디쯤 해야겠다 싶었다. “편히 쉬셨어요? 공양도 맛있게 하시고요?” “네~” 연신 싱글벙글한다.
“호숫가에 가보면 개구리들이 많이 살고 있어요. 여러분, 개구리가 파리 잡아먹는다는 거 아세요? 개구리가 파리를 잘 잡아먹는다고 해요.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파리를 잘 잡아먹었던 건 아니랍니다. 파리의 움직임을 잘 파악하도록 촉이 점점 진화하고, 움직임을 알아채고 잽싸게 혀를 내밀어 파리를 낚아채도록 발전한 것이죠. 하지만 개구리가 이렇게 진화하면서 촉감은 빨라졌지만, 반대로 시각은 매우 둔화되었다고 해요. 개구리들은 호숫가에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어도 제 옆에 핀 그 꽃들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여러분 모두 그동안 자기만의 어떤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며 사셨을 겁니다. 어느 정도 성과도 이루셨겠지요. 그렇게 진화하고 발전한 반면에, 점차 무디어지고 퇴화된 부분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저는 이번 여행에서 그 무디어지고 퇴화된 것들, 예를 들면 우리의 감성과 아름다운 열정 등을 다시 한 번 일깨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부디 풍요로운 이 자연과 함께 많이 사유하면서 좋은 시간들 보내시고요, 항상 옆 사람 배려하면서 따뜻한 여행하시기 바랍니다.” 짝짝짝~ 박수가 쏟아졌다.
이번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는 부처님의 가슴뼈가 모셔져 있는 탓루앙 사원이다. 부처님의 가슴뼈라니. 생각만 해도 살아계신 부처님을 뵈옵는 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화장한 사리를 나누고, 사리를 담은 통까지 분류해서 모두 10개국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라오스불교는 캄보디아를 통해 들어왔다고 하니, 부처님의 가슴뼈 사리도 그 경로를 통해 전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가사장삼을 여법하게 수하고 단아하게 걸어갔다. 신발을 벗고 맨바닥에서 절을 올렸다. 원래는 계단 위에 올라가 카펫 위에서 불공의식을 할 수 있다는데, 그날 마침 정부 관료가 오게 되어있어 출입이 금지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라오스에서 정부 관료의 힘은 막강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려니 했다. 괜찮다. 이국땅에서 만나는 부처님을 향한 신심이 그깟 일에 무디어질 소냐. 나의 경쇠울림에 맞추어 일행들이 맨땅에서 절을 올렸다. 그 순간 어찌나 경건했던지 나조차 온몸이 전율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지켜보던 관리인이 얼른 다가와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우릴 보고 위로 올라가도 좋다고 손짓하며 출입구를 열어준 것이다. 내 생각엔 그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눈빛으로 그 관리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냈던 것 같다. 관리인이 아주 환한 미소로 화답했으니 말이다. ‘가사장삼을 수했으니 역시 우리 부처님 빽이 통한 게야.’ 순간 어깨가 으쓱했다.
“지심귀명례~” 경건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모두 함께 예불을 모시고 반야심경을 봉독했다. 꼼꼼히 써내려간 축원문을 낭송하고 절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우러러본다. 그렇게 모두를 위한 축원을 마치고, 합장한 채 속으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자그만 나의 서원이다. ‘부처님, 저희들 한국에서 왔어요. 부처님의 심장박동이 여기 이곳에서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아요. 앞으로 더 자애로운 마음으로 살아갈게요. 부처님 따라 일생을 잘 살아가겠습니다.’ 서원의 끝자락에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도반스님과의 추억은 또 이렇게
다른 법당으로 이동 중에 도반스님은 새장에 갇힌 새를 한 쌍 사서 멀리 날려주었다. 어쩌면 새의 자유보다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더 갈구했는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방생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라오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정도의 경제수준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찾아간 사찰의 법당마다 온통 금빛이었다. 화려한 조각과 무늬가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 부처님은 오히려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 화려한 사찰과 수많은 부처님들을 뵈오며, 라오스 사람들을 이해하려 오랫동안 한 곳에 서있기도 했다. 꽃들이 만발한 도량 안의 금빛 부처님과 각양각색의 화려한 조각과 무늬들, 그것들을 내 눈과 가슴 속에 전부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일 만큼 화려하고 예뻤다. 가난한 사람들의 부처님과 스님들을 향한 존경심과 믿음을 보며 마음이 더욱 숙연해지기도 했다.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착하고 풍족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었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사찰순례를 마치고 방비엥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림처럼 펼쳐진 눈앞의 풍경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여기 나랑 같이 있어.”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다. 온통 산과 강인 그곳에서 우리 일행은 물놀이를 했다. 튜브를 타고 밧줄을 잡아끌며 동굴 속을 통과하는 체험이다. 동굴 속에 진입하니 여기저기서 괴성이 들려오는데, 문득 동굴 천장을 바라보니 종유석이 기막히게 신비롭다. 순간 밧줄을 놓고 잠시 물 위를 떠돌았다. ‘아, 멋지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중이 된 지 20년 만에 제대로 해본 물놀이는 상쾌하고 즐거웠다.
다음은 카약이다.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도반스님을 뒤에 태우고 노를 저었다. ‘헐~’ 허리, 다리, 어깨가 빠질 것만 같다. 힘들어 하는 내게 도반스님이 기운 내라며 뒤통수에 대고 응원가를 불러주었다. 얼마 안가 그조차 약발이 떨어지자 이번엔 팁으로 1달러를 주겠단다. “허 참, 기가 막혀서.” 오늘의 이 일을 내 평생 우려먹겠노라 협박했더니, 이번엔 1달러를 더 얹어주겠다고 해서 배꼽 빠지게 웃었다. 하마터면 노를 놓칠 뻔했지 뭔가. 아무튼 즐거운 추억이다. ‘늙어서도 이날 얘길 하며 우리 만나 웃으며 떠들겠지? 강원시절 얘기를 날밤 새워 해가며 웃고 떠들 듯이 말이야.’
원영 스님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아사리(계율과 불교윤리 분야). 운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선원 안거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2008년 「대승계와 남산율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부처님과 제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승계의 세계』, 『계율, 꽃과 가시』, 『인생아, 웃어라』 등이 있다. 현재 BBS불교방송 ‘아침풍경’을 진행하고 있으며, 중앙승가대학교 외래교수로서 강의와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