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왕삼매론>이라는 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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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왕삼매론>이라는 양약
  • 도종환
  • 승인 2009.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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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법구

달 없는 그믐밤, 별은 더 초롱초롱 빛납니다.

불을 끄고 앉았는데 창 너머로 모래알 같은 별들이 반짝이는 게 보입니다. 희고 큰 별은 목성입니다. 별 자리를 이룬 별들도 또렷하게 보입니다. 조금 열어 둔 창으로 밤바람은 소슬하게 불어와 살을 스칩니다. 좋은 가을밤입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손전등을 비춰보니 산토끼 한 마리가 마당 가까이 내려 왔다가 황급하게 비탈길로 올라갑니다. 집 근처까지 무얼 구하러 내려왔을까 궁금해집니다.

이삼일 몸이 안 좋아 근신하고 지냈더니 몸은 편치 않지만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된밥을 끓여 죽을 쑤어 먹으니 속도 편안합니다. 반찬도 특별히 필요 없으니 상을 차릴 것도 없고 먹는 시간도 번잡하지 않습니다. 「보왕삼매론」 맨 앞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나니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기 쉽나니,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나니라.”

병 없는 하루하루의 삶이 타태하고 방탕하고 탐욕스러운 때도 많습니다. 육신이 튼튼하므로 무슨 일이든 해도 된다고 믿는 교만한 날도 있습니다. 일 년에 몇 번씩 몸에 병이 들어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는 날이 찾아오면 그때 비로소 병을 통해 그동안의 시간을 성찰하게 되곤 합니다.

중년 이후의 내 삶을 크게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 것도 내 몸에 병이 찾아온 때였습니다. 몇 년 동안 산에서 병을 다스리며 지내면서 병이야말로 인생의 큰 스승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병 때문에 홀로 지낸 시간이야말로 내 생의 가장 소중한 시간 중의 하나였습니다.

곤란과 어려움이 찾아왔던 때도 지나고 보니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직장에서 강제로 쫓겨나야 하던 시절도 있었고, 옥에 갇히던 때도 있었지만 그런 날들을 통해 인생의 치열함에 대해 알게 되었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부끄럽게 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배웠고, 세계의 진보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근심과 곤란 또한 제겐 좋은 스승이었습니다.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 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나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을 삼으라 하셨나니라.”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조급해질 때,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 화를 내곤 할 때, 어리석은 마음이 의로움보다 이로움 쪽으로 기울곤 할 때마다 「보왕삼매론」을 읽으면 많은 위안을 받게 됩니다.

「보왕삼매론」이야말로 양약 중의 양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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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1954년 청주 출생. 1986년 시집 『접시꽃 당신』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등의 시집을 냈으며, 산문집으로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등이 있다. 신동엽 창작상, 2006 올해의 예술상, 거창평화인권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보은의 산방에서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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