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를 벗어나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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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를 벗어나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10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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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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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타임’, ‘신의’, ‘마의’ 등 올해는 유난히 의학을 테마로 한 드라마가 많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한편으론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질병과 죽음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꺼리가 또 있을까. 생로병사의 과정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요 작품이 아닌가 말이다. 문제는 이런 대중문화를 통해 ‘몸과 질병, 생명과 죽음’ 등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확보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이 작품들이 배경과 스토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병리학의 프레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 현대 의학, 앎을 독점하다
주지하듯이, 몸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생로병사라는 거시적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세포 단위에서의 분열 역시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 또 몸은 단지 ‘생리적 집합체’가 아니다. 생리적 순환은 심리(七情)와 중첩되어 있고, 그것은 동시에 인간관계 혹은 윤리적 표상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 어디 그뿐인가. 꿈과 무의식, 자율신경계 등과 같이 우리의 몸 안에는 이성과 의식으론 절대 통제되지 않는 광범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것은 ‘안’에 있기도 하고 ‘바깥’에 있기도 하다. 요컨대, 우리의 몸은 다양한 흐름들이 넘나드는 ‘정보의 바다’인 셈이다.
현대의학은 그 중에서 생리와 병리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의학체계다. 세균론, 해부학, 위생학 등이 그러한 담론의 산물이다. 물론 이런 의학체계 또한 하나의 관점으로서는 얼마든지 유효하다. 문제는 현대인들에겐 이것이 몸과 질병을 보는 유일무이한 척도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아프면 곧바로 약국과 병원으로 간다. 열심히 검진을 한 뒤 약물처방 아니면 수술을 한다. 생리를 뛰어넘는 심리적 증상이 나타나면 스트레스성으로 규정되고 곧바로 정신과로 넘겨진다. 거기서도 약간의 체크리스트를 채운 다음 약물처방을 받는다. 그 다음엔? 답이 없다. 생리와 심리, 그리고 일상이 완전히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의료서비스가 좋아질수록 삶은 무지와 소외, 그리고 탐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많은 병을 앓으면서도 자신의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모른다. 아니, 그걸 알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오로지 통증을 제거하고 병을 몰아내는 것, 좋은 기계와 서비스에 의존하는 것만을 능사라고 여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과정에는 아주 많은 돈이 든다. 그래서 결국 돈만이 나를 지켜줄 거라는 망상에 빠져버린다. 몸에 대한 무지와 돈에 대한 집착, 이것이 현대 병리학에 몸을 맡긴 치명적 대가다.
 
| 몸과 우주, 삶의 비전을 보여준 한국의 보물
나 또한 이런 식의 소외된 시스템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마침내 문턱에 걸렸다. 40대 즈음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수술보다 전신마취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래, 스스로 길을 찾아보자. 그때 동의보감이라는 출구와 마주치게 되었다. 동의보감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하지만 그걸 배우겠다는 한국인 또한 없다. 나 또한 그렇게 벼랑 끝에 몰리지 않았더라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만큼 병리학적 프레임은 완강하다. 현대 의학체계는 병원과 약국을 대중화한 대신 전문가와 대중 사이의 장벽을 견고하게 쌓아올렸다. 의학은 전문가의 몫이지 보통사람들이 접근해서는 절대 안 된다. 환자들은 그저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따르면 된다. 대체 왜?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이 검색가능한데 왜 직접 몸과 병에 대해 배우면 안 되는 거지? 하지만 병리학은 이런 질문 자체를 봉쇄해 버린다. 그래서 한의학의 정전이자 한국 전통의 보고이고 유네스코 기록문화의 유산인 동의보감조차 그저 떠받들고 자랑하는 것 말곤 아무 생각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앎에 대한 독점’이야말로 현대의학이 유포한 가장 큰 ‘병적 징후’가 아닐지….
동의보감은 목차만 1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동아시아 의학사의 진수를 다 망라한 덕분이다. 하지만 세부 목차들은 참으로 친절하다. 소제목만 봐도 내용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다. 더 놀랍게도 그토록 방대한 편집에도 불구하고 전체 목차는 심플하다. ‘내경편-외형편-잡병편-탕액/침구편’ 이게 전부다. ‘내경편’은 ‘몸 안의 풍경’, ‘외형편’은 ‘몸 바깥의 형태’, ‘잡병편’은 ‘몸과 우주의 기운들(오운육기)이 이합집산하면서 일으키는 갖가지 질병들’, ‘탕액/침구편’은 ‘약과 침술’. 이보다 더 간결할 순 없다! 방대한 집성과 간결한 압축, 동의보감을 분류학의 절정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동의보감은 병이 주인공이 아니다. 생명과 우주가 더 선차적이다. ‘내경편’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 십이시十二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십이경맥이 있다. 하늘에 이십사기二十四氣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개의 수혈이 있고, 하늘에 369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듯이 사람은 잠이 들고 깨어난다. 하늘에 우레와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 희노喜怒가 있고,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물과 콧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한열寒熱이 있고,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액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 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치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바탕으로 잠시 형形을 빚어 놓은 것이다.”(손 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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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진인은 당나라 때의 이름난 명의名醫 손사막을 가리킨다. 도교 양생술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진인眞人’이라고 불렸다. 그에 따르면 우리 몸의 모든 것은 우주적 징표다. 머리는 하늘을, 발은 땅을, 해와 달은 두 눈을, 우레와 번개는 기쁨과 노함을…. 한마디로 몸과 우주는 ‘대칭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우주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다. 하지만 이 카오스는 대책 없는 우발성의 흐름이 아니라 ‘리듬과 강밀도’를 통해 움직인다. 그 이치가 곧 ‘음양오행론’이다. 우주가 그러하듯, 우리의 몸 또한 태과불급으로 일그러져 있다. 그래서 모두가 질병과 번뇌를 안고 태어난다. 질병과 번뇌는 생명의 토대요 전제다. 따라서 누구나 아프다. 아파야 산다! 그러므로 인생은 이 질병과 번뇌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천지만물과 하나 되는 길을 터득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아파야 살 수 있는 인간의 숙명
그 구체적인 방편과 기술이 바로 양생술이다. 하여, <내경편>은 생명과 우주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인 일상의 양생적 테크닉으로 가득 차있다. 이것은 단지 생리적 순환을 회복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윤리적 척도, 나아가 생사의 관문을 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예컨대, 양생에 가장 해로운 행위는 술과 분노, 그리고 성(섹스)이다. 모두가 화火기를 발동시키기 때문이다. 화기는 오행 가운데 특히 조절이 어려운 기운이다. 위로 치솟을 뿐더러 사방으로 뻗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기운에 휩쓸리는 한 ‘좋은 삶’이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가장 화기를 조절하기 어려운 상황은 칠정의 흐름이 깨어질 때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이나 연인, 동료와 친구 등 사회적 관계의 어그러짐으로부터 나온다.
윤리적 실천과 양생술이 마주치는 접점이 바로 여기다. 나아가 사람을 가장 근원적으로 불안하게 하는 건 죽음이다. 아니,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무지’라고 해야 맞으리라. 이 무지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잘 살기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 무지는 공포를 낳고 공포는 폭력을 낳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으로부터 탈주하는 것, 그것을 일러 ‘영적 구원’ 혹은 ‘깨달음’이라 부른다. 결국 양생술이란 생리와 윤리, 그리고 영성(sprituality)이 하나로 통하는 ‘삶의 기예’라 할 수 있다. 동의보감을 ‘비전탐구서’라 하는 건 이런 맥락에서다.
중국의 기철학자 장횡거는 말했다. 배움만이 기질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기질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고. 생명과 자연, 질병과 일상, 삶과 죽음. 이 항목들이 병리학적 이항대립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발한 ‘앎의 현장’으로 변환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모두가 ‘자기 삶의 탐구자’요 ‘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도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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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고전평론가. 강원도 정선군 함백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며 기본기를 다졌다. 지난 10여 년간은 지식인공동체인 ‘수유+너머’에서 지내다 현재는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
www.kungfus.net’에서 활동 중이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나의 운명사용설명서』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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