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멱살을 거머쥔 참다운 현실주의자
뺏고 뺏기는 20세기가 지나고, 이 누리를 이어가려면 서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헤아린다는 21세기가 왔건만 우리 사회는 60년이 넘도록 한겨레끼리 총을 겨누며 으르렁대는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지역과 지역, 보수와 진보, 종교와 종교, 갑과 을 편가름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겠다.”며 팔을 걷고 나선 이가 있다. 몇 해 전 직영사찰 문제로 힘겨루기 하던 조계종단과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가운데 서서 문제를 풀었던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를 이끄는 도법 스님이다. 도법 스님은 세상 모든 종교가 수행을 내세우는데 불교는 하나 더 얹어 마주이야기 나눠 세상문제를 풀어나갔다며, 말씀만 잘 나눠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7, 8할은 너끈히 풀 수 있으니 ‘붓다답게 마주이야기’ 나눠보자며 세상 멱살을 거머쥔다. 이런 도법 스님을 절집 바깥에서는 두 손을 들어 반긴다. 그러나 외려 절집에서는 이 실험이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며 곱지 않는 눈길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날지 세상을 바꾸는 큰 물결을 이룰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말씀을 잘 나눠 세상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 사람 꿈은 그저 꿈일뿐이지만, 만 사람 꿈은 현실이라지 않는가. 그물과 그물코처럼 모든 사물은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 작은 모듬살이인 마을에도 모자란 사람이나 괴짜, 말썽꾼을 비롯해 별별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몰아내고 내쳐야 할 적은 아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야단치고 어르고 달래고 보듬으면서 지내야 한다고 외치는 참다운 현실주의자 도법 스님. 앞으로 여섯 번에 걸쳐 마주 앉아 이야기만 나눠도 평화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도법 스님과 머리를 맞대고 ‘마주이야기’ 고갱이를 짚어본다.
| 붓다로 사는 길
도법은 자기가 보는 ‘조각’이 ‘전체’가 아닐 수도 있다고 여겨, 서로 마음을 털어놓고 한 결을 이루는 일이 ‘붓다다움’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생각과 뜻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지닌 뜻을 헤아리고 살펴 한 결을 이루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으랴.
코끼리를 보지 못한 장님들이 누구는 코를 쥐고 코끼리는 뱀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감싸 안고 코끼리는 무량수전배흘림기둥처럼 생겼다고 외치고, 또 어느 누구는 귀를 더듬으며 코끼리는 넓은 부채꼴이라면서 서로 제가 아는 코끼리가 ‘참’이라고 우긴다. 진짜 코끼리를 만지고 하는 말이니 ‘거짓’이라 할 수 없지만 ‘참’도 아니다. 코끼리를 잘 아는 믿음직한 사람이 있어 하나하나 풀어주며 헤아리게 하거나,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보여줄 수만 있다면 문제가 풀리련만 모두 눈을 감았기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나와 다른 주장을 펴는 네가 왜 그토록 드세게 나오는지 까닭을 헤아려 네 이야기를 찬찬히 듣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직접 더듬어보고, 내가 이야기하는 까닭도 짚어주고 네 손을 끌어다가 만져보게 하고 낱낱이 헤아린다면 쉽지 않더라도 굽이굽이 참 모습을 찾아갈 수 있다.
도법에게 ‘붓다’란 먼 뒷날 애써 달려가 닿아야 할 신비로운 경지가 아니다. 도법은 “지금 바로 나와 네가 거룩한 붓다임을 알아 서로를 정성껏 모시고 섬기는 일이 바로 붓다로 사는 길이다. 석가모니는 평생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제 편한 대로 달콤한 한쪽 이야기만 받아들일 뿐, 앞으로 나서서 묻고 말을 주고받는 문화가 사라졌다. 누구라도 썩 나서서 물꼬를 터야한다.”고 외친다.
석가모니는 마주이야기로 세상문제를 풀어간 이야기 달인이었다. 이야기 나눔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훌륭한 거룻배이면서, 서로를 받아들여 평화롭고 따뜻한 사회로 나아가는 수행이다. 어우렁더우렁 더불어 살아야 참 세상을 열 수 있다. 도법은 석가모니가 평생 가장 중요하게 여긴 마주이야기 나눔에 가치를 두고, 가자미눈처럼 쏠린 주장으로 네 멱살을 거머쥐는 싸움이 아닌 가슴을 열어놓고 나누는 활발한 토론 문화를 가정과 직장, 사회로 퍼뜨린다면 희망찬 앞날을 열 수 있다고 잘라 말씀한다.
“21세기가 열리고 이제까지 짚어보면, 사람들이 삶을 진지하게 파고들어 올바르게 성찰하려고 들지 않아요. 우리 모두 지금 여기를 살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눈 똑바로 뜨고 보지 않는다면 가야 할 곳과 반대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 도법, 그는 누구인가?
나이 열여덟에 천년 고찰 금산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한 도법은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다. 집을 등지고, 해인사 강원 졸업을 다섯 달 앞두고 보따리를 싸고, 깨닫겠다고 화두를 들고 참선에 골몰하다가 ‘이건 아냐. 여긴 길이 없어! 붓다라면 어찌했을까?’ 고민 끝에 입선한 지 십년 만에 선방 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때 도법이 걷어찬 것은 선방 문이 아니라 참선해서 얻는 깨달음이 으뜸가는 가치라 여기던 한국불교였다. 도법이 선방에서 나와 세상으로 눈을 돌린 곳에 간디가 있었다.
“간디는 겉으로는 약한 사람 편이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센 사람이나 약한 사람, 어느 편에도 서 있지 않았어요. 간디는 늘 ‘진리’, ‘참’ 편이었지요. 서로 떠받들고 더불어 살자면서 언제나 삶터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때그때 바로 다뤘기 때문에 모두에게 신뢰를 얻었죠. 간디와 만나면서 삶터를 떠난 불교는 덧없다고 여겼어요.”
도법은 수행과 삶, 나를 일으켜 세우고[自利] 너를 도타이 보듬기[利他]가 다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 뒤로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헷갈리면 붓다에게 물었다. 곰팡내 나는 경전에 들어앉은 붓다가 아니라 장바닥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붓다에게.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2004년부터 다섯 해 동안 나라 구석구석을 샅샅이 누비는 생명평화탁발순례에 나서, 얻어먹으며 삼만 리를 걷고 팔만 명을 만난 도법. 지금도 길 위에 있다.
도법은 불편한 현실에 맞서 끊임없이 일을 벌인다. 길을 묻고 따지며 실마리를 더듬어 찾는다. 모자라면 채우고, 잘못되었으면 고르고 다듬는다. 지리산 실상사 둘레에 귀농공동체와 대안학교를 만들어 키우고 도시와 농촌을 아우르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운동을 펼쳤다. 2010년 종단에서 ‘화쟁和諍’을 하겠다며 불렀을 때도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고 보따리까지 빼앗길 게 뻔한데, 밑천도 건지지 못할 일을 뭣 때문에 나서느냐고 드세게 말리는 손길을 뿌리치고 선뜻 나섰다.
“어떤 문제라도 머리를 맞대고 털어놓고 헤아리다 보면 참다움이 드러나지요. 화쟁 대상이 나라와 사회 문제라면 이웃 종교와도 함께해야 하지요. 한겨레이면서도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마침 조계종단이 ‘화쟁’으로 갈등을 풀어보겠다기에 선선히 받아들였어요. 내 생각과 조계종총무원 체제가 달라도 너무 달라 난처한 처지에 놓일 위험이 크다며, 그곳에는 대체 왜 들어가느냐고 말리는 이들이 둘레에 적지 않았어요. 그러나 늘 화합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면서 막상 종단에서 화쟁을 다루겠다는데 고개를 돌려서야 쓰겠어요?”
| 사무치게 터득한 슬기 하나
도법은 자신을 느낌에 맡기고 거침없이 옳은 길을 간다. ‘목숨과 평화’란 기치를 들고 나라곳곳을 누비기란 여간 고단한 일이 아니다. 장대비가 내리는데 질척질척 진흙 뻘을 걷고, 차들이 먼지 풀풀 날리며 달리는 길을 뽀얗게 먼지 뒤집어쓰고 걷기도 하며 한뎃잠도 마다 않는다. 종단 갈등 수습이나 개혁도 마찬가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슬기를 짜내기가 만만하지 않다. 도법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롭게 문제를 풀어나간다. 현실을 떠난 종교나 수행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도법. 삶과 수행은 떼어놓을 수 없으며 떼어놓는다면 ‘참’이 아니란다.
“호젓한 수행도 좋아요. 그런데 세상과 동떨어진 수행이 있을까요? 여기 수행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곁에 있는 이가 어떤 일로 몹시 괴로워하는데 홀로 수행을 잘해서 평화롭다면 바람직한가. 이 물음에 바로 답이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이웃이 힘겨워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참다운 수행이라고 볼 수 없죠.”
도법이 선방을 나서서 오늘까지 여러 일을 두루 하면서 사무치게 터득한 슬기가 하나 있다. 출가승, 재가승, 이웃 종교인, 나라사람들을 폭넓게 만나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나누면서 같은 불교인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 종교가 있는 사람과 종교가 없는 사람, 진보와 보수, 이곳과 저곳 가르기를 넘어서는 참된 가치는 ‘사람다움이 넘치는 따뜻한 만남인가’, ‘뜻있고 서로 도움을 주는 만남인가’에 있다고 털어놓는다.
변택주
1953년 잿더미가 된 서울에서 누리 빛을 보다. 20세기 사람을 부추긴 속담이 “개천에서 용 난다”였다. 개천에 사는 송사리나 미꾸라지가 다 용이 되려면 지구별이 몇 개나 더 있어야 할지, 이를 새기면서 저마다 저 생긴 대로 정情을 가르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심’을 화두삼아 소통을 연구하며 서울시가 지원하는 창업자 코칭을 한다. 펴낸 책으로『법정스님 숨결』과 『법정, 나를 물들이다』, 『가슴이 부르는 만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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