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 설킨 마음을 정리하는 공간 절
나는 불자가 아니다. 요즘은 성당조차 나가지 못하고 있지만 집안이 천주교를 믿었고, 나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불교와의 인연, 나 역시 많지는 않지만 그런 인연이 있다.
불교를 말하면 여러 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역시 편안함이다. 항상 절에 가면 일주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나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절 안에 은은하게 흐르는 향냄새,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면 문득 울려 퍼지는 맑은 풍경소리. 나에게 불교는 그런 이미지였다.
그래서 성우라는 직업이 그리 여유 있는 직업이 아님에도 지방 출장을 가면 꼭 짬을 내서 근처의 절에 들려보곤 했다. 한 번씩 산을 오를 기회가 생기면 그곳의 절을 찾았다. 백담사를 그렇게 만났고, 신륵사도 그렇게 만났다. 제주도의 약천사를 찾았을 때는 깜짝 놀랐다. 정말 독특한 분위기의 절이었다. 분명히 주지스님은 미적 감각이 범상치 않은 분이실 거다. 약천사의 독특한 분위기는 그런 미적 감각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해외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홍콩 여행 때 잠시 들려보았던 절은 기억에 많이 남았다. 그곳에서 만난 포대화상의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절을 찾아간 김에 망설임 없이 작은 포대화상을 사오기도 했다. 홍콩의 절들은 우리나라에서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이었지만, 그곳에서도 나름대로의 운치와 편안함이 있었다.
내가 그토록 절을 찾아 다녔던 이유는 내가 나를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30년 전 TBC에서 데뷔한 이후 늘 나의 일상은 시계를 움직이기 위한 톱니바퀴 같았다.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그 속에 나 자신도 조그만 톱니바퀴가 되어야만 했다. 항상 물고 물리며 돌아가야 하는 일상. 게다가 한쪽 방향으로 돌기만 하면 되는 톱니바퀴와는 달리 우리네 사는 것은 그렇게 단조롭지만도 않았다. 톱니바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약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고 생각이 많아지는 때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상처와 생각의 덩어리들이 부풀어 올라 마음 한 곳을 짓누르는 짐이 되었다. 그렇게 쉽사리 풀리지 않는 상황의 실타래 양끝을 잡고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나는 절을 찾았다. 그리고 가위로 실타래 한복판을 잘라 엉킨 부분을 풀어내듯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에 한순간 그 덩어리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힘든 이유는 언제나 나의 욕심들 때문이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 쉽게 매조지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 쉬운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절은 내 마음의 짐과 욕심을 자연스럽게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때론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나의 기도는 언제나 ‘해주소서’가 아닌 ‘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로 귀결되는 형태였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의 힘으로 고난을 헤쳐 나가는 원동력을 얻는 것이 진정한 기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그동안 내가 잘못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나를 점검하고는 했다.
아마 앞으로도 기회가 되는 대로 절을 찾아다닐 것 같다. 한 인간으로서 가지게 될 수많은 고뇌와 번민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고 나를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내려놓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내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러지 못할 때 나는 절을 찾아갈 것이다. 나에게 절은 얽히고설킨 내 마음을 내려놓는 공간이다.
강희선
한국을 대표하는 성우다. 1979년 TBC에서 데뷔해 30년이 넘도록 KBS의 간판 성우로 활약해왔다. 샤론 스톤과 줄리아 로버츠의 목소리는 모두 그녀의 것이다. 최근엔 ‘짱구는 못 말려’에서 짱구엄마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건 서울메트로, 부산교통공사, 한국철도공사의 지하철 안내 방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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