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I.S. 사태의 원인을 묻다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문화가 있는 삶’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올해 첫 문화가 있는 날을 기념해 약 1,300만 관객을 동원한 ‘국제시장’을 관람하면서 문화융성과 문화산업생태계의 조성이 창조경제의 중요 축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21세기를 일러 경제지배의 시대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상당수지만 이에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문화융성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이론에 호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K-Drama, K-Pop에 이어 전방위적으로 한국문화(Korean Culture)를 해외에 전파·수출하고 있는 한류 3.0시대를 맞아 소위 ‘문화’가 대한민국 국민의 삶을 살찌우고 Made in Korea를 부착한 국내의 상품들의 수출에 일조한다는 믿음까지 확산되고 있다.
| 문화의 융성, 문화의 시장화 그리고 ‘문화전쟁’
보드리야르의 ‘문화민주화’ 개념도 바로 이러한 믿음에서 탄생한 것이며, 정치·경제적 민주화를 실현하지 못한 국가들에서도 최소한 문화의 민주화만은 성취해보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문화민주화를 외치고 문화예술인들과 활발히 교류한다고 해서 문화가 융성되는 것은 아니다. 발터 벤야민이 경고한대로 문화와 예술이 정치화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대중문화산업을 문화와 구분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우리는 이렇게 문화의 융성과 문화의 시장화라는 두 경계 지대에 서 있다. 그런데 그 경계를 현대사와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 한 칼럼니스트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못을 박는다. 현대는 ‘문화전쟁’의 시대라고! 문화전쟁은 자국의 문화적 전통을 ‘지키려는’, 다시 말해 소비대중문화의 확산으로 인해 직면하게 된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해보려는 데서 출발한 개념이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미국의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문화논쟁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문화를 경제, 산업 및 콘텐츠와 임의 결합시키면서 소위 국적불명의 혼종문화가 지구촌 위에서 활보하고 있다. 혼종문화가 ‘세계문화’라도 되는 양 젊은 세대들의 소비욕망을 사로잡고 있다. 이들에게 문화적 정체성은 부모세대를 상징하는 ‘아날로그적 유물’에 불과하다. 탈역사, 탈정치를 외치며 스스로가 ‘세계시민’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문화는 ‘지켜내고 지켜가야 할’ 무엇이 아니라 소비와 유희의 대상일 뿐이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문화는 자신의 뿌리가 아니라 지구촌 위를 떠도는 유행상품이자 트렌드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렇게 유행상품과 트렌드만을 좇는 이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사람 잡는 정체성』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아민 말루프의 지적대로 “문화적 정체성이 사람을 잡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렇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어떤 문화도 세계화될 수 없고, 대중문화상품과 문화는 이미 그 출발점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경제세계화는 문화세계화로 그리고 이어 지식의 세계화로 줄달음치는 게 일반적이다. 그 결과는 빤하다. 다양성 대신 획일성이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모든 인간은 ‘문화적 특수성’의 아들이다
글로벌(세계적)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문화는 한국문화이고 중국문화는 중국문화이다. 미국문화는 미국이라는 장소에 근거한 것이고 프랑스문화는 프랑스라는 지리적 권역을 대표한다. 이렇듯 모든 문화는 일차적으로 장소에 기반한다. 장소적 차이가 문화적 차이를 낳는 셈이다. 너른 평야지대에 사는 사람이 산악지방이나 사막지대에서 사는 사람에 비해 더 온순한 편인 것도 장소와 무관하지 않다. 장소는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문화를 구성하는 원천이자 세계관, 우주관을 좌우하기도 한다. 독일인이 이탈리아인에 비해 더 신중한 편이고, 이탈리아인이 부탄사람에 비해 더 소란스러운 것도 기후며 풍토 등 장소성에 무관하다 할 수 없다.
장소는 이렇듯 한 인간에게 삶의 원초적 무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집단공동체의 유전자를 종횡으로 전습傳習하며 전달傳達한다. 한국인에게서 한국인 특유의 집단 및 관계 코드가 두드러진 것도 대한민국이라는 지리적 환경과 연관이 깊다. 불교도라면 누구나 해탈이라는 코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기독교인에게는 유일신 이념이 지배적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그의 문화적 장소성, 문화코드와 분리해 논할 수 없다. 내인內因인 생물학적 유전자와 외인外因인 문화적 유전자가 공동으로 작용하여 한 인간을 다른 인간과 다른 존재이게 한다.
이 지구상에는 실로 다양한 인종과 민족, 다양한 언어, 다양한 종교가 존재한다. 그중 어떤 것도 유일한 것일 수 없으며, 그중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 문화들 간의 소통과 타자와의 공감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인즉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문화적 특수성(cultural locality)의 아들이라는 것! 따라서 서구의 근・현대 철학에서처럼 인간을 ‘주체’나 ‘의식’ 등 추상화된 개념으로 탈코드화, 탈문화화 시켜 비문화적 보편성(non-cultural globality)을 기준으로 계측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문화코드의 차이로 인해 사회 및 국가들 간에 불화와 반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국제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나 I.S. 사태도 결국은 문화코드 간의 충돌이 빚은 대표적 문화전쟁 사례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과 다른 타자 및 타문화와의 소통과 공감을 원천봉쇄 시킨 상태로 각기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미 문화적으로 코드화 된 주체들의 비공감적 태도에 있다.
자문화중심주의, 문화이기주의는 기본적으로 타자, 타문화와의 상호적 공감(교감)을 철저히 부인한다. 타자 및 타문화와의 소통이나 공감에 대한 담론이 오늘날처럼 유행한 적도 없는데 문화적 폭력과 문화전쟁은 전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원인이 대체 뭘까?
| 문화코드의 시대, 주체와 타자의 공감은 가능한가?
이 자리에서 필자는 감히 선언하련다. 서구유럽철학의 핵심인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모든 ‘중심주의’의 모태라고! 자아 중심의 이러한 고질적인 사유 습벽, 다시 말해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아집我執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타자나 타문화와의 소통이며 공감은 탈경계의 시대, 노마드Nomad의 시대를 맞이해서도 소멸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심주의’는 배타적 사유 논리에 근간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타자와 타문화는 고유한 얼굴, 고유한 목소리를 가질 수 없다. 자신의 얼굴,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타자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코기토의 맞상대, 즉 균평均平한 대화상대자로서의 위상이 확보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비문화적 상황에 처한 타자, 배제 논리의 피해자로 고착된 타자 앞에서 소통은 대체 뭐고, 공감은 또 뭐란 말인가? 문제는 소통과 공감을 외치는 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세계의 중심을 전유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타자와 타문화에 대한 소통과 공감이란 ‘말 포장’은 타자 및 타문화의 통제·지배를 위한 명목일 뿐 진정으로 타자와 타문화를 배려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제아무리 “우리 공감합시다.”, “우리 소통합시다.”라고 외쳐대도 “지금의 내 방식대로 살아갈 테니 그냥 내버려두시오.”라며 오히려 비호감을 보이거나 심한 경우는 반감을 표하는 것 아니겠는가.
코드화된 문화적 주체들이 아집我執으로 똘똘 뭉쳐 있는 한, 소통과 공감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다. 전술한 「샤를리 에브도」 만평 사건에서도 증험되듯, 소위 ‘표현의 자유’를 들러 싼 이념공방(“Je suis Charlie.” / “Je ne suis pa Charlie.”)은 단순한 이념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제2, 제3의 공감/반감의 시위가 세계 곳곳에서 후속後續되고 있다. 이렇듯 한쪽 그룹에서의 공감대 형성은 다른 쪽 그룹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예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선 안 된다.
공감과 반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집단은 동일 사건을 놓고서도 얼마든지 다른 집단과는 상반된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요인즉 한 쪽은 옳기에 다른 쪽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 진위眞僞의 문제로 문화적 정체성이나 문화코드의 차이를 평가하게 되면 서로 다른 문화적 주체들 간의 상호성이 확보되기 어렵고, 갈등과 반목만 가속화된다. 다시 말해 양쪽 모두 타자인 상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상호적 변화’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적 타자가 되고 만다.
자신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는 강자의 논리, 바로 그 논리에 의해 많은 국가가 ‘평화-전쟁’에 동원되어 ‘글로벌 공공악’을 행사하기도 한다. 타자는 바로 이들의 ‘단일사회문화적 동질화 테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배제해야만 자신들이 평화로운 존재군에 불과하다. 이렇게 동일성의 논리에 의해 철저히 배제된 타자, 바로 이들의 인정과 배려를 위한 노력 없이는 인류평화도 민주주의도, 인권도 글로벌 시민의식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박치완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한국외대 불어과 및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프랑스철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프랑스 부르고뉴대학에서 베르그송 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대 철학과문화연구소 소장, 세계민속박물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매일경제신문」, 「중앙 이코노미스트」 등에 우리사회의 트렌드 변화와 문화코드 읽기에 관한 칼럼을 연재했다. 공저 『키워드 100으로 읽는 문화콘텐츠 입문사전』, 『문화콘텐츠와 문화코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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