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도 생명이 있다. 「불광」을 창간하신 광덕 큰스님이 굳건한 뼈대이고 매달 잡지를 알차게 만들어내는 제작진의 노력을 튼실한 근육에 비유한다면, 독자는 잡지를 살아있게 하는 심장이다. 독자가 있어 비로소 잡지는 생명을 갖는다. 「불광」 40년의 세월 속에는 어떤 독자들의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35년 전, 누군가의 전법행으로 「불광」을 받아보기 시작한 이후 신심 깊은 불자로 평생을 살며 「불광」 법보시로 전법을 실천해온 이형 독자, 무명으로 인해 고통 받고 죗값을 치르는 고단한 삶에 도반이 보내주는 「불광」이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는 한재업 독자, SNS에서 다시 만난 추억 속의 「불광」, 그리고 새로운 「불광」에 대한 소감을 함께 들려주는 임대진 독자. 그들의 이야기가 있어 창간 40주년 특집호가 더욱 뜻 깊다.
Essay 1
나에게 「불광」을 보내준 인연, 내가 「불광」을 전하는 사연
글. 이형((주)건설교통저널 대표이사)
1979년 초여름 어느 날, 발송인 표시도 없는 낯선 조그만 책 한 권이 나의 직장 사무실로 배달되었다. 책이름은 ‘佛光’. 불교를 잘 모르고 있을 때였지만 호감이 가는 책이었다. 누가 보냈을까 궁금해 하면서도 무위로 두 달을 보냈다. 세 번째 책을 받고나서야 출판사에 전화하여 발송인을 추적한 바, 인근 건물에 근무하던 관음행이란 법명을 가진 아가씨였다. 그쪽 사무실은 업무상 종종 들르곤 했는데 그때 나를 유심히 보고 있다가 전법의 대상으로 꼭 찍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의 안내로 그해 가을 불광법회를 알게 되고 불광회원이 되었다.
법회를 다니면서 나는 「불광」의 정기구독자가 되었고, 틈틈이 쉬운 부분부터 읽으면서 조금씩 신행심을 키워 나갔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연재되었던 ‘직장인의 불교신앙’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외 구도문답, 교리강좌, 각종 경전(승만경, 화엄경 등)들의 현대적 해설, 신행수기, 세상사는 이야기 등 주옥같은 글들이 조그만 책자에 가득 차있었다.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친근하면서도 갖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순수한 신행전법지였다. 「불광」 하면 ‘창조적 생활인을 위한 교양지’로서 또 전법포교지로서 이만한 것이 없다는 태산 같은 자부심이 충천했던 것이다.
당시 불광법회는 대각사에서 광덕 큰스님께서 설하는 마하반야바라밀의 ‘대지혜’ 법문과 ‘보현행원’이란 실천 덕목으로 한국불교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 역시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가르침에 매료되어 이런 사상과 법을 전하는 「불광」을 기회 될 때마다 나누어 주는 등 전법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한 권의 불서는 한 사람의 법사와 같다”는 큰스님 말씀을 따라 군부대나 교도소 등에 ‘불광 보내기 운동’을 벌여 많은 분들이 동참하였고, 나 또한 정기구독과 함께 매월 1권 이상 「불광」을 법보시하겠다는 다짐을 하였고 여태껏 실행하여 왔다.
2008년, 불광사 회장단의 일원으로 새 법당의 중창불사를 위해 모연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무렵, 만불 모연에 동참한 분에게는 일정기간 「불광」을 무료보시하는 방안을 사찰임원회의에서 발의 결정하게 하였다. 불사에 동참한 이들이 「불광」을 받아보며 부처님과 더 큰 인연을 맺고 또 다른 전법행으로 이어가길 바라는 간절한 기원으로 지금까지도 「불광」 보시는 계속되고 있다.
문서포교의 새 지평을 개척한 「불광」이 창간된 지 40년이 흘렀다. 그간 많은 어려움과 엄청난 사회변화가 있었지만, 「불광」은 반야 사상으로 사회와 역사를 밝히고자 하는 불광 정신을 올곧게 이어 왔고, 이 저력으로 오늘날 불교 잡지로서는 보기 드물게 40년 동안 한호도 빠지지 않고 발간되는 위업을 달성한 것에 진심어린 축하와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다가올 40년, 아니 그 이후를 준비하며 더욱 번영 발전하기를 기원하면서 한마디 덧붙인다면, 단순한 볼거리, 읽을거리를 전하는 평범한 불교 잡지가 되지 말고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신행전법지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주기를 기대한다.
Essay 2
수행자의 삶을 선물한 「불광」
글. 한재업(前 도로교통공단 경영지원본부장)
2012년 초여름, 수원 아주대병원 응급실이었습니다. 꿈길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저를 흰 말에 태워서 한없이 넓은 초원에 오색의 잉어들이 있는 아주 맑은 개울을 건너게 해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저에게 얼른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후 왔던 길을 되돌아 가셨는데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다가 눈을 뜨니 곁에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서있고 저는 병원침대에 링거를 주렁주렁 달고 누워있었습니다.
저의 기척에 아내가 “나 알아보겠어요? 당신 왜 이렇게 못난 짓 했어요, 진작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하면서 저를 안아주었습니다. 순간, ‘내가 살아있는 건가? 분명히 수면제를 먹고 자동차 안에서 착화탄에 불을 붙여 자살했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하는 생각과 함께 살아있음에 심한 회의가 느껴졌습니다. 다시 자살을 시도할 우려가 있어 정신과 폐쇄 병동으로 옮겨 두 달 동안 치료를 받은 후 아내와 변호사, 친구, 도반의 권유로 경찰서에 자수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승진 대가로 돈을 받은 뇌물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영월교도소로 이감되어 지낸 지가 어언 1년이 지났습니다.
영월교도소에는 전에 알고 지내던 前 경찰청장, 대학 총장들, 차관과 청와대 비서관들이 있었는데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어 일부러 외면하고 피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잘못이라도 진심으로 참회하고 매일 일심일념으로 108배 정진을 한다면 부처님께서 불연을 끊지 않으시고 가피를 내려주신다는 도반의 정성어린 권유에 따라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으며 이제는 아상을 버리고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지난해부터 도반이 매달 보내주는 「불광」을 참양식으로 삼아, 관세음보살님 손잡고 부처님 곁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불광」은 표지부터 맨 뒷장까지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읽은 후 교도소 내 불교방에 기증하여 불자들이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생활이 어려운 이곳의 불자들이 서가에 꽂아두기가 무섭게 가지고 가서 부처님 세상의 소식들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활해서인지 우울증 약도 끊고, 어느 순간부터 관세음보살님이 저의 보증인이 되어 주시고, 아내와 가족들도 저를 더 사랑해주고 있습니다. 월남전 참전 동기와 도반이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어, 삶의 모순에 순응하며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12인조 밴드인 동강희망나눔봉사단에서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메인보컬로 재능기부도 하면서 잘 지냅니다.
꾸준히 「불광」을 보내어 이순이 훌쩍 지난 황혼의 삶, 그것도 교도소 수용자로서의 삶을 수용자가 아닌 수행자로서의 고귀한 삶으로 정리해 나갈 수 있도록 묵묵히 도와주는 나의 도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마움에 두 손 모으며 부끄러운 글 줄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ssay 3
불광 키드kid의 추억
글. 임대진(코오롱패션머티리얼(주) 해외영업부 대리)
한 달 전, 즐겨 사용하는 SNS에서 반가운 이름을 접하게 되었다. “You may know 월간불광(페이스북의 친구 추천 알림.)” 찰나의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 집으로 배달되던 ‘불광’이라는 이름의 표지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우편함을 열면 친숙한 재질의 봉투에 담겨 나를 맞이하곤 했던 「불광」. 그립고 보고 싶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된 듯, 20년도 넘은 추억들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내가 「불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매주 일요일 빼놓지 않고 들르던 불광사를 통해서였다.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의식과 기억을 가지기 시작한 나이부터 일요일이면 빠짐없이 불광법회에 참석했다는 기억은 또렷하다. 불광사 앞에는 작은 출판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의 불광출판사이다. 부모님께서는 1년에 한 번씩 「불광」을 정기구독하기 위해 출판사 사무실에 직접 들르셨고, 나는 1층의 불교용품점에서 목탁을 만져보거나 이것저것 구경하며 부모님을 기다렸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부모님과 떨어져 ‘연꽃어린이법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절에 갔으며, 방학 때마다 어린이캠프(수련회)에 참석하여 사찰예절도 익히고 1,080배와 같이 강도 높은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연꽃어린이들의 활동은 매년 「불광」에 실리곤 했는데 혹여 내 모습이 찍히지 않았나, 가슴 졸이며 책장을 펼치던 기억이 있다.
특히 매년 부처님 오신 날에는 제등행렬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선보였는데, 나는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이 경험은 후에 미국 유학시절 학교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인학생들을 모아 사물놀이 공연을 펼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나는 학교로부터 ‘Tuition Waiver(일부 학비면제/일종의 장학금)’라는 큰 선물을 받기도 했다. 지금도 특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물놀이”라고 답을 한다. 그 당시 제등행렬 화보에서 내 얼굴을 찾아내고는 가슴벅차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기억이 희미한 유아기부터 사춘기를 지나는 고등학생 시절까지 족히 10년은 넘는 기간 동안 내 옆에는 항상 「불광」이 있었다.
다시 만난 「불광」은 멋지게 변해 있었다. 더 커지고 두꺼워져 불교계 전반의 많은 소식을 전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디자인은 일반잡지에 비해도 손색없을 만큼 깔끔하고 예뻤다. 기사와 글들은 아직도 그 높은 기품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불광」은 30대 중반의 나에게 다시금 정기구독의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불광」의 40년 역사 속에는 분명 나와 같은 수많은 ‘불광 키드’들이 있을 것이다. 부모님을 통해 「불광」에 인연 맺은 모든 2세대들 말이다. 이들에게 ‘불광’이라는 두 글자는 불교와의 인연을 심는 씨앗인 동시에, 오랜 추억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느덧 불광출판사는 불교관련 베스트셀러들을 출판해내는 메이저 출판사로 성장했으며, 「불광」 역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불교전문잡지가 되었다. 나, 그리고 수많은 불광 키드의 추억이 깃든 「불광」. 앞으로도 다음 세대에 대물림할, 살아있는 잡지로 남았으면 한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