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하여
올해도 어김없이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옵니다. 우리 사는 사바세계 축복받은 대지에 각종 꽃보라가 흩날리는 아름다운 사월초파일날, 인도 카필라 국 왕궁에는 큰 경사가 생겼습니다. 정반 왕과 마야 부인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아기왕자가 탄생한 것입니다.
| 영원한 스승이자 진리의 빛으로 오신 님
나라의 풍습에 따라 출산을 앞두고 친정으로 향해 가던 마야 부인이 룸비니 동산에서 잠시 쉬다가 문득 산기産氣를 느끼게 됩니다. 옆에 있던 무우수 나뭇가지를 붙잡는 순간 아기왕자는 마야 부인의 옆구리를 열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옆구리를 열고 나온다 함은 상징적인 의미로서, 당시 인도사회의 지배적인 종교사상에 비춰 크샤트리아에 해당하는 왕족과 무사계급은 범천의 가슴으로부터 나온다는 설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탄생하는 순간 하늘에서는 온갖 꽃비가 휘날려 내리고 모든 산천초목과 생명들이 다 같이 기뻐하였습니다. 심지어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천적 관계의 동물들조차 그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놀았으며, 하늘에 있는 천인天人들조차 감격스런 눈물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묘사로 부처님 오심을 찬탄함은 부처님의 탄생을 인간이나 하늘사람들이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부처님이야말로 세상의 온갖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해주시는 평화와 행복, 사랑의 메신저이기 때문입니다.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하늘에서는 아홉 마리 용이 내려와 청정한 물을 뿜어 왕자의 몸을 씻겨주었습니다. 곧 왕자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내디뎌 걸으며 오른손은 하늘, 왼손은 대지를 가리키며 고고한 목소리로 탄생게를 외칩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높다’라고 풀이되는 이 말은 우리가 천신天神·범천梵天의 피조물이라는 기존의 바라문교 개념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은 모두가 똑같이 존귀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임을 최초로 선포하고 드러낸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가진 존재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 그 어떤 신분이나 서로 다르게 살아가는 것에 관계없이 모두가 절대 평등한 것이라는 선언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기왕자는 이어서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라고 외칩니다. ‘삼계가 모두 고통 속에 헤매니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는 뜻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오게 된 목적을 설한 것입니다. 일체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일체 중생을 병고와 액난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도솔천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셨다는 연유를 드러냈습니다.
이처럼 아기부처님의 탄생은 오직 싯다르타 태자만이 존귀하고 높은 것이 아니라, 억눌리고 소외받았던 모든 사람들 또한 존귀하고 높음을 의미합니다. 무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모든 중생들에게 영원한 스승이자 진리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기부처님 탄생일은 우리 모든 인류와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축제일이요, 생일이라 해도 맞는 말입니다.
| 부처님이 걸으신 49년 동안의 여정을 떠올리며
그동안 우리 불교계는 부처님 오신 날을 찬탄하고 자축하며 크고 작은 연등을 밝혀 어둠의 무명을 밝히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와 같은 노력들이 하나로 모아져 훌륭한 장엄물이 만들어지니,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에게도 사랑받는 연등축제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연등회가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그것을 계기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일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떠올려봅니다. 먼저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보살펴서 안심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필경에는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팔정도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온갖 고통과 번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불자들이 해야 할 일은 부처님이 걸으신 49년 동안의 여정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수봉행信受奉行하는 데 삶의 목적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예전의 부처님 오신 날을 한번 되돌아봅니다. 연등을 만들더라도 지금처럼 연잎을 불교용품점에서 대량으로 구매하여 간단한 공정을 거쳐 뾰족하게 연잎 모양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이에 물을 들인 다음 연잎 크기만큼 잘라내고, 그것을 둥근 빈 병 같은 데다 십여 장을 대고 실로 일정 간격으로 감은 다음 종이를 밀어 올려 골을 만듭니다. 한참 시간이 경과하여 골이 풀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것을 병에서 분리합니다. 그 다음 연잎을 하나씩 떼어내고 다시 한쪽 끝을 말아서 연잎 하나를 제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은 연잎들로 연등 하나를 제작하였으니, 그 공력이 정말로 많이 들어갔습니다.
또 연잎뿐만 아니라 연등 틀도 지금처럼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것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사를 구부려 직접 제작하거나, 대나무를 가늘게 깎아 팔각으로 꺾어 접은 다음에 실로 끝을 묶고 그런 것 여섯 개를 맞추어 하나의 등 틀로 만들었으니 등 틀을 제작하는 데도 여간 정성이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팔각연등에 붙일 속지로는 종이 외에도 얇은 비단을 사용하여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불자들은 등을 만들어 집에도 하나씩 가져다 거실에 걸어두며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사람의 귀천은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 사회는 기술문명이 발전하며 초고속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삶의 질은 떨어지고 빈부의 격차는 커지면서, 고뇌와 번민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는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라면 어느 나라나 겪는 일인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 대한민국은 변화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보니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빈곤감이 더욱 커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화려한 등이나 장엄물도 필요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주변을 돌아보는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복지 사각지대나 열악한 조건 아래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이 빈자일등貧者一燈을 밝히는 마음으로 부처님 오신 날에 참여하여 함께 나눔의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묘책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시골 지역에는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면서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습니다. 외국 출신 주부나 그들의 자녀들에 대해서도 세심한 배려와 관심을 보여준다면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가 한층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부처님은 출가제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신분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최하층 천민 계급도 출가하고자 하면 아무런 조건 없이 평등하게 받아들여 승가의 일원이 되게 하고, 깨달음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동등한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심지어 왕자들의 이발을 해주던 우바리와 거름을 푸는 니이다이까지도 출가하여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람의 귀천은 출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부처님의 개방적이고 차별 없는 사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사성 계급의 차별을 인정하는 인도 사회에서 가히 의식의 혁명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인류 최고의 스승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 우리 불자들은 어렵고 소외된 곳에 관심을 기울여, 빈부격차를 줄이고 사회갈등을 해소하려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팔정도와 육바라밀, 사섭법과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생활화하여 지금 여기 머무는 이 자리마다 불국정토로 가꾸려는 서원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이 모두가 부처님처럼 존중받으며, 하는 일마다 거룩한 불사 모시듯 정성을 다하는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온 누리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광명이 충만한 때, 모든 이들의 행복과 안락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해월 스님
공주 원효사 주지. 원광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불광한의원을 운영하며 많은 이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었다. 대천 스님 문하로 입산, 송광사 천자암 활안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어린이법회, 학생회, 대불련, 청년회, 거사림회, 공주불자연합회, 국립공주병원 법회 지도법사로서 포교 일선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공주경찰서 경승실장, 원효유치원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다음 카페 ‘원효사(http://cafe.daum.net/rhdwndnjsgytk)’를 운영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불음을 전하고 있다.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