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달마 菩提達磨
기억의 끝에는 늙은 나그네
보리달마 菩提達磨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남인도 팔라바 왕조의 왕자로 태어나 제27조 반야다라에게서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남북조시대 중국으로 건너와 문자와 형상에 의지하지 않는 무심(無心)의 선법을 널리 펼쳤다. ‘착하게 사면 복을 받는다’던 양의 무제(武帝)를 대놓고 비판한 이야기, 스스로 팔을 자를 만큼 마음의 고통에 몸부림치던 혜가에게 마음이란 것 자체가 없음을 깨우쳐준 이야기, 관 속에 짚신 한 짝만 남긴 채 서천(西天)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등이 유명하다. 저작으로 안심법문(安心法門)이 수록된 『소실육문(少室六門)』이 전한다. 이 연재는 전설적 선지식의 행적과 사유를 추적해 이런저런 의미를 도출해내기 위함이다. 오늘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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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사조傳神寫照. 초상화를 그릴 때 필히 유념해야 하는 동양미학의 율법이다. 단순히 생김새를 베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붓끝에 피사체의 영혼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얼굴 묘사에 심혈을 기울이는 대신, 얼굴 아래는 그리지 않거나 대충 그렸다. 특히 마음의 기氣가 응집된다는 가정에서, 눈동자에 유독 집착했다. 공재共齋 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이 백미다. 옛 화공들에게 의뢰인의 얼굴은 그의 인성이고 행적이었다. 그러므로 더욱 치열하고 엄정하게 그려야 했다. ‘잘 생겼느냐’보다 ‘잘 살아왔느냐’가 초점이었던 셈이니, 회화를 넘어 화도畵道라 높여 이를 만하다. 그런데 막상 ‘잘 살아옴’에 대한 표현의 기준이란 게 적잖이 모호하다. 학문에 일가견을 이뤘거나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다 해서, 얼굴의 늙음과 닳음이 지워지거나 유예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름난 사기꾼들의 면상은 대체로 멀끔하다. 얼굴값은 꼴값과 무관하다. 외려 험상궂게 생긴 사람일수록 소심한 편인데, 세상의 끊임없는 지적과 기피에 제풀에 낮추고 오므린 과보다. 맑은 눈동자?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무언가에 열렬히 집중하면 눈알이 반짝이게 마련이다. 결국 전신사조란 어쩔 수 없이 주관主觀이고 얼마간의 조작이며, 잘 살아왔느냐를 견주기 위한 측정 역시 헛수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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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칼을 대고 주사를 넣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얼굴의 미美뿐만 아니라 덕德마저도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한 시대다. 얼굴을 거울삼아 정혼과 기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모순이다. 노화와 마멸의 방치가 죄악시되고 웃음과 긍정이 흥행하는 사회에선, 바야흐로 위선이 곧 인격이다. 하기야 몰라보게 예뻐지면 활기와 희망을 얻고 생산성도 향상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는 고금의 상식이다. 다만 역사와 단절된 얼굴은 정욕의 대상이나 장사의 수완에 국한된다는 게 단점이다 . ‘이미지’나 ‘개런티’로서의 얼굴은 실존하지 않고 부유하거나 횡행한다. 반면 노안老顔은 사유가 깊은 자의 전유물이다. 괴로울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그래서 더 늙는다. 물론 볼썽사나운 열등감이나 지긋지긋한 질투라도, 마땅히 생각의 일종이라고 간주한다면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겉늙음은 성숙의 징표가 아니지만 최소한 슬픔의 직인이다. 의학의 개입 없이, 삶이 이끄는 대로 휘둘려온 얼굴은 외모의 중심이나 성공의 밑천이기에 앞서, 사유의 실사實辭다. 그러므로 갈라지고 뒤틀린 얼굴만으로도 그의 생애가 얼마나 치열하고 극적이었을지 거뜬히 헤아릴 수 있다. 윤리나 호감이 아니라 사실로서의 정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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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은 날벌레처럼 달라붙는 거지들과의 싸움이었다. 2월말이었지만 한낮 기온은 섭씨 30도까지 치솟았다. 소똥을 연료로 썼고, 짓다만 집에는 예닐곱이 모여 살았다. 그들의 젖줄이자 성소인 갠지스 강은 똥물이다. 부처님 8대 성지가 몰려있는 아대륙의 동북부는 나라에서 가장 못 사는 부락이다. 불교의 치세에 세워진 건물들은 대부분 밑동이나 뼈대만 남았다. 열흘 넘게 이어진 순례길, 남루한 유적보다는 더위와 가난에서 만져지는 게 훨씬 많았다. 적나라하고 절대적인 불행의 풍경은 해탈의 꿈으로 울었다.
으레 여행자들은 인도의 신비를 말하고 영혼을 기리나, 그것은 폐허와 혹서에 의한 착시다. 다만 삶 속에 도사린 필연적인 하자와 독성을 방어할 어떠한 장치도 없이, 맨몸으로 버티는 모습은 가히 숙연하고 종교적이다. 소가 똥을 누는 옆에서 사람이 이를 닦는 강은 더러우나 소탈하다. 무너지고 버려진 밑바닥들은 땅에 들러붙어 땅이 주는 대로 먹고 살았다. 요컨대 가장 진실한 삶의 조건은 중력과 지옥이며, 존재자가 순수하게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향기는 발 냄새다. 더는 가고 싶지 않지만, 잊히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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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희미해서 아름답고, 추억은 청춘의 흔적이므로 정겹다. 한편으론 그게 전부 인생의 무게이고 질곡이다. 과거가 희미하다고 무딘 것은 아니며, 추억의 뒷면은 상실인 법이다. 아프고 억울한 기억은 성격을 망치고 미래를 방해한다. 돌아올 수 없는 날들은 돌이키기 싫은 날들과 마찬가지로, 비애다. ‘사고事故’는 ‘사고思考’를 낳고 성찰이 쌓이면 지혜를 얻는다지만, 지혜가 겨냥하는 곳은 끝내 체념과 자족이다. 삶의 정리엔 유용하나, 복원과는 거리가 멀다. 단맛은 죄다 빠진 채 장맛만 나는 삶은 묵직하지만 무겁다.
지금 서 있는 자리는 비껴나고 밀려난 자리다. 딴에 좋아했던 것들은 남들이 좋아해주지 않았고 그래서 도와주지 않았다. 결정은 언제나 늦었고, 늦어서 틀렸다. 오늘날의 밥벌이는 다행히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결과다.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미치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다. 대신 고독과 기갈이 심하다. 조각난 꿈들을 얼기설기 붙여놓으면 음험하고 혼곤한 얼굴이 비친다. 그간의 숱한 망설임과 겁먹음, 꺼림과 대듦, 어김과 물러섬의 역사가. 주름으로 고름으로, 서성이는 발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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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달마도’ 시장은 한해 5,000억 원 규모였다. 기氣를 받으려 사가고,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사가고, 집안의 수맥을 차단하려 사가고, 아들을 대학에 붙이려 사가고, 남이 좋다니까 사갔다. 홈쇼핑에서 7시간 만에 11억 원 어치를 팔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뇨병에 특효라는 달마도 머그컵까지 등장했다. 머리를 깎고 달마도를 그리면 졸지에 큰스님이 됐다. 들불마냥 번지던 신이와 영험에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요즘은 한풀 꺾인 분위기다.
달마의 얼굴은 얼굴 이전에 힘이다. 선이 굵은 만큼 자못 섬뜩하며, 짐짓 권태로우나 뜨겁다. 눈썹과 눈빛, 수염에 몰린 극도의 결기와 양감에 힘입어, 뒤통수까지 벗겨진 대머리가 우습지 않다. 굳게 다문 입술은 적요寂寥이면서 살의殺意다. ‘달마도’에 세인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단연 얼굴에 서린 미증유의 위광威光 때문일 것이다. 카리스마의 ‘끝판왕’에 기대어 잡귀와 액운을 쫓겠다는 심산이다. 흔히 흘러간 전통주 ‘금복주’의 모델과 혼동하는데, 술병에 그려진 얼굴은 달마가 아닌 포대화상布袋和尙이다. 달마는 5세기를, 포대화상은 9세기를 살고 갔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식별법이 있는데, 포대화상은 싱글벙글 파안대소지만 달마는 절대 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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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를 용한 귀신쯤으로 여기는 무지렁이들은, 그의 형상에 홀릴 뿐 인간적 고뇌를 취하진 않는다. “불행은 업보이니,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라”는 충고는 한없이 단순하고 질박하며 일견 처연하다. “세파에 다치지 않게 마음에 빗장을 걸라”는 위로를 들으면 그의 귀기어린 얼굴은 칼이 아니라 늪이며, 침묵의 절반은 울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쓰게 될 글들은 달마達磨의 ‘풀네임’이 ‘보리菩提’ 달마임을 새삼 확인하기 위한 정신노동이다. 그의 깨달음은 ‘비움’보다 ‘참음’에서, ‘낮춤’보다 ‘닫음’에서 나왔다는 전제 아래서다. 중국어 한 마디 못 했을 서역의 이방인이 어떻게 불교사의 거목으로 설 수 있었는지. 끊임없는 물음과 헤아림이 산을 이루고 벽을 세우리라. 개인적으로는 분투奮鬪가 될 것이고, 문신文身으로 남을 것이다.
기억의 끝에는 언제나 늙은 나그네. 마음을 안쪽으로 쓸어 담으면 생생하다가도, 버럭 화를 내면 일순 사라진다. 조용한 곳에서 오래 생각할 때 그의 처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구원이나 민주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길이지만, 얼굴 두껍고 입만 나불대는 것들을 뚫어내야 닿을 수 있는 길이다. 숲속이고 비어있으며 바람이 분다. 그 길의 체취를 맡으면 차후에 어떤 길을 가더라도 잔향이 코끝에 남는다. 기억 속의 사내는 기억 속이어도 가깝다. 내내 등을 구부려 앉아 있다가, 가끔씩 등을 조금 펴고 걸어 다니는 모습은 쓸쓸하면서도 낯익다. 넝마더미와 같은 몸집을 움직여 일도 하고 술도 마신다. 침울하지만 소심한 인기척을 느끼자 사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데, 멀어서 안 들린다. 본성本性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장영섭
집필노동자.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불교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눈부시지만, 가짜』, 『길 위의 절』, 『공부하지 마라』, 『그냥, 살라』, 『떠나면 그만인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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