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展 - 길 위에서 길을 찾다 | 지금, 만나러 갑니다 | 예일대학 미술사학과 김연미 교수
산스크리트어로 출가는 프라브라자pravrajya다. 서양에서는 이를 ‘위대한 포기’라고 번역한다. 청년 싯다르타는 출가라는 숭엄한 선택 앞에 단호했다. 싯다르타의 출가정신을 가슴에 품고 학자의 길에 정진해온 사람이 있다. 서른셋에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미국 예일대Yale University 동양미술사 교수가 된 김연미(35) 씨. 미국 미술사 학계에서 한국 불교미술의 지평을 넓히는 일, 그가 선택한 ‘한 길’이다. 경주 어느 천년고탑 아래서 그를 만났다. 훤칠한 용모에 조용한 목소리를 지닌 그가 가만히 탑을 응시할 때면 둘만의 비밀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여름안개가 소나무 숲을 짙푸르게 품어 안고 있었다.
| 한국을 떠나 한국의 불교문화를 전파하다
: 예일대 교수 임용 이후 처음 방한하셔서 지난 7월 11일, 이화여대와 예일대가 공동주최한 일제강점기 한국문화 관련 학술회의에 발표자로 참석하셨는데요, 미국 학계에서 바라보는 한국문화의 현주소는 어떤가요?
이번 이화여대 콘퍼런스는 예일대가 한국학을 주제로 한국 대학과 공동주최한 첫 사례입니다. 최근 서구권에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크게 늘었어요. 지난해 11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신라 특별전을 오픈해서 굉장한 호응을 얻었고, 올해 필라델피아 뮤지엄에서 열린 조선 특별전이 LA카운티 뮤지엄과 휴스턴 뮤지엄으로 연결되며 메가급 순회전시가 연이어 예정돼 있죠. 드라마나 케이팝k-pop 같은 대중문화에서 순수미술, 역사, 전통문화로 한류열풍이 확대되고 있어요. 한국문화에 대한 궁금증에 비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일대만 해도 미술관이 꽤 잘돼 있는데 중국미술 컬렉션이 큰 편이고 한국미술은 규모가 미미해요. 한국문화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지금, 한국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전달할 기회가 더 많아져야 합니다.
: 외조부께서 국립중앙박물관 수석학예관이셨고 충남대 교수, 백제연구소장 등을 역임하며 유물 발굴・조사에 평생을 바치신 고고학자 윤무병 선생이십니다. 대학 입학 때 고고미술사학과를 선택하게 된 데에 외조부님의 영향이 있었나요?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고려 보물선이 발견됐죠. 할아버지께서 발굴단장을 맡아 수만 점의 유물을 건져 올리셨어요. 대학진학 때까지 그런 집안 내력을 잘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저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아이였죠. 예중 진학을 위해 미술학원을 다녔는데 아무런 감정도 안 느껴지는 원통이나 흉상 같은 걸 놓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도통 저와는 맞지 않았어요. 그 뒤 가족 모두 공부를 좋아하는 집안 분위기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좀 싱거운 얘기지만, 예상보다 낮게 나온 수능점수 탓에 고고미술사학과를 선택했어요. 그때 시험을 못 본 게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됐습니다. 아마도 인연이겠지요. 아버지 독일 유학 중에 결혼하신 어머니가 미술사를 공부하길 원하셨는데 제가 태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하신 일도 고고미술사학과에 들어간 뒤 알게 됐어요. 미술사 공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어머니만의 태교였죠. 고3때 어머니가 불교에 입문하셨고 법문 듣고 오신 날이면 저녁식탁에서 조곤조곤 법문을 들려주셨습니다. 미술사학자의 길을 걷게 된 데엔 두 분 모두 보이지 않는 영향을 제게 주신 셈입니다.
| 마음으로 하는 출가였던 까닭에 한 점 후회 없는 이 길
: 서울대에서 동양미술사 석사과정 수료 후 2004년 하버드 유학길에 오르셨는데요, 동양미술사를 공부하러 서양으로 가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동양미술사 공부란 것이 동양에서 하면 깊이 있는 공부가 가능하고, 구체적인 자료로 정확하고 심도 있는 지식을 쌓을 수 있지요. 반면 미국에선 새로운 방법론을 많이 씁니다. 미술작품을 연구하더라도 정치・종교 등 사회 전반적 배경을 연계해 연구하죠. 공예의 경우 조각・건축・회화를 한데 묶어 공부할 수 있고, 동양미술사는 미술과 역사, 불교학을 함께 파고듭니다. 유학을 떠나기 전 미국에 가본 일도 어학연수 경험도 없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라 각오했죠. 막상 닥쳐보니, 오히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미국의 미술사학과 학생들은 동양 문화를 배워 자기 문화를 객관화하려고 노력해요. 관점이 다양해질수록 자기 이해에 도움이 되거든요. 그런 태도를 배운 것도 유학생활의 큰 수확입니다.
: 박사 논문에서 중국 요대 조양북탑을 다루셨고 불교중앙박물관 ‘열반, 궁극의 행복’ 전시에서 관련 주제로 특강을 하실 예정인데요, 조양북탑은 어떤 탑인가요?
요나라는 유목민족이던 거란족이 최초로 정착해 세운 나라예요.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도입해서 많은 사찰과 탑을 조성했죠. 조양북탑에는 연화장세계가 묘사돼 있어 화엄사상으로 정착민을 통합하려 했던 시대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례를 목적으로 하는 제단은 밀교적 특징인데 유목민의 샤머니즘과도 연관이 있어요. 이렇게 사회문화적 배경을 함께 보면 문화재와 고미술작품이 살아있는 유기체로 느껴집니다. 관심을 기울일수록 깊이 알게 되고, 알게 될수록 속정이 든다고 할까요? 감은사 탑에선 삼국통일의 기개와 힘이 느껴져 특히 좋아하고, 내몽골의 경주백탑도 아름답습니다. 해외 현지조사를 다니다 보면 협조받기 어려운 곳이 많습니다. 수장고 유물을 잘 안보여주려 하거든요. 친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3년에 걸쳐 해마다 찾아가 친분을 쌓아 설득한 경우도 있어요. 경주백탑의 유물들이 바로 오랜 기다림과 만남의 주인공입니다.
: 국내 학계에 머무르지 않고 해외로 나가 공부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일은 ‘학자로서의 출가’로 보입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계신가요?
서울대학교 대학원 시절 동아시아 구법승의 발자취를 좇는 프로젝트 팀원으로 인도에 갔어요. 룸비니와 쿠시나가라에서 새벽에 일어나 예배를 드렸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죠. 부처님께서 궁극의 열반에 드시고 장구한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중생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게 왠지 슬프게 느껴졌어요. 그때 스스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세속에 있지만 공부가 곧 수행이란 마음으로 정진하자고. 이후로 제겐 이 길에 한 점 후회도 없어요. 마음으로 하는 출가였던 까닭입니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사가 발전하고 있어요. 스승님들과 선배님들 덕분이죠. 앞으로 해외에 한국 불교미술을 알릴 수 있는 인재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학자의 본질은 꾸준한 연구다. 자신의 연구가 인정받을 때 생의 보람을 느끼는 것이 학자다. 한국을 떠나 한국불교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인 최초 예일대 동양미술사 교수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의 여정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공부를 수행 삼아 떠난 ‘마음으로 하는 출가出家’의 길. 동양미술에 대한 그의 연구와 학자로서의 도전은 지금,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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