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그토록 원했던 물리학과 박사학위를 땄어요. 그날 전후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죠.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공허감이 몰려왔어요. 10년 동안 목표로 삼았던 학위 때문에 결혼도 미뤄 왔거든요.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난 지금은 더 우울해졌어요. 선생님, 대체 전 왜 이런 거죠?”
| “자살하고 싶다”는 말의 속뜻
2년 전이었다. ‘대한민국 정신건강의 현주소’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어느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던 날,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울먹이는 얼굴로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성취와 행복은 애당초 무관한 것입니다. 우린 어렸을 때부터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을 이루면 무한한 행복이 올 것이라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환상입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젊은이들에게는 이른바 ‘완벽한 스펙’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이전세대만 해도 20대에 최루탄 가스 냄새를 맡으며 정치적 분열을 겪기도 하고, 막걸리 냄새 진동하는 대학 교정에서 선후배, 동기들과 젊음의 열정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치적 고민도 젊음의 열정도 모두 사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작금의 현실을 분석하고 개혁할 기회가 있으면, 취직할 때 내밀 ‘자소서(자기 소개서)’에 보탬이 될지 먼저 따진다. 친구와 마실 막걸리를 살 돈이 있으면 차라리 토플 ‘인강(인터넷 강의)’을 끊거나 도서관 자리부터 산다.
진료실을 찾는 많은 이들은 그렇게 이십대를 보내고 삼십대가 될 즈음, 뭔가를 이루고 나서 오히려 빈 껍질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반대로 취직도, 학위도, 인간관계도 원하는 대로 이루지 못해 불안함을 토로하는 경우 또한 부지기수다. “자살하고 싶다.”는 말은 이제 정신과 진료실에선 “배 아프고 열이 난다.”는 말처럼 아주 흔한 호소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다. 우울의 가장 큰 위험요소인 절망감을 타개할 수 있는 탈출구가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절망감이 압박해 오는 막다른 골목 끝에서 오로지 탈출하고 싶을 뿐이다.
모든 정신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 빈 껍질이 된 것 같다든지 세상에 낙이 없다든지 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깨달음의 기로에 서있다. 고통스럽지만 그 공허감이 결국 세속을 초월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셈이다. 마치 십우도十牛圖의 인우구망人牛具忘 상태라고나 할까.
| 불안, 성찰과 자유의 메시지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내일을 살지? 난 오늘을 살아.”
이러한 태도는 우울이나 불안에 꽤 효율적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앞서 걱정하다보니 우린 미리 지치고 절망하며 수치스러워한다. 그래서 “오늘만 살자.”라는 이른바 ‘하루살이’ 사고는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미국 MVP 풋볼 선수 하인즈 워드. 오늘이 있기까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명제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소멸을 항상 가까이 하며 스스로의 실존을 자각한다면 그리 서두를 이유가 없다. 월호 스님의 말씀처럼 ‘삶이 값진 것은 사라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린 언제나 불안과 마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 나간다. 삶을 향유하기보다 생존하기에 급급하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 불안은 우리에게 유의미한 기능을 갖고 있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을 가리켜 “욕망의 하녀”라고 표현했다. 욕망의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욕망의 하녀인 불안은 우리 자신의 하녀인 셈이다. 불안은 그저 우릴 받들어 모셔야 하는 시종과 같은 존재다. 불안은 지금의 생존 방식이 뭔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린다. 당신의 가치관을 수정하라고 종용한다. 불안은 그동안 미처 보지 못한 당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신이 어떤 모습을 취할 때에 비로소 충만한 삶의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낡은 가치관을 버리고 자신만의 ‘끼’를 살리라는 메시지인 셈이다.
다른 면에서 불안은 주변 사람의 시선에서 이제 그만 자유로워지라는 경종이다. 친구나 부모의 기대 때문에 정작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 많다. 주변의 시선을 거부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조롱이나 비난을 지레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남의 시선에 의존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고 이를 벗어 던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살한 사람들의 심리 부검 결과, 공통적으로 밝혀지는 정서 경험 중 하나는 바로 ‘좌절’이다. 좌절은 분노를 유발한다. 결국 가까운 누군가에게 화가 났거나 아니면 그 화가 부메랑처럼 돌아오면서 자신을 향한 원망이나 자책으로 변질될 때 우리들 중 누군가는 자살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분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러 가지 뿌리가 있겠지만 어쩌면 그 중 일부는 세상을 향한 우리들의 욕망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마음 주지마라』의 저자 웨인 다이어는 말한다. “욕망은 행복을 품지 못한다.”라고. 재산과 직업으로 꾸며진 거짓 자기를 버리고 의미에 의해 번성하는 자신을 진정한 나로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슬럼프에 빠져 자칫 모든 걸 놓을지 모르는 이들이 귀 기울일 만하다.
| 세상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란 베스트셀러를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했던 미국의 저술가 레오 버스카글리아 또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얘기한다.
“산다는 것은 죽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고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절망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것도 감수하지 않는 일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불행한데 단지 극단적 불행과 보편적 불행이 있을 뿐이라고. 정신치료도 그저 개인적인 극단의 불행을 보편적 불행으로 살짝 올려놓는 것 뿐이라고. 자살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은 사실 건강한 사람들과 종이 한 장 차이가 있을 뿐이다. 건강한 사람은 행복이 허상임을 안다. 그 뿐 아니라 자신의 보편적 불행을 전 인류의 태생적 한계로 본다. 하지만 우울한 자는 보편적 불행을 죄다 자기의 결함으로 착각한다. 비극적 불행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세상은 불확실하기 짝이 없고 사람은 태생적으로 나약한 존재다. 마음의 치유나 성숙 또한 꽤 긴 시간을 요구한다. 그런데도 우리 중 일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교만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조차 치욕으로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와 넌 그저 나약한 인간’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받아들이며 체념하고 겸허해지는 것. 이것이 우리의 삶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다행히도 시간은 앞으로만 나아간다. 그 덕에 우린 언제나 변화될 수 있다. 어제와 같은 나의 모습이란 존재할 수 없다. 영원한 ‘나’도 없고 변함없는 ‘너’ 또한 없는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도보다 결과만 보고 판단한다. 우리 또한 그런 실수를 자주 범하며 산다. 그게 사람이란 존재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깨닫게 되면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 환멸이 생기고 다소 울적해진다. 그런데 환멸 역시 실망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직시하게 도와줄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적절한 환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윤활유가 되어준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완성시킨다.
세상엔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상대의 한계뿐 아니라 나의 한계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린 세상을 더 잘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반대로 안 되는 걸 바라거나 조급히 이루려 들면 얻는 건 노이로제, 마음의 병뿐이다. 혜안慧眼이란, 비록 세상은 변하지 않더라도 삶의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자, 나다운 모습으로 나만의 길을 갈 수 있는 추진력이다.
김현철
공감과 성장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장. MBC라디오 ‘색다른 상담소’, ‘FM 음악도시 성시경입니다’, ‘두시의 데이트 박경림입니다’ ‘써니의 FM 데이트’, ‘윤하의 별이 빛나는 밤에’ 등에 고정패널로 출연했다. 『아무도 울지 않는 연애는 없다』, 『불안하니까 사람이다』, 『우리가 매일 끌어안고 사는 강박』, 『울랄라 심리카페』, 등의 책을 냈으며, 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여성동아 ‘김현철의 현몽우답’에 고정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