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발터 벤야민은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법의 힘(혹은 법의 폭력)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고 정의했다. 법을 만드는 ‘정립적 폭력’과 법을 유지하는 ‘보존적 폭력’이 그것이다. 법 정립적 폭력은 기존의 법을 전복해 새로운 법체계를 정립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고, 법 보존적 폭력은 기존의 법질서를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다. 법은 정립되는 순간 보존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 통치수단으로서의 법, 그 폭력적 세계
법에는 전쟁의 권리가 존재하는데, 이는 법이 타인들의 영토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전쟁 후 치러지는 평화의 의례는 승리한 자가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발터 벤야민은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 이전에 ‘법 정초적 폭력(정초:사물의 기초를 세움)’과 ‘법 파괴적 폭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신화의 니오베 이야기가 법 정초적 폭력에 해당하고, 성경의 고라 무리 말살 이야기가 법 파괴적 폭력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니오베 이야기를 살펴보자. 테바이의 여왕 니오베는 자만심이 대단했다. 그녀에게는 7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있었다. 매년 테바이에서는 아폴로와 아르테미스의 어머니인 레토를 위한 축제가 열렸다. 축제를 보고서 니오베가 화를 냈다.
“이런 어리석은 것들, 나를 숭배해야지 왜 레토를 숭배하느냐? 레토에게는 아들 1명, 딸 1명뿐인데, 내게는 아들 7명과 아름다운 딸 7명이 있다. 축제를 집어치우고 월계관(아폴로의 상징)도 던져버려라!”
백성들이 축제를 중단하자 레토가 아폴로와 아르테미스에게 말했다.
“하찮은 니오베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너희가 신의 위대함을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거라.”
아폴로는 곧 인간세계로 가서 니오베의 아들 7명을 활로 쏘아 죽였다. 테베이의 왕이자 니오베의 남편 암피온은 충격을 받고 자살한다. 이어 아르테미스가 나타나 니오베의 딸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막내딸만 남았을 때 니오베는 하늘을 보고 울부짖는다.
“제발, 어린 딸은 살려주세요.”
그러나 아르테미스는 마지막 화살을 쏴서 마지막 딸의 목숨도 빼앗았다. 충격을 받은 니오베는 그대로 굳어서 돌이 되었다. 신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만으로 니오베는 눈앞에서 자식들을 잃어야 했다.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신 앞에서 니오베가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는 침묵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발터 벤야민은 그리스 신화의 세계 자체가 법 정초적 폭력을 지니고 있다고 봤다.
그런가 하면 발터 벤야민은 성경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야훼 신이 고라의 무리를 심판하는 것을 대표적인 법 파괴적 폭력의 실례라고 주장했다. 야훼 신은 경고도, 위협도 없이 고라의 무리를 말살했기 때문이다. 이때 신은 죄지은 고라의 무리를 죄로부터가 아니라 법으로부터 구제한다. 발터 벤야민의 분류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의 세계는 법 정초적 폭력에, 유대 신의 세계는 법 파괴적 폭력에 해당한다. 발터 벤야민은 법 정초적 폭력을 신화적 폭력으로, 법 파괴적 폭력을 신적 폭력으로 정의했다.
“전자가 법 정립적이라면 후자는 법 파괴적이다. 전자가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후자는 경계를 파괴한다. 전자가 죄를 짓게 만들면서 동시에 속죄시킨다면 후자는 면죄해준다. 전자가 피를 흘리게 만든다면 후자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앗아간다. 따라서 신화적 폭력은 생명체에게 희생을 요구하지만 신적 폭력은 신이 그 희생을 떠맡는다.”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발터 벤야민은 통치하는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법 정립적 폭력을 거부해야 하며 법 보존적 폭력, 곧 통치하는 폭력에 이용되는 통치되는 폭력 또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철학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법 정초적 폭력과 법 파괴적 폭력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단서는 폭력의 희생자를 통치의 대상으로 여기느냐, 정치주체로 여기느냐 하는 것이다.
| 불성을 지닌 일체만물이 법의 주체다
그렇다면 불교의 가르침은 법 정초적 폭력과 법 파괴적 폭력 중 어디에 해당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으면서 그 둘을 초극한다고 볼 수 있다.
니오베가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식들을 잃은 이유는 신의 세계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인도 신화에 입각해 보면 바루나Varuna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바루나는 우주의 법칙과 도덕률을 관장하며 천상계를 다스리는 신이다. 인도 사람들은 바루나에게 기원할 때 미트라의 도움도 함께 청한다. 미트라는 신들의 통치권 가운데 사법권,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관장하는 반면, 바루나는 초자연권, 즉 신과 인간의 관계를 관장한다.
인도 신화에서 카스트 제도를 바르나Varna라고 일컫는 것도 바루나에서 기인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바르나의 다른 말은 다르마Dharma이다. 싯다르타가 스승 비슈바미트라에게 배운 다르마는 도덕적 의무였다. 따라서 성직을 수행하는 브라만, 나라를 다스리는 왕족인 크샤트리아, 상인과 농민인 바이샤, 노예인 수드라로 나뉘는 네 계급도 신성한 의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이 성스러운 율법인 다르마를 부정했다.
싯다르타의 초전법륜 내용은 바로 연기사상이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저것이 사라짐으로써 이것 또한 사라진다’는 가르침을 요체로 한 연기사상은 생멸의 상호관계성을 설한 것이다. 싯다르타는 연기사상을 제시함으로써 미트라의 영역(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법제도)은 물론이고 바루나의 영역(신과 인간의 관계)까지도 일시에 초월한다.
인도사상사에서 싯다르타의 출현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 중 하나는 통치수단으로 전락한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를 부정한 것이다. 실제로 싯다르타는 사람의 신분고하는 계급에 의해 나눠지는 게 아니라 성품에 의해 나눠지는 것이라고 설한 바 있다. 그런 까닭에 필자는 싯다르타 이전의 다르마가 법 정초적이라면, 싯다르타 이후의 다르마(佛法)는 법 파괴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에 내재된 법 파괴성은 선불교에 와서 극대화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실례로 초조 달마에서 2조 혜가로, 2조 혜가에서 3조 승찬으로 이어지는 안심 법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조 혜가 스님이 초조 달마 대사에게 물었다.
“스승이시여, 제 마음을 편케 해주소서.”
달마 대사가 답했다.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제 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2조 혜가 스님도 3조 승찬 스님에게 유사한 법문을 했다. 나병에 걸려서 얼굴이 일그러진 사내가 혜가 스님을 찾아와 법을 구한 이야기다.
“전생의 업으로 나병에 걸렸으니 스님께서 제 죄를 참회하게 해주십시오.”
혜가 스님이 답했다.
“그 죄를 가지고 오너라. 그럼 참회하게 해주마.”
“그 죄를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미 네 죄는 사라졌으니 참회할 것도 없다. 이제부터 불법승 삼보에 귀의해 열심히 수행하도록 하라.”
“스님을 뵙고 승은 알았으나, 불과 법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불인 동시에 법이다. 불법에는 어떤 차별도 없느니라.”
그때에서야 나병환자는 안팎에도 중간에도 죄가 깃들 수 없는 마음의 실체를 깨닫게 됐다.
달마에서 혜가로, 혜가에서 승찬으로 이어지는 안심법문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혜가 스님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마음에서 참된 마음을 봤고, 승찬 스님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죄에서 일체 분별이 없는 불성을 보았다. 이처럼 분별이 없는 불성을 발견하면 죄도 절로 멸하게 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애써 구하지 않아도 구족돼 있는 게 불성인 것이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구원인 반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반면 불교의 해탈은 인간사회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통해 얻은 자비심이 발현됨으로써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 감히 불교의 가르침이야말로 완성된 법 파괴적인 힘이자 주권적인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에서의 법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불성을 지닌 모든 생명체이다.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