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배우
<소름>의 선영도 그랬지만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하 연애참)에서의 장진영은 룸살롱 연아 그 자체다. <연애참>은 ‘연기 참 잘하는구나’의 경지를 넘어선, 배우 장진영의 도약을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으로, 술집 여자 연아와 무위도식하는 날건달 영운의 달콤살벌한 연애담을 담백하게 풀어낸다.
영운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여자 수경이 있다. 그러나 그는 연아와의 몰래 연애를 4년째 계속하며 아슬아슬한 스릴을 즐긴다. 얌전하고 조신하지만 왠지 심심한 수경, 어른에게 깍듯하고 애인에게 애틋한 그녀는 누가 봐도 1등 신부감이다. 반면 음주가무는 기본이요 듣기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는 살벌한 욕, 때때로 악다구니 써가며 주먹다짐도 마다 않는 연아는 결혼 상대로는 사실 별로다. 게다가 영운과 연아는 툭하면 머리채를 쥐어 잡고 싸우기 일쑤, 그러나 그들의 불같은 싸움은 어느덧 불같은 사랑으로 변하고 그렇게 지긋지긋한 애증을 반복하며 서로를 할퀴고 서로를 찾는다. 잠시, 그들의 사랑은 영운과 수경의 결혼으로 끝이 나는 듯 보이지만 결혼 후에도 둘은 만남과 이별, 싸움과 사랑을 반복하며 피곤한 연애를 이어간다. 제목처럼,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그것 때문에 그들은 바보처럼 울고 웃는다.
<연애참>에서 장진영은 가히 놀랍다. 그녀가 하는 말이 놀랍고 그녀가 하는 행동도 놀랍다. 노래를 부르고 욕을 하고 싸우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는 연아는 장진영이 아니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발랄하면서 도도하고 당차면서도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표정들, 그 다채로움은 연기라는 기술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다. 사실 <연애참>의 연아는 굳이 정상의 여배우가 욕심내지 않아도 되는 배역이다. 담배와 술에 찌든 모습, 바닥까지 추하게 내몰리는 밑바닥 여성은 도전정신으로 맡기에 여배우로서의 이미지가 더 걱정되기 때문이다. 흥행과 상관없이 <싱글즈>의 나난과 <청연>의 박경원으로 인기와 연기력 모두를 얻은 그녀가 굳이 이 힘든 길을 선택한 건 결국 배우로서의 욕심과 거침없는 용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떠난 지금, 영화 속 연아의 눈물과 절규가 더 가슴 아픈 건 이젠 그런 진정성과 열정을 가진 한 배우를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그녀가 남긴 것
장진영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는 출연작 중 하나인 <국화꽃 향기>의 희재처럼 그녀가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다지 신선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고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에 지극한 순애보마저 진부하지만, 영화 속 비극과 사랑이 현실 속에서 온전히 재현되었다는 사실은 새삼 <국화꽃 향기>를 더욱 슬프고 애잔하게 느껴지게 한다. 그녀의 죽음과 사랑을 영화와 연결 짓는 것이 자칫 경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믿을 수 없는 우연이 최후의 순간까지도 장진영을 천생 배우로 남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겸허히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두려움을 느끼며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절감한다. 죽음 직전 배우 장진영은 의연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고 한다. 온몸 던져 영화 속 인물이 되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녀의 용기가 마지막 순간에 이러한 의연함과 평온함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비록 그녀는 갔지만 작품 속에 남은 그녀의 모습은 영원히 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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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균민 _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영화영상학과 석사 수료. 수년간 국내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밍과 출판 관련 일을 했으며, 2001년부터 잡지와 웹진에 영화 및 DVD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