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찬란한 등불로 타오른 40년 '불광'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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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찬란한 등불로 타오른 40년 '불광'의 시간
  • 정하중
  • 승인 2014.12.03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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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 마흔 살이 되기까지

월간 「불광」을 창간한 광덕 스님이 1974년 당시 사용하던 입회안내문에 적어놓은 문구다. 「불광」은 그렇게 탄생했다. 반야의 지혜로 세상을 밝게 비추겠다는 전법서원을 위해 창립된 불광회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문서포교의 방법. 그것이 「불광」이었다. 목적이 분명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강한 원력이라는 엔진이 있었다. 「불광」의 발간 이후 폭발적인 반응들이 되돌아왔다. 불광법회가 열리는 대각사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입소문을 타고 「불광」 구독자들이 빠르게 늘었다. 문서포교의 개념조차 희박하던 시절 창간된 「불광」이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40년의 기록을 되짚어가며 「불광」의 변천사와 특징들을 살펴봤다.
 

Part 1
「불광」의 얼굴, 표지와 판형의 변화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광」의 얼굴인 표지와 판형은 수차에 걸쳐 변신을 거듭했다. 창간호인 1974년 11월호는 한 손에 쏙 들어오는 13×18.7cm 사이즈였다. 당시는 일본식 제책방식이 출판계에 전반적으로 자리 잡고 있을 때였다. 때문에 초창기 「불광」 역시 우에서 좌로 책을 넘기며 읽는 제책방식에 세로쓰기로 제작됐다. 당시 사용되던 ‘佛光’이라는 제호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인 여초 김응현의 작품이다.

표지 디자인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80년부터다. 1980년 1월호(통권 63호)부터 전면 흰 바탕에 제호와 특집 등의 소개문구, 그리고 사진 등으로 디자인된 표지가 선을 보였다. 1974~1979년까지의 「불광」이 한 단계 진화한 모습이다.

1984년이 되면 「불광」은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겪는다. 창간 당시부터 이어오던 일본식 제책방식과 세로쓰기를 전면 교체, 좌에서 우로 책을 읽는 제책방식과 가로쓰기 형식이 도입된 것이다. 이것은 대중잡지인 「뿌리깊은 나무」에서 시작된 잡지계의 가로쓰기 훈풍을 불교계가 수용한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1989년과 1990년 약간의 표지 변화를 거친 「불광」은 1993년에 들어 이전에 없었던 대대적인 디자인 변신을 꾀한다. 흰 바탕에 독특한 문양을 깔고 제호를 가운데 배치한 과감한 시도였다. 내지 디자인 역시 전에 없이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이 시기를 전후로 「불광」의 편집 디자인은 한 차원 발전한 모습을 선보인다.

「불광」이 창간된 이래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2005년이다. 창간 당시부터 유지해오던 13×18.7cm 사이즈를 15×21cm 사이즈로 조정해 과감하게 크기를 키웠다. 30년 만에 새 옷으로 갈아입은 셈이다. 판형의 크기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내지의 디자인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눈에 띌 만큼의 변화는 아니었지만, 훨씬 정리된 느낌을 찾아볼 수 있었다. 「불광」의 당찬 변신은 판형의 크기 조정에서 끝나지 않았다. 제호를 기존의 한자에서 안상수체의 한글폰트로 바꿨다. 제호의 변화는 큰 폭의 이미지 변화를 가져왔다.

2008년, 또 한 번 파격이 시도됐다. 이번에는 표지가 바깥쪽 접지를 응용한 형태로 제작됐다. 접지가 접힌 상태에서는 전면 사진이지만 접지를 펴면 목차가 드러나는 식이었다. 구성과 디자인 면에서 주목할 만한 아이디어였다. 당시의 파격적인 시도를 두고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지만, 지금도 당시 「불광」의 도전에 대해서는 호평을 보내는 독자들이 많을 정도로 과감한 도전이었다.

2010년까지 유지되던 표지는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맞이한다. 2011년 전체 색감을 검은색으로 통일하고 전면사진을 배치하는 대대적인 변화를 거쳤다. 그러나 진짜 환골탈태는 2012년에 이루어졌다.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판형이다. 17.1×24.7cm로 더 커졌다. 일반적인 태블릿PC보다 가로 폭이 약간 슬림할 뿐, 거의 비슷한 사이즈다. 거기에 과감하게 전면 컬러를 택했다. 읽는 잡지에서 보는 잡지로의 변화다. 변화에 걸맞게 사진의 크기도 키우고 세련된 디자인 트렌드를 더했다. 「불광」의 변화에 독자들은 놀라움을 표했다. 많은 우려 속에 단행한 혁신이었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Part 2
「불광」의 입, 당대 최고의 필진과 유명인사들의 등장

「불광」이 처음 발행되던 1974년만 해도 잡지의 창간을 주도했던 광덕 스님이 많은 수의 원고를 직접 쓰곤 했다. 1974년 11월호와 12월호를 살펴보면 광덕 스님의 그런 노고를 잘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5년에 들어서면서 변화가 감지된다. 당대의 문학가로 손꼽히던 미당 서정주가 1975년 1월부터 신년송을 기고하면서 「불광」의 새아침을 열었다.

「불광」의 역사는 시기에 따라 성격의 변화가 있다. 창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는 학술적인 성격이 강했다. 신도교육을 통한 엘리트 불자 양성이 창간 당시의 목적 중 하나였다는 걸 떠올리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시기에는 당시 최고의 석학들이 대거 「불광」에 이름을 올린다. 당대의 스님들과 함께 서돈각, 양주동, 이항녕, 원의범, 황수영, 이병주, 조명기, 홍정식, 이종익, 목정배, 이영자, 고익진, 이기영, 문명대 같은 불교학자들이 참여했고 서울대 종교학과 장병길, 한양대 수학과 김용운, 중앙대 영문학과 김구산, 국민대 학장 이규석, 동국대 경상대학장 장원종과 같은 타 전공의 학자들도 「불광」을 통해 활동했다. 그 이후로 해가 거듭될수록 당대의 학자들이 대거 「불광」에 참여하게 된다. 동국대 전 총장 송석구와 청보리회 법사 김재영 등은 「불광」 초기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인연을 이어가며 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각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인사가 된 인물들도 「불광」에서 어렵지 않게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불광」 초기 칼럼 코너인 ‘자하문’을 맡아주었던 미당 서정주를 비롯해 김동리, 고은, 조정래, 정채봉, 송수권, 류시화, 한승원, 남지심, 김춘수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문인들이 「불광」에서 활동했다. 전 환경부장관을 역임했던 연극배우 손숙은 이미 1978년 8월호(통권 46호)에 자신의 에세이를 실었던 바 있고, 지금은 보리출판사와 변산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지식인 윤구병도 충북대 철학과 교수 시절이던 1988년과 1992년 칼럼을 게재했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 최초의 노벨평화상 후보자였던 민족의 사상가이자 대표적인 기독교인 함석헌도 1978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칼럼을 실었다.

「불광」의 성격이 학술에서 문화 방면으로 시야를 넓히기 시작한 1980년대 중후반 이후부터는 연예인들이나 문화계 종사자들도 자주 이름을 올렸다. 1991년부터 중견 연예인 연규진, 나문희, 전원주, 김성녀, 김병조 등이 ‘내 마음의 법구’를 통해 「불광」 지면에 등장했다. 이후에도 배우 전무송, 김혜옥, 가수 장사익, 김수철, 래퍼 아웃사이더, 피아니스트 진보라, 국가대표 사격선수 진종오, 야구선수 홍성흔, 영화감독 이창재, 박찬경, 소설가 박범신, 시인 도종환, 류근, 이해인 수녀 등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계 인사들이 「불광」과 인연을 맺었다.

또한 예술 분야에 대한 「불광」의 관심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서예가 일중 김충현·여초 김응현 형제, 화가 김서봉,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이자 ‘안그라픽스’를 설립한 안상수, 사진작가 홍순태, 세계적인 선무의 창시자 이선옥, 조각가 진철문, 도예가 천한봉, 판화가 이철수, 명창 안숙선 등의 예술가들이 지면을 통해 소개되어 왔다. 이런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현장미술가 최병수, 건축가 류춘수, 미술가 정종미, 세필화가 김홍주, 화가 임영선, 벽화예술가 서용, 설치미술가 임옥상, 조각가 노주환 등이 「불광」의 지면을 통해 끊임없이 소개되고 있다.
 

Part 3
「불광」의 정신, 당대의 큰스님들이 사랑한 포교지

「불광」의 지난 40년을 뒤적이다보면 한국불교의 근현대사를 이끌었던 큰스님들의 이름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 시작은 창간호부터다. 한국 선문禪門에서 보기 드물게 선교禪敎에 두루 정통한 선지식으로 손꼽히는 서옹 스님은 「불광」의 축사를 써주며 「불광」의 도전을 응원했다. 당시는 서옹 스님이 조계종 5대 종정으로 추앙받던 시절이다. 스님은 창간사에서 “오늘의 시대와 우리 조국의 현실을 반야광명으로 바로 비춰 우리의 정신적 위치를 정리하고 조국의 번영과 개인의 성공과 행복의 길을 제시할 길잡이임을 믿는다.”라고 밝혔다.

서옹 스님에 앞서 조계종 종정의 소임을 다했던 고암 스님도 칼럼을 통해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은 「불광」에 힘을 실어주었다. 고암 스님은 ‘깨끗하고 온화한 자비보살’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선지식이다. 스님은 1974년 12월호(통권 2호)의 첫머리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마음이 불심佛心임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오늘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이겨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광」에 참여했던 선지식 중에는 경봉 스님도 있었다. 영축총림 통도사의 수행가풍을 바로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 경봉 스님의 법문은 ‘겁외가劫外歌’라는 제목으로 수회에 걸쳐 연재됐다. 경봉 스님의 법문은 「불광」 최초의 연재 중 하나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의 소임을 끝낸 후 서울 칠보사에서 주석하고 있던 석주 스님도 「불광」 초기부터 연재에 참여했다. 석주 스님은 수년에 걸쳐 오조 홍인 대사의 선사상을 ‘선전촬요연의禪典撮要演義’에 담아 풀어냈다. 또 1992년 11월호(통권 217호)에서는 창간 18주년을 기념해 ‘(「불광」은) 내 다정한 도반’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만큼 「불광」에 대한 스님의 애정은 깊었다.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율사 일타 스님도 「불광」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일타 스님과 광덕 스님은 1960년대부터 청맥회 활동을 함께 하며 도반의 정을 나눴던 사이. 그만큼 광덕 스님과 가까웠던 일타 스님은 1975년 1월호(통권 3호)부터 시작된 ‘불광의 성좌들’ 연재의 첫 단추를 손수 끼워주었다. 이후 1980년 1월호(통권 63호)에서는 ‘한국불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연중 특별기획의 선두로 등장해 한국불교 교단 안팎을 총체적으로 진단하기도 했다.

현대 선불교의 기둥이자 한국불교의 얼굴인 ‘성철 스님’도 「불광」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성철 스님과 광덕 스님은 동산 스님을 은사로 둔 사형사제지간이다. 성철 스님은 1984년부터 1년 7개월 동안 ‘해탈에 이르는 길’을 주제로 지상법문을 연재해 많은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바 있다.

이외에도 월정사 조실 탄허 스님은 화엄경의 세계를 알기 쉽게 풀어주기도 했고, 역경사업의 선구자인 운허 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에 대해 친절히 알려주는 칼럼을 썼다. 광덕 스님의 청맥회 도반이기도 했던 숭산 스님은 해외포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는 칼럼을 쓰고, 1994년 창간 20주년 기념 대담에서 상좌인 무심 스님과 함께 해외포교의 현황과 전망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파란만장했던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불교를 이끌었던 큰스님들도 「불광」과 숱한 인연을 맺었다. 직지사 회주 녹원 스님과 쌍계총림 방장 고산 스님 등은 「불광」의 초기부터 참여하고 있으며 2012년 입적한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이사장 지관 스님 역시 1976년부터 다양한 경전의 세계를 소개하는 등 「불광」을 통해 뛰어난 학자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지구촌공생회 이사장 월주 스님은 수시로 「불광」을 통해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과 종단체계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Part 4
「불광」의 땀방울,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킨 특집들

「불광」의 특집은 「불광」이 더욱 특별할 수 있었던 뼈대였다. 초창기 「불광」에 실린 특집들은 시기별로 기획된 주제들이 많았다. 하지만 크게 분류해보면 주로 한국불교에 대한 진단과 제안 혹은 불교의 사상을 알기 쉽게 풀어주거나 불자가 불자답게 사는 방법 등의 내용이 주류를 이뤘다. ‘오늘의 포교를 점검한다’, ‘현대 사회의 우리들, 어떻게 신행할 것인가’, ‘보살은 이와 같이 교화한다’, ‘승가교육’, ‘불교의 청소년 교화’, ‘전통 속의 불교를 점검한다’, ‘출가 그 영원한 자유의 길’, ‘한용운 사상의 원천’, ‘나는 누구인가’, ‘불교의 구세호국사상’, ‘한국불교 무엇을 할 것인가’ 시리즈 등이 그런 기조 속에서 만들어진 특집들이다.

이와는 별도로 불교의 신앙과 경전을 깊이 공부하기 위해 진행된 학구적 성격의 특별기획도 초기 「불광」의 성격을 보여주는 코너다. ‘미륵신앙’, ‘보현보살의 신앙’, ‘약사여래의 신앙’, ‘현대와 보살도’ 등은 불교의 신앙 및 관련 신행에 대한 종합적인 현황을 담아냈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된 경전의 세계 시리즈는 7년 동안 68회에 걸쳐 진행된 장기 기획물이다. 『화엄경』부터 『정토경』까지 주요한 경전 45가지에 대한 내용과 사상, 신행법 등이 이 기획의 구성이었다.

1994년 창간 20주년을 맞아 기획된 ‘불교 내일을 위한 제언’ 시리즈는 불교의 전법과 관련된 현실을 다방면으로 점검하기 위한 특집이었다. 이 기획에서는 어린이 포교, 청소년 전법,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는 방식, 불교청년 운동, 불교 경전의 대중화를 위한 방안, 군포교, 불교 언론, 불서 등을 종합적으로 다뤘다.

사회적인 이슈를 불교계가 어떻게 수용하고 그 속에서 역할을 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한 특집들도 많았다. ‘통일의 길’, ‘장묘제도’, ‘사회복지’, ‘불교계의 전산화’, ‘불교의 태아관과 임신중절, 중절아 천도’ 등의 기획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바라밀 운동과 생노병사를 다룬 해도 있었다. 1997년이다. 이 해에는 보시바라밀을 시작으로 오계, 인욕, 정진, 반야바라밀과 함께 생노병사의 의미 등을 종합적으로 다뤘다. 수행하는 불자를 양성하기 위한 연속기획 ‘수행합시다’는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와 종류별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며 일상 속 신행생활을 독려한 특집이었다.

2000년대에 「불광」이 다뤘던 특집은 이전에 비해 좀 더 사회적인 주제가 많아졌다. ‘한반도 대운하, 희망인가! 재앙인가!’, ‘티베트 독립운동과 베이징 올림픽’, ‘식량 위기와 흔들리는 식탁’, ‘경제 성장과 인간다운 삶’, ‘자살과 생명의 소중함’ 등의 특집은 시의성을 살려 해당 이슈에 대한 내용과 이에 대한 불교의 역할을 모색하는 데 집중했던 기획이다. 물론 ‘불자들의 뇌가 더 행복하다’, ‘불교와 심리학의 만남’과 같이 불교의 새로운 매력을 전하는 특집들도 꽤 많이 만들어졌다.

그런가하면 2010년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좀 더 문화적인 트렌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커피 vs 차, 당신의 선택은?’, ‘불교, 경제를 만나다’,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역사적인 만남, 그리고 소통’ 등의 특집들이 그랬다. 대대적인 리뉴얼이 이루어지고 난 후인 2013년에는 전통문화, 소셜문화, 운동, 귀농귀촌, 단식, 협동조합 등 이 시대의 트렌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불교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기획을 담기도 했다.
 

Part 5
「불광」의 언어, 사부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콘텐츠들

「불광」의 콘텐츠는 초기부터 대중들의 관심을 잡아끌었다. 창간호부터 ‘심령연구-인간은 죽으면 그만인가’, ‘성공자의 자기 관리법’과 같이 현대인들에게 필요하거나 관심을 가질 법한 콘텐츠들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불교인의 산아조절론’, ‘현대사조와 선의 세계’, ‘종교와 정치사상’, ‘현대서구문학에 나타난 불교사상’, ‘번영의 원리’ 등이 모두 1974~1975년에 등장한 칼럼이나 코너의 제목들이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 「불광」은 불교의 눈으로 세상을 톺아보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지금 돌아보아도 놀라울 만큼 대담한 학문간 교류가 이뤄졌고, 불교와 물리학, 수학에 담겨있는 철학의 깊이로 돌아보는 불교, 불교적 경제관, 영문학에서 찾은 불교적 사상과 같은 이종교류가 빈번하게 실험되며 지적 갈증에 목말라하던 지식층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한국불교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 역시 「불광」의 주요 관심사였다. 「불광」은 ‘현대사회에 불교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자주 던졌다. 이러한 화두를 좇아 ‘한국불교의 당면 과제’, ‘한국불교의 교단 형태론’, ‘불교 종단의 전통과 문제점’, ‘불교문화의 현황과 관리방법’, ‘불교 평신도 운동의 문제점’, ‘불교와 현대의 제문제’ 등의 기획을 만들어갔다. 한국불교의 현재를 진단하고 군포교, 어린이·청소년 포교 관련 기획물을 만들어 포교종책 전반에 걸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등의 역할도 「불광」의 대표적인 발자취 중 하나다.

독특한 「불광」만의 기획들이 많은 화제를 낳았지만, 그중에서도 사부대중들에게 특히 사랑받았던 연재들이 있다. 대표적인 연재가 광덕 스님이 직접 연재를 맡았던 ‘『반야심경』 강의’와 ‘성전 강의실-보현행원품강의’다. 이 연재들은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고, 차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불서의 고전처럼 여겨지고 있다. 해외불교와 관련된 코너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것은 1984년 4월호(통권 114호)부터 연재를 시작한 달라이 라마의 수기 ‘내 겨레 내 나라’다. 달라이 라마의 자전적 이야기를 번역한 이 코너는 세계적인 불교지도자의 삶을 담았다는 측면에서 당시 큰 관심을 받았다. 불교계는 물론, 일반에서도 사찰음식에 대한 인식이 그리 많지 않을 무렵인 1984년, 정산 스님이 연재했던 사찰음식 이야기 ‘산사의 멋 산사의 맛’은 「불광」의 앞서가는 안목을 보여주는 코너다.

1981년 5월호(통권 79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달공거사’는 「불광」 최초의 연재만화다. ‘심술통’, ‘파이팅 손오공’, ‘철인 캉다우’ 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이정문의 작품으로 장장 13년간 연재되면서 「불광」의 독자층을 한층 더 두텁게 만들어 주었다. 「불광」이 여성에 대한 콘텐츠를 담기 시작한 것은 창간 직후부터다. 그중에서도 동봉 스님이 연재한 ‘우바이 만세 여성 불자 만세’는 여성독자를 겨냥한 대표적인 코너다. 스님은 이 연재를 통해 역사 속 대표적인 여성 불자들의 이야기를 재밌게 엮어내 여성 독자들의 열독률을 높였다.

「불광」의 40년 역사를 통틀어 문화적인 성격이 가장 강화된 것은 2012년 전면 리뉴얼을 단행한 이후다. 이때부터 기자들의 취재가 많아지고 이미지를 강조한 코너들이 대폭 늘어났다.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세계, 그 속에 녹아든 불교적 색채를 찾아보는 ‘Art&Heart’와 문화재 장인들의 삶을 다룬 ‘명장의 고집불통佛通’은 화려한 사진과 디자인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수행의 현장을 찾아가는 ‘선불장을 찾아서’, ‘수행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비구니 강원의 일상을 담아낸 ‘강원일기’는 진광 스님의 여유로운 문체와 강원 스님들의 일상 사진들이 잘 조화를 이뤄 독자들의 호응도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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