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기고 - 근현대 한국불교 잡지, 그리고 「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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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고 - 근현대 한국불교 잡지, 그리고 「불광」
  • 빅부영
  • 승인 2014.12.0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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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 글은 월간 「불광」의 탄생을 알리는 광덕 스님의 사설, ‘순수불교선언純粹佛敎宣言’의 첫 대목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탄생게와 “나는 하늘과 인간의 모든 그물을 벗어났다. 비구들아! 그대들도 천신과 인간의 모든 그물을 벗어났다. 비구들아! 길을 떠나거라. 여러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동정하여, 인간과 천신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로 시작되는 ‘전도선언’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다. 광덕 스님 역시 인간의 참 모습을 상기하며 「불광」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부처님의 전도선언과 광덕 스님의 순수불교선언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전해져 오는 그릇이 다를 뿐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고 이를 들은 제자 아난은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입으로 전했다. 광덕 스님과 그 제자들은 활자로 남겼다. 「불광」뿐만 아니라 불교언론 매체는 모두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람’의 문제를 다룰 책무가 있다. 하지만 불교 잡지 100년사에서 인간을 정면으로 거론하며 시대를 열어간 불교 매체는 「불광」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불교 잡지사에서 「불광」 40년을 되돌아보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 한국의 불교 잡지는 어떻게 시작 되었나

불교 잡지는 식민지, 그리고 근대화와 함께 시작됐다. 한국 최초의 불교 잡지는 1910년 2월 원종圓宗 종무원에서 발행한 「원종」이다. 잡지 「원종」은 종단 ‘원종’의 기관지이다. 잡지 「원종」을 비롯, 1920년대까지 초기 불교 잡지는 이름만 바꾼 기관지였다. 「원종」을 뒤이은 1910년대 「조선불교월보」, 1920년대 「불교」, 1930년대 「신불교」가 모두 기관지였다. 조선이 식민지로 패망한 후 첫 불교잡지인 「조선불교월보」는 총독부의 강압 통치 덕분(?)에 태어났다. 구한말 자유롭던 언론계는 일제 총독부의 강압으로 일제히 자취를 감추고 교리연구나 포교 사업을 위한 기관지가 필요했던 종교잡지만 살아남았다.

기관지가 아닌 불교 잡지는 1918년 9월에 창간한 만해 한용운의 「유심」이 처음이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소파 방정환이 사환으로 일했던 「유심」은 만해가 3・1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3호를 끝으로 종간했다. 그 뒤 통도사 등 사찰과 조선불교청년총동맹 같은 단체들도 잡지를 발간했다. 이러한 잡지들은 당시 불교대중화를 위한 불교문학이나, 일반 종교소개, 사회 혁신 문명인의 수양 등을 다루는 일반 잡지 성격이 짙었다.

1930년대 들어 기관지가 아닌 사찰이나 단체가 잡지를 발간 할 수 있었던 것은 구한말 이후 불교계의 지속적 노력이 축적된 결과였다. 특히 영남지역 사찰의 성장이 컸다. 통도사・해인사・범어사 등 경남3본산은 합심해서 해동역경원을 창립해 한글경전을 번역하고 불교잡지를 발간했다. 조선불교조계종 기관지 「신불교」도 출발은 경남3본산이었으며 「적광시보」, 「경북불교」등이 지역 사찰에서 발간한 잡지였다.

 

| 재가자 중심으로 불교 잡지의 명맥을 잇다
  1950~1970년대

1950~1960년대는 재가자가 불교 출판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예가 조흥은행장을 역임한 정종원이 1957년 설립한 법시출판사다. 일제시대 때부터 불교에 심취, 불은佛恩 갚을 길을 고민했다는 정종원은 1957년 법시출판사를 등록한 후 1963년 사보 형태로 잡지 「법시」를 발간했다. 1960년대 가장 주목할 매체는 조계종 기관지 「대한불교」다. 불교신문 전신인 대한불교는 대처 측 기관지 「현대불교」에 맞서 정화운동의 이념과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신문이지만, 교리, 소식, 문예 등 다양한 글을 싣고 순간旬間지였다는 점에서 잡지와 닮았다. 출판이 아직 대중적이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글이 실리는 「대한불교」는 다른 잡지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법정, 운학 등 젊은 승려들이 지면을 통해 이름을 알렸고 불교역사, 교리, 부처님 생애 등이 「대한불교」를 통해 소개됐다.

1970년대 들어서면 잡지를 발간하는 주체가 재가신도에서 사찰이나 단체로 분화하는 조짐을 보인다. 통합종단에서 이탈한 대처측은 정부와 오랜 갈등 끝에 1970년 초 태고종을 설립, 그 기관지로 월간 「불교」를 창간했다. 1970년대 말에는 도선사가 「여성불교」를 창간했다. 1975년에는 「법시」를 이끌었던 종달 이종익이 최초의 선禪 잡지 「선문화」를 창간했다.

1970년대 가장 주목할 잡지는 1974년 11월 광덕 스님이 창간한 「불광」이다. 스님은 조계종이 근대적인 기틀을 세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봉은사 대학생수도원 건립에서 보듯 청년엘리트 불자들에 대한 기대가 남다른 분이었다. 스님은 조계종을 통한 한국불교 나아가 한국사회 변화를 모색했지만 당시 종단 역량으로는 무리였다. 스님의 뜻을 함께 했던 청담 스님이 입적하자 칭병稱病을 대고 종단 공직에서 물러나 대각사에서 대중과 만나 당신의 뜻을 펼치는데 그 구심점이 「불광」이었다. 선禪이 풍미하던 시대, 스님이 주창한 ‘반야바라밀’은 ‘깨달음’이라는 실체가 모호하고 현실 세계에 눈감은 선종에 실망한 젊은이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불광」은 이후 사람들이 모일 회당會堂 건립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1980년대 도심포교당 운동, 복지 사회 활동의 이념적 바탕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이 잡지가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 불교 잡지, 전성기를 거쳐 쇠퇴기로
  1980~1990년대 초

1980년대는 가히 ‘잡지시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종수種數나 발간 주체, 다루는 분야 등 여러 면에서 가장 풍부한 시기였다. 잡지 발간 주체가 재가자에서 사찰이나 스님으로 급격히 이전하기 시작했다. 반면 1950~1960년대를 이끌었던 재가자 출판은 급속도로 사라졌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불교를 희생양 삼았던 10・27 법난이 젊은 승가를 각성시켜, 사회 종단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잡지가 출・재가들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합천 가야산 골짜기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살던 젊은 스님들이 1982년 월간 「해인」을 창간,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냈다. 해인 총림 방장이며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 스님의 법문과 젊은 스님들의 울분이 함께 실린 이 잡지의 반향은 한국사회 전반에 울려 퍼졌다. 1984년 겨울 사회 문제에 관심 많고 실력과 문장력을 갖춘 한 젊은 스님이 「불교사상」을 창간, 사회문제, 불교내부, 종단 문제 등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어 1985년 6월 훗날 「대중불교」로 이름을 바꾸는 월간 「대원」이 등장했다. 「대원」은 이전의 잡지와 달랐다. 한 손에 쥐는 작은 판형에 활자만 있던 기존 불교잡지와 달리 컬러 사진이 들어간 크고 시원한 일반 잡지 모습을 띠었다. 내용도 불교 교리를 홍보하던 사상지에서 탈피해 사회와 종단 문제, 신행흐름 등 시사를 다루었다. 이는 대한불교진흥원과 해방 후 처음으로 불교교양대학을 설립하는 등 대중불교운동을 선도했던 대원정사의 적극적 지원 덕분이었다. 포교사 전문지를 표방한 「월간 법회」, 서경보 스님이 발행인이던 「선사상」, 시사문제와 불교계 현안을 심층적으로 다뤘던 월간 「현대불교」도 1980년대를 대표하던 잡지였다. 여기에다 「봉은」, 「신행회보」, 「관음」, 「동학」 등 다양한 형태의 사보들이 1980년대의 불교잡지를 더 풍요하게 만들었다.

「법륜」, 「법시」, 「불광」 등 그 이전에 나왔던 잡지들과 더불어 1980년대 한국불교 언론은 잡지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잡지는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 기울어갔다. 이는 비단 불교잡지 뿐 아니라 언론계 전반적인 변화였다. 잡지를 대신한 것은 신문이었다. 신문이 성장하고 잡지가 퇴보한 것은 불교 내부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불교계 자본 규모가 커지고 사회적 영향력도 확대됐다. 자연스럽게 불교 관심사가 많아지고 보다 빠른 소식을 원했다. 자본과 인력으로 많은 지면과 빠른 발간 주기로 등장한 신문을 편집장 1명이 도맡아 만드는 잡지로서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잡지를 창간하고 이끌었던 재가불자들이 떠나거나 나이든 것도 잡지 침몰에 한 몫 했다. 「법시」와 「선문화」를 창간했던 이종익, 「법륜」의 박완일이 대표적이다. 「법륜」, 「법시」, 「불교사」, 「법회」, 「선사상」, 「현대불교」, 「굴렁쇠어린이」가 문을 닫았다.

 

| 사보寺報 중심으로 재편된 잡지
  1990년대 중반 이후

1990년대 들어서면서 사찰과 스님들이 불교계 잡지 시대를 이끈다. 그 흐름은 2000년대 들어서 더 공고해져 이제는 불교계 잡지의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그 중에서도 사보寺報의 강세가 두드러진다. 「불광」을 비롯해 「해인」 등의 전통적인 사보가 계속 발전해가는 가운데 동학사, 청암사, 봉녕사 등 비구니 강원에다 송광사, 통도사 등 주요 사찰이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보를 발간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1990년대 초반 스님들의 결사단체인 선우도량과 실천불교전국승가회도 각각 「선우도량」과 「화두와 실천」 등 무크지 성격의 잡지를 발간했었다. 현재 발간되고 있는 잡지 중에서 대표로 꼽히는 해인사 「해인」, 불광사 「불광」, 봉은사 「판전」, 신흥사 「불교평론」과 「유심」, 선학원 「선원」도 모두 사찰이나 종단 스님들이 운영하는 재단이 발간 주체다. 「불교와 문화」를 발간하는 대한불교진흥원만이 유일하게 단체다.

내용과 주제는 불교사상・교리・신행 일변도이던 과거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다. 특히 문화 관련 잡지가 많아졌다. 「차의 세계」, 「차와 문화」, 「판전」, 「불광」 등이 문화재, 사찰 풍경 등 사찰 문화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불광사가 격월간 형태로 발간한 「공감플러스」는 지역 문화지 성격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창간 후 7년간 통권 42호에 걸쳐 발행을 지속하며 사찰이 사보가 아닌 지역 전문 잡지 형태를 띤 것은 불광사가 유일하다. 1999년 창간, 통권 52호를 발간한 「불교평론」은 불교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제반 사회문제를 불교적 시각으로 분석하는 학술지와 대중지의 중간 성격을 띠고 있다. 선禪 전문잡지 「선원禪苑」의 맥을 잇는 선학원의 「월간 선원」은 주로 선 관련 주제를 많이 다룬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현재 잡지는 많지만 위기는 여전하다. 비슷한 내용의 사보가 주력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고 인터넷과 SNS의 성장도 무시할 수 없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잡지뿐만 아니라 전통 매체인 신문, 방송까지 위협할 정도로 위세가 엄청나다.

| 몇 차례 작은 변화와 한 차례 큰 전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사보와 SNS의 틈에서 생존을 도모해야하는 불교계 잡지는 「불광」 밖에 없다. 사중으로부터 재정을 지원받는 봉은사 「판전」, 직원이 많지 않은 해인사 「해인」과 달리 「불광」은 자체적으로 재정을 해결하고 제작비를 조달해야하는 ‘회사’다. 시장에 나온 「불광」은 교계 수준을 뛰어 넘었다. 디자인・편집 등 외형은 물론 다루는 내용, 등장하는 필자들의 면면과 글 수준이 상당하다. 교계 흐름은 전문 기자들이 챙기고, 외부 동향・문화 흐름 등은 불교신자이면서 교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필자들이 짚어주고 있어 정보도 다양하고 알차다. 사진만 훑어도 월 6,000원 구독료가 아깝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수部數는 늘지 않았다고 한다. 활자를 읽는 신도가 30~40년 전보다 많아졌고, 수준도 훨씬 높아졌는데도 부수가 늘어나지 않는 것은 불교계 환경 변화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선 인쇄매체의 인기가 없다. 지방지를 합쳐 최대 6개까지 발간했던 교계 신문도 정상적으로 발간되는 주간지는 3곳에 불과할 정도로 위축됐으니 사보에 빼앗기고 신문에 내쫓긴 잡지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만도 대단하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외부로 돌리면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미래는 더 암담해진다. 「불광」은 최장수 불교 잡지다. 불교잡지 역사상 창간 후 한 호도 거르지 않고 40년을 넘긴 불교 잡지는 「불광」이 최초며 유일하다. 그 힘은 창립자 광덕 스님으로부터 나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광덕 스님을 따르는 불광 회원들이 여전히 가장 든든한 후원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도, 도약도 광덕 스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광덕 스님을 상품으로 마케팅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의 골수骨髓를 계승, 발전해야한다는 뜻이다.

「불광」은 몇 차례 작은 변화와 한 차례 큰 전환을 했다. 1974년 11월 창간부터 70년대까지 광덕 스님이 직접 글을 쓰고 필자를 선정하며 사실상 편집장 역할을 하던 초창기가 1기다. 2기는 칼럼 등 극히 일부만 직접 집필하고 나머지는 편집진과 외부 필진에 맡겼던 1980년대와 건강상 문제 등으로 인해 스님을 대신한 주간이 지휘하던 1990년대까지로 볼 수 있다. 1999년 입적 후 2005년 지홍 스님이 불광 회주를 맡을 때 까지 「불광」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광덕 스님이 직접 글을 쓰고 편집에 관여한 1기를 빼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유사한 점이 많다. 2005년 지홍 스님이 불광회주를 맡은 뒤 변화를 시도하지만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큰 변화는 2008년 1월호에서 볼 수 있다. 큰스님 인터뷰, 풍경 스케치, 선법문, 상담, 명상, 독자 칼럼, 생전 광덕 스님의 말씀 등 기존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시사성과 기획을 강화한 점이 기존과 다르다. 2005년 지홍 스님이 사회와 소통 등을 과제로 내세우면서 외형적 변화를 꾀하지만 지면에 크게 반영되지 않던 것이 2008년 들어서면서 달라진 것이다. 그 즈음 한창 사회 이슈가 되던 4대강 주제 등이 지면에 등장했다. 이전의 「불광」에서는 보이지 않던 주제였다. 교계잡지에서 시사문제가 이미 사라진 뒤여서 「불광」이 그 역할을 자임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시 주춤한 상태다.

| 실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는 「불광」에 거는 기대

「불광」은 여전히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론을 대신하여 몇 가지 조언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불광」이 의지해야 할 등불은 역시 광덕 스님이다. 스님이 널리 펴고자 했던 ‘불광’사상의 구체화・현실화가 「불광」이 가야할 길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불광」은 다른 매체와 달리 이념적 지향성이 뚜렷하다. ‘법’이 있고 법을 따르는 모임과 공간이 생겼다. 광덕 스님이 말한 ‘불광’의 핵심은 사람이다. ‘사람의 참 모습은 절대의 자존자自存者며 무한자며 창조자’라는 창간호 사설이 말해준다. 불교 잡지사史 속에서 사람의 소중함, 존귀함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단정한 잡지는 볼 수 없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생명의 존엄함과 안전을 강조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물질적 풍요만 외치는 시대에 스님은 인간 그 자체의 소중함을 외쳤다. 광덕 스님이 외친 불광 사상은 인간 존중 생명 존중 사상이다. 한국불교는 1980년대까지 ‘깨달음 지상주의’였다. 오직 간화선을 참구하는 것만이 불교의 모든 것인 줄 알았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상구보리上求菩提 외에 하화중생下化衆生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나마 깨달음이 먼저이고 중생 구제는 다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야 보리와 중생은 별개가 아니며 이미 구현되어 있음을 말하는 정도인데 광덕 스님은 이미 수없이 강조했다. 광덕 스님이 말하고자 한 ‘사람’이 무엇인지를 더 고민하고 이를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끄집어내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해 보인다.

둘째, 기획이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듯 보인다. ‘나쁜 기획’은 없다. 그만큼 고민하고 취재에 충실을 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독자의 호응을 얼마나 얻느냐 인데, 관건은 공감이다. 공감을 얻기 위한 조건은 안목과 사실이다. 얼음 밑에 숨어있는 물고기를 잡기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흘러가는 물의 흐름을 읽어야하고, 포인트를 정확하게 잡아야한다. 기획도 마찬가지다. 별개로 보이는 현상을 하나로 묶어내는, 즉 상황을 읽는 눈과 상황에 맞는 사실을 끌어내는 두 가지를 갖춰야 대중은 반응한다. 가령, 요즘 열풍이 불고 있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세계가 열광하는 이유는 임대료, 자본수익, 예금이자 등 자본을 불평등의 요인으로 끌어내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지난 8월호 「불광」에 실린 특집 인물열전 편을 들여다보자. 선후배 군승, 동양미술사학과 교수, 대목장 등 다양한 인물군을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각각의 직업과 사연을 가진 것 외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사람의 어떤 면을 드러내려 하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럴 경우 독자는 흥미는 가질지 모르지만 공감하지는 않는다.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주제와 기사를 더 고민해야한다.

위 두 가지 제안은 사실 「불광」만이 아닌 교계 언론 모두가 고민해야 할 주제이다. 왜냐하면 어느 교계 언론도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반 언론, SNS에서 인간에 대해 더 고민하고 논의를 펼쳐나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인간에 대한 고민의 폭이 더 확장되고 구체화됐지만 불교신문을 비롯한 교계 언론은 이를 아젠다로 설정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40년 전처럼 다시 한 번 「불광」의 역할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불광」은 지난 100년 한국 불교잡지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다. 불교 잡지의 고유한 전통을 이으면서 현대 잡지의 뛰어난 미적 감각을 살려내는 실력을 갖추고 일반 시장에까지 나가서 살아 꿈틀대고 있다. 그 힘이 불교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를 기원한다. 이는 「불광」의 태생적 임무이기도 하다. 광덕 스님의 창간호 사설은 이렇게 끝맺는다. “본지本誌 ‘佛光’은 감히 우리의 역사와 생활 속에 부처님의 위광威光을 전달하는 사명使命을 자담自擔하고 나선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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