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나선다. 길을 떠난다. 닫혀있다는 느낌, 어둡다는 생각이 문을 만들고 길을 낸다. 그리고 문을 열고 길을 나서게 한다. 그러나 문을 나서는 순간 또 다른 문이 나를 가두니 그 문을 열지 않을 수 없다. 다시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 기대가 줄지 않는다. 창창하다. 언젠가 문을 나서면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 마음이 완전히 열려, 문이 없는 길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강가의 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시원始原을 떠올리게 된다. 이 강물은 어디서 발원發源하여 어디를 거쳐 어느 곳으로 흘러가는가? 이러한 생각은 단순히 지리학적 호기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 존재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무리 없이 이어진다. 은빛 히말라야에서 시작되어 흐르는 강을 보면 이러한 사유의 폭은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안나푸르나는 동쪽으로 마르샹디marsyangdi 강이, 서쪽으로는 칼리간다키kaligandaki 강이 남쪽을 향하여 유려하게 흐른다. 그 흐름을 따라 수많은 삶터와 종교적인 수행터가 자리하고 있고 문을 찾고 길을 묻는 사람들을 모이게 한다.
완성도 높은 유적이나 문자에 의해서 알려진 역사는 물론, 추상적인 상상력으로 복원할 수밖에 없는 오래된 인간의 미세한 흔적도 강줄기와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삶터를 연결하는 길의 곡직曲直은 강물의 길과 닮은꼴일 수밖에 없다.
티베트에 있는 강린포체(수미산)를 중심으로 동서로 공히 2,900㎞를 달려 서로는 인더스강이 되어 아라비아해로 잠기고 동으로는 얄룽창포, 부라마푸트라강이 되어 벵갈만으로 스미는 두 개의 거대한 흐름, 그 사이사이에 또 수많은 지류들이 모여 강과 내를 이루며 역사와 문명을 태동시켰다. 히말라야를 흐르는 모든 강물은 한 점 흰 눈들이 모여 쌓인 만년설이 녹아 형성되니 그 발원은 한 점 흰 눈이고 한 빛 흰 빛이다. 이 흰 한 점이 흐르는 길을 따라 히말라야 주변의 모든 삶터가 열리고 흐르지 않으면 닫힌다. 한 점에서 천지가 열리고 닫힌다. 엄연儼然하다.
| 흐르는 것인가 흐르지 않는 것인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소리만 들어도 산은 흐르고 강은 흐르지 않는 어떤 점과 조우하게 된다. 단지 쌓이면 산이고 흐르면 강이다. 한 점 흰 빛으로 한 몸이고 보면 물은 흐르지 않고 산이 흐른다는 관觀이 자연스레 열린다. 문 하나를 통과한다.
히말라야에서 강은 나디nadi로 표기된다. 나디는 인체로 말하면 생명에너지의 통로다. 히말라야에서 시작된 문명은 인체 가운데 나디의 원점을 가장 밑바닥에 두었다. 원시의 에너지, 즉 꾼달리니가 잠들어 있는 곳, 생명에너지의 저장고인 제1 챠크라(그들은 인체에 일곱 개의 챠크라를 설정했다.)는 두 다리를 통해 받아들인 에너지가 처음 만나는 척추기부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인지했다. 그리고 꾼달리니를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가naga, 즉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 했고 꾼달리니가 각성되는 모습을 뱀이 또아리를 풀고 움직이는 나선형으로 표기했다.
척추기부 천골 신경총에 해당하는 제1 물라드하라 챠크라(mūlādhāra cakra)는 나디를 통해 흐르기 이전의 모습이다. 녹아 흘러내리기 이전의 만년설의 상태다. 형상은 사각형이고 지수화풍 사대 가운데 가장 단단한 지地에 해당된다. 단단한 성질의 땅이 녹아 흘러 고이는 곳, 제2 스와드히스타나 챠크라(svādhistāna cakra)는 단전丹田에 해당되고 사대 가운데 수水라고 인식했다. 아래서 위로 흐르는 물, 한 점 흰 눈이 녹아 비로소 강이 시작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제3 마니뿌라 챠크라(manipūra cakra)는 화火의 성질을 가지고 복부에, 제4 아나하타 챠크라(anāhata cakra)는 풍風으로 가슴에, 제5 비슛드하 챠크라(viśuddha cakra)는 공空성을 지닌, 허공과 소통하는 목에 있다고 생각했다.
강과 어원을 같이하는 인체의 나디nadi는 아래서 위로 흐르는 수많은 길을 일컬음이다. 제6 아갸 챠크라(ājῇᾱ cakra)는 수많은 지류들이 모여 강이 되듯 나디를 통해 상승하는 모든 에너지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꾼달리니의 변화에 따라 의식이 진공眞空에서 묘유妙有로 전환되는 상태다.
그리고 진정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합일이 제7 사하스라라 챠크라(sahasrᾱra cakra)의 모습이다. 완전한 각성의 상태, 그들은 이것을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경지라고 감각하고 지각했다. 이제 꾼달리니는 다시 제1 챠크라로 내려온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 나는 산이고 물이고 바람이고 불이고 허공이다
걷는 동안 내 몸을 적시고 있는 습한 요소들은 허공의 나디nadi를 통해 기화氣化되어 구름이 되고 눈이 되어 히말라야 한 점으로 자리할 것이다. 땀방울이, 눈물이,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의 성분은 히말라야가 되고 녹아 강물이 되고 그 강가에 사는 누구의 몸이 될 것이다. 다른 사대도 마찬가지다. 꾼달리니가 우주와 하나 되어 다시 제1 챠크라의 자리로 돌아오듯 몸의 사대는 우주의 사대와 하나가 되고 나의 몸은 우주의 몸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시 무수한 몸으로 분화되고 하나 되고…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중도中道의 이치理致가 그냥 드러난다. 생성도 아니고 소멸도 아니고 단절도 아니고 상속도 아니며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라는 이법理法에 대한 풀림, 무문無門인가? 앞을 보니 문이 겹겹이다. 방과 할이 비 오듯 쏟아진다.
안나푸르나 일주를 할 때 동쪽으로 흐르는 마르샹디marsyangdi 강을 거슬러 올라 쏘롱라를 넘은 뒤 칼리간디키kaligandiki 강을 따라 내려오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 코스를 택했다. 역방향으로 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동선을 선택한다.
사실 티베트 불교의 코라방식은 시계방향,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태양이 움직이는 궤적이 동에서 남을 거쳐 서쪽으로 향하기 때문에 자연의 흐름에 순응한다는 의미에서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이다. 이 원칙을 길 위에 세워져 있는 쵸르텐, 마니월 등을 지날 때는 어김없이 지켰다. 그러나 안나푸르나 라운딩을 할 때는 역행의 길을 선택했다. 흐름에 앞 설 때도 있고 함께할 때도 있고 역행할 때도 있으니 마음에 걸어 두지는 않았다.
보통은 일주를 시작할 때 베시사하르besisahar에서 시작하는데 지금은 동쪽 길의 중심도시인 마낭manang까지 차도가 개설되어 현지인들의 생활은 많은 부분 편리해졌지만 걷는 조건은 더 악화되었다. 그래서 걷기에 길상태가 좀 나은 자가트jagat까지 차로 이동해서 하루 묵고 여기서부터 걷기로 계획을 세웠다.
길은 강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걷는 내내 강의 흐름 위에 마음을 실었다. 지류들이 폭포가 되어 강의 본류와 만나 순해지는 풍경이 자주 펼쳐진다. 눈길이 길게 머문다.
물은 은절구가 되어 절벽을 찧고
水作銀杵舂絶壁
구름은 옥으로 된 자가 되어 청산을 재는구나
雲爲玉尺度靑山 金笠
걷는 동안 부대사傅大士의 “길을 걸으며 물소를 타고 있고, 다리는 흐르는데 물은 흐르지 않네” 이 구절이 강을 함께 거슬러 올랐다.
“나는 청산을 향해 가는데. 녹수綠水 너는 어디서 오느냐” 김삿갓의 싯귀가 청산靑山이 설산雪山으로 바뀌어 함께 맴돌았다. ‘나는 설산을 향해 가는데 녹수 너는…’
잠자리에 들기 전 꾼달리니에 관한 책을 보며 나디nadi에 관한, 강과 인체의 다른 두 개의 흐름에 대한 사유를 놓지 않으려고 했다. 비록 분별식이 주동이 되었지만 서술하지 못한 많은 생각들이 오며 가며 늦게 잠들게 했다. 아침에 일어나 오래전 인도에서 익힌 꾼달리니 명상으로 몸을 정리하고 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그렇게 안나푸르나를 돌았다. 다시 떠나고 싶으니 무문無門은 아직 열리지 않았나 보다. 모든 문이 열리고 마침내 문이 없어질 때 다시 문을 만들어 떠나는 것, 진짜 재밌겠다.
만우 스님
계룡산 갑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강원에서 잠시 수학하고 월간 「해인」 편집위원과 도서관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미황사 부도암 한주로 머물며 히말라야를 여행하고 돌아와 낯선 곳에서 만난 낯익은 삶에 대한 특별한 기록들을 정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