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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처럼 쏟아지는 사리 구슬
경국사(서울 정릉) 팔상탱 <쌍림열반상> 사리 분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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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사에 찾아온 붉은 가을.
내 무덤에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에 없소.
나는 거기에 잠들지 않았다오.
나는 불어대는 천 갈래의 바람이요.
나는 하얀 눈 위에 흩뿌려진 금강석 반짝임이요.
나는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살이요.
나는 조용히 내리는 가을비요.
당신이 아침 고요 속에 눈을 뜰 때,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며 가볍게 날아오르는 새요.
밤하늘에 빛나는 부드러운 별빛이요.
내 무덤에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에 없소.
나는 죽지 않았다오.
- 어느 아메리칸 인디언의 詩
이 시詩의 화자話者는, 죽은 영혼이다. 죽어서 내려다보니, 글쎄 자신의 무덤에 와서 너무나 슬프게 울부짖는 이가 있지 않은가. 내가 사라진 것이 애타고 그리워 넋 놓고 울고 있는 그에게, 영혼은 따듯한 말을 건넨다. ‘나는 사라지지 않았어. 여기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있는 걸. 단지 모습을 바꾸어 네가 보지 못할 뿐이야. 가벼운 바람이 되어 방금 네 뺨도 어루만졌는 걸. 그러니 거기서 울지마. 난 이미 거기에 없어. 나의 상념에 머물지 마.’라고.
| 8곡 4두의 오색 사리가 비처럼 쏟아지다
석가모니 일대기를 8폭의 그림으로 그린 팔상탱八相幀의 마지막 장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장면 <쌍림열반상>이다. 석가세존이 입적하자, 도솔천에 있던 어머니 마야부인이 몸소 내려오신다. 엄마와 아들이라는 진한 인연. 아들의 죽음 앞에서 천상에 있던 엄마는 속절없이 달려와 비통해 한다. 세존은 자신의 관(금관)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엄마를 보고, 지금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한다. 금관에서 다시 몸을 나타낸 부처님. 그 몸에서는 오색 광명이 뿜어져 나오고 그 찬란한 빛 속에는 무수한 화불化佛들이 마치 영롱한 구슬처럼 분화하고 있었다.
(마야부인이 석가모니 죽음에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슬퍼 어찌할 바 모르거늘) 세존이 신통력을 일으키니 금관의 뚜껑이 열리고 부처님이 일어나시어 백천 광명을 놓으시니 광명마다 백천의 화불이 나타나 부인을 위로하되 “세간의 모든 일이 일체가 무상無常하오니, 법法이 그러하오니, 너무 애통해 마소서.”
“나는 세연世緣이 다하였고 할 일도 마쳤으니, 어머니께서는 마음을 편히 가지시고 근심치 마옵소서.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인연 화합으로 실성實性이 없으니 제행무상諸行無常합니다. 이것이 생멸법生滅法이니 생멸이 없어지면(生滅滅己) 적멸이 낙이 되는(寂滅爲樂) 것입니다.”
- 대반열반경
석가세존은 본래 ‘법신法身’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죽음이란 그저 세상의 인연이 다한 것일 뿐’이라며, 그것이 ‘법法이다!’ 즉 ‘자연스러운 이치’라며 슬퍼하고 근심할 것 하나 없다고 말씀하신다. 팔상탱에서는 무수한 화불(또는 불성佛性)로 석가세존이 몸을 변화하는 장면이 총 세 군데 나온다. 첫 번째는 깨달음의 장면이다. 석가모니 정각正覺의 장면 <수하항마상>에서는 정수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거기에서 무수한 화불이 퍼져 나온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석가모니 첫 설법의 장면 <녹원전법상>에서다. 설법을 하는 동시에 세존의 몸은 보살(노사나불)의 형태로 변화하고 오색찬란한 빛과 함께 무수한 화불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부처님 열반에 드시는 장면 <쌍림열반상>에 있다. 다비 전에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몸을 보이실 때(불모상견佛母相見 장면)다. 그리고 다비 후에 마치 폭우와도 같이 분출한 사리 구슬의 모습에서, 대승불교의 핵심인 ‘불신상주佛身常住’ 사상은 그 극치를 달한다. 부처님 세계의 진신眞身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육신이라는 현상이 걷히고, 우리는 순간 법계를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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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첫 설법의 장면 <녹원전법상>. 설법을 하는 동시에 석가세존의 몸은 보살(노사나불)의 형태로 변화하고, 오색찬란한 빛과 함께 무수한 화불로 몸을 나투신다.
| 무수하게 번파·파도치는 법계의 입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사리가 ‘8곡 4두’ 가 쏟아져 나왔다고 열반경에는 전한다. ‘여덟 섬 너 말’이라니. 그런데 8곡 4두라하면, 요즘 기준으로 하자면, 쌀가마니 ‘열여섯 푸대’ 만큼의 분량이다. 8곡 4두, 물론 이는 상징적 숫자이겠다. 불교에서 ‘8과 4’는 무한한 수를 가리킨다. 불교의 범주 내에서의 ‘팔만八萬’은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약자’이다. ‘8만 4천 번뇌’는 중생의 무수한 번뇌를 의미하고, 또 ‘8만 4천 법문’은 ‘불교 일대의 교법을 총칭하고, 이는 법문이 무량함을 뜻하는 것이지 실제의 숫자가 아니다.’라고 선학대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열반’이라는 마지막 장엄, ‘육신의 죽음’이라는 가장 큰 변화를 맞는 순간, 이 순간은 왜 이렇게 표현되는가? 이러한 표현 속에 속계와 법계, 그 ‘경계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분출하는 사리’라는 표현 속에 담긴 법계의 실상을 알아보기로 하자.
<쌍림열반상>에는 석가모니의 열반을 전후하여 펼쳐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그려져 있다. 사라쌍수 아래에서의 열반, 제자들의 울부짖는 모습, 관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심, 뒤늦게 달려온 제자 가섭을 위해 관 밖으로 발을 보이심, 불붙지 않는 관, 저절로 타기 시작한 금강삼매의 불, 사리의 분출과 분배 장면들이 한 화폭에 어우러져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특히 눈에 두드러지게 강조된 장면이 바로 ‘사리 분출’ 장면이다. 그림 표현을 따라가 보자. 제자들이 석가모니의 시신이 든 관에 불을 붙이려 하나 불은 붙지 않는다. → 삼매의 불로 관이 저절로 타오르자 여래의 색신에서 오색사리가 분출한다. → 알알이 영롱한 보주 모양의 엄청난 양의 사리는 폭우 쏟아지듯 퍼붓는다. → 다비식에 모여든 제자들은 각자 둥근 쟁반을 받쳐 들고 사리를 받는 데 여념이 없다. 온 천지에 사리의 비가 내리는 것이다. → 쏟아진 사리 구슬은 커다란 상자에 가득 담겼고, 사리에서는 오색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 주변에는 사리에 경배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사리가 분배된다. ‘부처님 열반에 드신 후 7일이 지나자, 사리 8곡 4두는 우바길이라는 지혜로운 대신에 의해 삼등분되었다. 천계에 일분, 용궁에 일분, 그리고 속세에 일분되었다. 이로 인해 각기 탑을 일으키게 되어 그 빛이 온 법계를 비추었다佛滅度後舍利八斛四斗有智臣優婆吉分作爲三一分送天一分在龍宮一分在世間各起塔光明遍照法界’.
팔상탱의 8폭 중에 4폭(설산수도상·수하항마상·녹원전법상·쌍림열반상)이 한 패널에 그려져 있다
| 다투, 다르마-다투 : 법신의 존재 방식
사리舍利는 범어 śarīra에서 왔는데 본래 그 뜻은 신身, 신골身骨의 몸체라는 뜻이었다가 시신 또는 유골을 뜻하게 되었다. 이는 다시 화장火葬 전의 전신사리全身舍利와 화장 후의 쇄신사리碎身舍利로 나뉜다. 보통 ‘사리’라 하면 다비한 후에 남는 수정 구슬 같은 결정을 지칭하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다투(dhātu, 碎身舍利)’에 해당하겠다. ‘dhātu’는 ‘요소要素’, 특정 무엇을 형성하는 ‘근본 요소’ 또는 ‘구성 요소’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체의 구성요소 또는 성분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에 해당하는 한자 번역어로는 근본 성질을 나타내는 성性, 근성根性, 계界, 층層 등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 따라 해석하면, 석가모니의 육신은 그 ‘근본 성질’로 ‘근본 요소’로 돌아간 것이다. 신체는 다시 그것을 구성하던 다투, ‘근본 성분’으로 돌아간 것이다. 혹자는 ‘성품자리’를 본다는 것은 ‘본래의 재료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래의 입자로 이루어진 본질의 세계를 우리는 다르마-다투(Dharma-dhātu 法界)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겠다.
사리의 분출에 대한 이해를 하기 위해 우리는 법계를 넘나들지 않으면 안 된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인연에 의한 가상’일 뿐이고, 보다 근본적인 실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법계’라는 사실. 이것이 진짜이고 저것이 가상이라 생각했던 것이 실상 반대임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고되고도 길었던 전도몽상의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절대적인 실체라고 철석 같이 믿었던 이 육체가 한낱 변화무쌍한 법성法性의 여정 속의 가변적 존재임을, 석가모니는 그의 마지막 여정에서 몸소 보여주시고 있는 것이다. 육신이라는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팔상탱 안에는 그 답이 제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