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
이번 주에 사회적으로 큰 사건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특별히 기억나는 사건이 있으십니까? 저의 경우 우선 박원순 씨가 야권단일후보로 등극한 일이 생각납니다. 또 노벨평화상이 발표가 됐는데 특이하게도 아프리카와 아랍에서 여권 신장을 위해 투쟁을 해온 여성 지도자 3명이 공동으로 수상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32살이고 또 한 사람은 37살로 상당히 젊은 분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이들과 함께 수상한 아프리카 대통령의 나이는 72살이었는데, 역사적으로도 굉장히 유례가 없는 평화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무엇보다 크게 기억에 남는 사건은 애플사의 CEO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일입니다. 그는 56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만, 그가 우리사회에 끼친 영향과 사회를 변화시킨 힘은 역사적으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문명 발달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사생아로 태어나 단순하게 살면서도 늘 창조적인 삶을 살았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스티브 잡스는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혼자 힘으로 컴퓨터를 발명했는데, 그가 성공을 한 이후에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습니다. 당시 졸업장 수여식장에서 그가 했던 연설이 아주 유명합니다. 그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항상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내가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오늘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매일 자신의 계획을 반문하면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했던 스탠퍼드 연설의 마지막 부분을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삶에서 큰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기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생들에게 당신이 겪은 삶의 경험에 대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의 핵심은, 죽을 것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그런 기대에 맞추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직관에 따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성공하는 삶이 될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연설문을 읽었을 때 ‘어느 큰스님께서 법문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통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기업이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느냐’, ‘여러분들이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하면 성공한 직장인이 되는가’ 하는 식의 연설을 하게 마련인데, 스티브 잡스는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그런 것들을 당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불교에서 법문을 하듯이 인생의 핵심을 짚어주었던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일찍이 애플사에서 강제퇴직을 당했습니다. 자신이 창립한 회사에서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그는 불교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불교적 삶을 자기의 삶에 끌어들였습니다. 단순함, 직관력, 통찰력. 이런 것들이 오늘날 스티브 잡스가 애플사에서 구현한 제품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누구보다 자신의 삶 속에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러한 삶을 살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일본 스님’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인류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불교적인 사상에 심취해서 세상을 살다갔다는 것이 큰 자부심으로 생각됩니다. 불교가 이렇게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스티브 잡스와 같이 ‘어떻게 하면 불교적 삶을 우리의 삶 속에 끌어들여서 바로 내 삶이 되게 할 것인가’라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매일 절에 와서 기도하고 부처님 경전을 독송하고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내 생활에 적용할 수 있어야 진정한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훈민정음 창제의 일등 공신
, 불교1446년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하셨습니다. 그 후로 한글이 우리 삶 속에 들어왔습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뜻을 풀이하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한글이 없었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요?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는 어려운 한자를 쓰다 보니 백성들은 글자를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훈민정음이 창제된 배경에는,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을 내려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데 얼마 전 밝혀진 바에 의하면,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즉, 불교가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가 들어선 뒤로 유교가 국교가 되어 불교는 엄청난 탄압을 받게 되었고, 스님들은 사대문 안에도 출입이 금해지는 등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학자들은 중국을 숭상했기 때문에 한자로 학문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종대왕이 아무리 왕권이 있다고 해도 유학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한글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그 주축이 되신 분이 바로 신미대사라는 분입니다.
신미대사는 지금의 법주사에서 출가하셨는데, 그곳에 있는 부도탑에 대사의 약력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신미대사에게 가서 범어를 배워서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참고하라는 어명을 내렸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신미대사의 속가 이름이 영산 김씨 ‘김수성’인데, 족보에 집현전 학사라고 나와 있고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신미대사는 집현전 학사를 하다가 출가를 하신 스님이며, 그 덕에 학문과 범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신미대사의 속가 동생인 ‘김수온’이라는 사람 역시 집현전 학사였다고 합니다. 이분은 신숙주와 친분이 두텁고 친형인 신미대사와 함께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443년에 완성된 한글은 1446년이 돼서야 반포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인 즉, 3년간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하려고 할 때, 유생들로부터 엄청난 반대 상소문이 올라왔습니다. 아녀자들이나 쓰는 언문이라고 무시하는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은 1446년 한글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제일 처음 했던 일이 부처님의 일대기를 담은 「석보상절」 24권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연산군 시대까지 불교는 숱한 탄압을 받게 되는데, 그런 와중에도 언문으로 번역된 65퍼센트가 불교경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글은 공인된 글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교경전이 아닌 『금강경』, 『월인천강지곡』 같은 불교경전이 번역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고려시대까지 국교가 불교였던 까닭에 백성 전체가 불교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에 불교경전을 번역함으로써 민심을 얻고자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신미대사와 집현전에 있던 불교친화적인 학사들이었습니다.
불교경전의 한글화를 통한 불법홍포
신미대사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억불숭유(抑佛崇儒) 시대였기 때문에 그의 공적은 삭제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께서 말년에 병석에 있을 때 신미대사를 직접 불러서 왕실에 ‘내불당’을 만들고, 그곳에서 신미대사가 탕약을 만들어 세종대왕께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사대문 안에 들어올 수 없는 다른 스님들과 달리 신미대사는 특별히 세종대왕의 허락 하에 말을 타고 궁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돌아가시고 세조임금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임금이 직접 법주사로 신미대사를 찾아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조임금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가 법주사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세조임금이 신미대사를 만나러 가는 도중 가마가 소나무 가지에 걸릴 뻔 한 것을 소나무가 가지를 들어주어서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일로 법주사 소나무는 정이품의 품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하나, 세조임금이 말년에 몸에 등창이 나서 고생을 했는데, 신미대사의 말을 듣고 오대산에서 문수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백일기도가 끝나고 그날도 온몸이 가려워 개울가에서 몸을 씻는데 그곳에서 문수동자를 친견하고 등창이 나았다는 것도 신미대사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 중 하나입니다.
오늘 한글 창제에 있어 불교의 역할을 반추해 본 까닭은, 지난 10월 5일 조계종 총무원에서 ‘향후 조계종 사찰에서는 한글로 반야심경을 봉독하라’는 공식 발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앞으로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모두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와 같이 한글로 해석한 반야심경을 독송하라는 것입니다. 불교경전의 한글화가 중요한 것은 불교, 구체적으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좀 더 새롭고 친근하게 우리 곁에 다가올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화 작업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불교를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한글이 창제된 데에는 불교가 그 중심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한글이 두루 쓰이게 된 데는 한글경전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바탕으로 앞으로 한국불교는 경전의 한글화 작업을 통해 보다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화 스님 :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서 1982년과 1986년 범어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했으며 광주 증심사 주지, 고려대장경 연구소부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중앙종회의원,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