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겨울의 맛 배추와 배추두부말이
사찰음식, 일반명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사람마다 기억하고 상상하는 사찰음식의 밥상은 제각각이다. 각자가 쌓은 경험과 기대가 다른 까닭이다. 사찰음식이란 누구에게는 볕 좋은 절 마당에서 쓱쓱 비벼먹는 비빔밥이고, 누구에게는 요리잡지에서 본 빛깔 고운 상차림이다. 혹은 오후불식, 일종식, 1식 3찬으로 일컬어지는 인욕의 식문화일 수도 있다. 이 중 어느 하나만을 골라 사찰음식의 기준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누구나 동의할 만한 ‘사찰음식 교집합의 공식’은 낼 수 있겠다. ‘수행하는 마음으로 만들고 먹는, 오신채 없는 채식’이다. 이 뼈대에 각자의 살이 보태져 수많은 사찰음식이 탄생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것이 문화가 꽃피는 방식이다. 한해를 보내며 사찰음식 대중화 현장의 일꾼들이 모였다. 그들이 말하는, 불교의 ‘고유영역’을 넘어 ‘모두의 밥상’으로 진화하는 사찰음식 이야기.
| 추위를 견디며 맛이 드는 채소, 배추
‘숭菘’. 배추를 적을 때 쓰는 한자다. 본디 타고난 생명력이 이름에 담겼다. 소나무 송松에 초두머리가 얹힌 숭菘은 옛날 야생배추가 겨울에 말라 죽지 않고 소나무처럼 푸르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백숭白菘, 백채白寀로 불리다 지금의 배추가 되었다. 문헌 속 배추의 흔적은 고종 23년(1236년) 『향약구급방』에서 처음 발견되며 이후 여러 농서에도 자주 언급되나 채종기술이 부족해 지금처럼 흔하게 먹기는 어려웠다. 배추가 보편적인 식재료가 된 것은 신품종이 보급되기 시작한 1세기 전부터다.
배추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푸성귀다. 18~20도에서 잘 자라고 이보다 낮은 15~18도에서 속이 여문다. 봄부터 가을까지 재배 가능하며 김장철에 출하되는 배추는 8월 15일을 전후로 파종한다. 여름에는 고도가 높고 기온이 낮은 강원지역에서 자란 고랭지배추를 선호하는데, 돌밭이라 배추 이외에 심을 것이 별로 없는 태백이 대표산지에 속한다. 평창, 정선, 영월 등지에서도 많이 난다. 초겨울에는 해풍을 맞고 자란 해풍배추가 대량출하되며 해남을 위시해 서산, 신안, 부안, 진도 등지에서 남해와 서해에 면한 땅에 배추농사를 짓는다. 김장배추는 11월 말, 12월 초가 가장 맛있고, 이는 새벽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배추가 스스로 냉해를 막고자 수분을 내보내니 당도가 높아지는 까닭이다.
날씨와 해충의 영향을 크게 받아 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내리는 농작물로 배추만 한 게 또 없다. 풍작일 때는 산지 가격이 40원도 하고 이상기후일 때는 만 오천 원에 팔리며 ‘금추’, ‘배추대란’이라는 신조어를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밥상에서 빠질 수 없는 식재료이기에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고 배추농사를 짓는 농부에게선 보살의 심성이 읽힌다.
배추 맛이 잘 든 초겨울이면 사찰에서는 배추를 다져넣어 만두를 해먹는다. 산사의 텃밭은 기후가 서늘하여 산사에서 직접 기른 배추는 유독 달고 맛이 좋다. 배추된장국이나 배추된장무침, 배추전으로 담백하게 먹기도 하고, 배추 고갱이(안쪽의 연한 이파리)와 무채를 넣어 밥을 해서 양념장을 곁들여 내기도 한다. 스님들에게 배추는 식재료가 귀한 겨울산사의 공양시간을 풍성하게 해주는 고마운 채소다.
| 김장 울력의 땀방울 씻는 배추두부말이
“김장이 끝난 후 조실스님은 버린 시래기 속에서 먹을 수 있는 시래기를 다시 골라 엮고 있었다. 나도 조실스님을 도와 시래기를 뒤졌다. 조실스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식물食物은 아껴야만 하겠지요. 식물로 되기까지 인간이 주어야 했던 시간과 노동을 무시해 버릴 순 없잖아요.’ 나는 침묵하면서 시래기를 뒤적일 뿐이었다. 진리 앞에서 군말이 필요할까.”
- 『선방일기』 ‘김장 울력’ 中
김장은 일 년 살림살이 가운데 가장 ‘큰일’이다. 부엌살림을 맡은 사람뿐 아니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듬고, 씻고, 절이고, 담그고, 나르는 일손을 보태야 무사히 치러낼 수 있다. 세간과 출세간을 가리지 않는다. 둘러앉아 배추를 다듬으며 주고받는 정담情談이 선방에선 철두철미한 설법이 되기 마련이다. 일상다반사, 수행 아닌 일이 없는 것이 절집의 법도이니.
김장이 끝나면 배추의 겉잎은 시래기로 말렸다가 국이나 나물을 해먹기도 하고 데쳐서 속을 넣어 배추말이로 먹어도 좋다. 속으로는 두부와 감자를 데쳐서 으깨고 표고와 당근, 고추를 잘게 다져서 섞어 쓴다. 제철배추의 풍부한 비타민과 칼슘에 더해 두부로 단백질을 채우고 감자로 탄수화물을 보충한 영양식이 완성된다. 사찰음식에 주로 쓰이는 향신채소인 고수를 넣어 속을 만들면 독특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한입 크기로 썬 배추두부말이를 나누어 먹으며 김장 울력의 땀방울이 청량하게 씻기고, 식물食物을 아끼는 마음가짐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김장철 배추두부말이의 또 다른 미덕이다.
| 사찰음식, 우리만의 것은 아니기에
사찰음식이 산문 밖으로 나오는 데 힘을 쏟는 사람들이 있다. 2009년부터 ‘사찰음식대향연’을 개최해 온 봉녕사(주지 자연 스님)에서 사찰음식교육관 ‘금비라’의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김가령 팀장, 2013년 국행수륙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등재되며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진관사(주지 계호 스님)의 사찰음식연구소 정미 팀장, 국내 최초로 사찰음식 도시락전문점을 열어 성공리에 운영 중인 ‘마지’ 김현진 대표가 2014년을 마무리하는 자리에 함께했다. 3인3색이다. 그 중 김가령 팀장은 선재 스님으로부터 3년 간 사찰음식을 배우고 봉녕사 사찰음식교육관 개관 당시부터 합류해 일하고 있다.
“사찰음식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을 체감해요. 올해 6회째인 봉녕사 ‘사찰음식대향연’은 이제 국제행사로 확대됐고 지난해 6월 문을 연 ‘금비라’에서 그동안 사찰음식을 배운 교육생도 연인원 500명이 넘지요. 봉녕사에서는 불교의 정신과 음식이론 교육을 중시합니다. 교육생들도 사찰음식이 왜 한식이나 가정음식과 다른지 알고 싶어 하는데 그 답은 요리에 있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론 비중이 높은 강의가 더욱 인기 있어요.”
사찰음식이 특화된 비구니전통사찰 가운데 봉녕사가 수도권 최대 규모라면 진관사는 수도권 중심부에 위치해 주요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진관사 정미 팀장은 프리랜서로 일하다 4년 전부터 진관사의 음식관련 업무를 총괄하며 직접 강단에서 사찰음식을 강의한다.
“진관사는 전통적으로 ‘재’ 사찰이었습니다. 국행수륙재를 통해 설법과 공양을 함께 베풀어 왔고, 매일 크고 작은 재를 모시면서 음식문화가 지속성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래서 국가 차원의 언론행사나 의전에 도움을 드리는 것도 진관사의 몫이 됐습니다. 진관사는 사찰음식 강좌 교육비를 가능한 낮게 정하고, 스님과 재가자가 함께 강의합니다. 또한 사업과 대외 업무는 재가자가, 전통 전수는 스님이 나누어 맡고 계시죠. 전통과 실용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사찰음식 대중화의 중심축이 스님과 사찰이었다면 확장된 개념으로 대중화를 시도하는 인물이 있다. 사찰음식 도시락을 개발해 일반의 식탁 위에 올려온 ‘마지’ 대표는 사찰음식에서 불교색채를 덜어내고 트렌드를 적극 반영했다.
“사찰음식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오신채가 없는 채식’이지요. 이 바탕 위에 테이크아웃과 배송이 자유로운 도시락이라는 트렌드를 얹은 것이 ‘마지’입니다. 매장이 위치한 방배동 주민과 직장인들이 주로 이용합니다. 최근 강남구청이 주관하는 경력단절여성 창업 멘토링에 강의와 조언을 제공하기로 업무협약을 체결했어요. 사찰음식 도시락전문점의 시장성이 확인되고 있다는 의미죠. 불교색을 드러내진 않지만 대학원에서 계율을 전공했고 이 분야를 개척하는 책임감으로 음식인문학 연구모임을 꾸리며 공부를 멈추지 않습니다.”
사찰음식 분야 숨은 일꾼들을 위해 마련한 송년회 자리.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화제는 자연스레 사찰음식 대중화의 과제로 옮아갔다. 교육기관이 많아지면서 공인된 자격제도가 필요하고 손쉽게 식탁에 올릴 수 있는 메뉴도 아직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기에 재가자 음식전문가들이 대중과 스님들의 연결고리 역할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데 뜻이 모아졌다.
“긴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찰음식에서 불교의 정신이 희석되면 이웃종교에서도 상품화가 가능하다는 이유다. 사찰음식을 배우거나 먹으러 오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비불교도인 점은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체감하는 현실이다. 불교색채를 덜어내는 건 좋지만 불교와 다양한 종교음식을 공부해 사찰음식을 객관화해야 한다는 대안이 나왔다. 이를 교육하는 전문기관의 필요성도 함께 제기됐다.
살아있는 현장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어느덧 초겨울의 저녁이 찾아왔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의 공감으로 고단함이 누그러지고 얼굴에는 뽀얀 웃음꽃이 피어나는 저녁이다. 김장날의 저녁공기가 꼭 이렇다. 다시 1년 후를 기약하며, 이들의 노력으로 사찰음식이 ‘모두의 밥상’에 오르는 모습을 그려본다.
배추두부말이
재료
배춧잎 5장, 두부 1/2모, 감자 1개,
마른 표고 2장, 당근 1/2개, 청・홍고추 1개씩, 고수 약간,
들기름 1t, 소금 약간
양념장(고추장 1T, 집간장 1/2t, 유자청 1T)
만드는 법
1. 배춧잎은 끓는 물에 데쳐 물기를 뺀다.
2. 두부는 끓는 물에 데쳐 칼등으로 으깨어 소금으로 살짝 밑간한다.
3. 감자는 찌거나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뜨거울 때 으깬다.
4. 물에 불린 마른표고와 당근을 잘게 다진 후 들기름과 소금으로 밑간해서 팬에 볶는다.
5. 반으로 갈라 씨를 뺀 청・홍고추와 고수 잎은 각각 잘게 다진다.
6. 으깬 두부에 감자, 표고, 당근을 넣고 고루 섞은 다음, 다져놓은 청・홍고추를 넣어 들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고수를 넣어 버무린다.
7. 데친 배춧잎을 넓게 펴고 물기를 닦아낸 후 6을 넣고 돌돌 말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담아낸다. 기호에 따라 양념장을 곁들인다.
Tip_
배추는 잎이 얇고 잎맥이 가늘어 부드러운 것이 상품이다, 잘랐을 때 속이 꽉 차 있고 심이 적으며 적당히 노란색을 띠는 것이 달고 고소한 맛을 낸다. 반면에 줄기 부분의 섬유질이 뚜렷하고 억세거나 뿌리 부분에 검은 테가 있는 배추는 피하는 것이 좋다.
요리 감수 정관 스님(백양사 천진암 주지)
스타일링 이승진, 송미란(아란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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