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교리강좌] 산승불교의 법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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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교리강좌] 산승불교의 법풍
  • 해주스님
  • 승인 2009.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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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에 의해 산승불교로 특징되는 조선불교시대도 법풍 법맥은 계속 이어져 왔다. 산승불교의 특성 또한 한국불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통불교적인 총림불교요, 회통불교이며, 따라서 선 · 교 · 염불의 원융수행으로 드러나 있다.

 조선조의 억불숭유정책에 의해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불교는 산간 총림에 축소되어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나, 오히려 종교적 순수성을 산간 총림에서 간직할 수 있게 된다. 국가의 수탈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총림에는 진지한 수행자들이 모여 수도와 노동을 병행하였다. 그러한 총림에서 주종을 이룬 것은 선과 교 그리고 정토의 셋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불교는 고려불교의 과제였던 선교대립의 지양에 의한 선교겸수의 원융사상에 이어서, 유불대립이라는 새로운 문제의 등장으로 인한 유불선 삼교의 회통까지도 행하고 있다.

 조선시대 불교는 비록 산승불교로 밀렸으나 국가에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척불정책에 대해 끊임없는 항소를 올렸으며, 세조나 문정 왕후와 같은 호불의 정치가가 출현하였을 때는 곧 중앙에 진출하여 적극적으로 불교중흥을 협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선조 25년)과 병자호란(인조 14년)과 같은 국가 유사시에는 무기를 들고 나가 국가를 수호하였다.

 사상적으로도 당시의 지배관념이었던 유교와 끊임없는 교섭을 행하고 있다. 조선 초 무학의 수제자인 함허당 득통, 선사 기화(己和, 1376 ㅡ 1433)는 유교측의 척불론에 대한 답변을 자세히 함과 아울러 유불도 삼교가 근본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유불교섭은 그 뒤해석 계속 등장하고 있다.

 함허는 임제종풍을 주축으로 하였으나 선가의 여러사상을 두루 수용하였으며, 교도 아울러 선으로 해석 융회하고 있다. 교로서는 초기에는 법화경이 국역도 되는 등 대표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나 함허 이후에는 화엄사상이 중시되어졌다. 이런 경향은 설잠 김시습(1435 ㅡ 1493)에 이르도록 내려 온다.

 지나친 배불책으로 법맥이 끊어지려는 위기까지 이르렀을 때 구곡각운의 제자 벽계정심 선사가 있어, 선법을 벽송지엄에게 전하고 교법을 정련법준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중종조 벽송지엄(智儼, 1464 ㅡ 1534)은 후학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먼저 도서와 절요로 올바른 지견을 세우게 한 다음, 선요 서장으로써 지해의 병을 제거하고 활로를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때때로 법화, 화엄, 능엄 등의 대승경을 강설하였다. 이는 교를 통하여 여실지견을 세우고 선을 통하여 출신활로를 여는 일이다. 그러한 벽송의 교육이념은 "고요히 조사선을 참구하고 한가히 제불교를 보며, 여가 날적에는 아미타를 생각하여 정토에 나기를 구하라"고 한 그의 말에서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선교회통 · 원융수행의 전통은 조선불교이후 달라짐이 없이 계속되었다.

 지엄 문하인 부용영관(靈觀, 1488 ㅡ 1568)에게 산승시대의 불교를 중흥시킨 서산휴정을 비롯하여 부휴선수 등 많은 제자들이 있어, 그 문손이 홍성하여 오늘날의 한국불교계는 거의가 그 법손으로 이러어져 있는 실정이다.

 지엄의 법풍은 영관을 거쳐 선조대의 서산대사 청허당휴정(休靜, 1520ㅡ1604)에 이르러 굳건히 다져진다. 휴정에 이르면 사교입선적 경향이 나타나지만 선만이 중시된 것은 아니다. '선은 부처님마음이고, 교는 부처님말씀이다' '누구나 말에서 잃으면 염화미소가 다 실없는 말이되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속의 잡담도 교외별전의 선지가 된다'고 한 그의 선교관의 특징은 대립과 쟁론을 떠난 융화회통의 사상이라 할수 있다. 그리하여 나아가 유불도 삼교까지도 회통시키고 있다.

 휴정은 판교종사, 판선종사를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라는 최고 승직에까지 승진하였으며 임진왜란시 선조로부터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존호를 받았다.  임제종풍을 선양하면서도 부종수교를 숭상하는 선교겸수의 법풍은 지엄 선사 때에 진작되기 시작하여 서산 당시에 홍성하였던 것이다. 조선불교는 선사, 강사를 가릴 것없이 모두가 부종수교(扶宗樹敎)를 숭상하는 특수한 정통을 형성하였다.

 지엄을 지나 서산 문하 영월 청학에게서 제정된 조선불교 강학교육인 강원교육의 이력과정도 이러한 선교겸수, 원융수행의 이념하에 배정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교로 말미암아 선으로 가는 납자들이라면 누구나 이수해야 할 수행정로로 보고 교과과정을 이력(履歷)이라 하였다고 간주되고 있다.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 수의과의 이력과목 가운데 정규과목중 최고봉인 대교과에서는 화엄경과 전등염송을 배워왔다. 화엄경에 대한 연구가 왕성했던 것도 조선 총림불교의 한 특색인 것이다. 청허와 부휴 문하에서도 많은 화엄종장들이 출현하고 있다.

 승과에서 선종승과에서는 염송과 전등이, 교종승과에서는 화엄과 십지론이 시험과목으로 채택된 데 말미암아, 총림에는 승니교육제도로, 사집, 사교, 대교의 이력을 밟는 강원과 선을 전수하는 선원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한다. 처음 승과가 시행될 당시에는 선은 선대로 교는 교대로 길이 달랐다. 선종에 소속된 승려들은 전등록 염송집만 학습하고, 교종에 소속된 승려들은 화엄만 학습해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과와 양종이 폐지된 후에는 선교의 종취가 더욱 화회되기 시작하였다.

 서산을 비롯하여 부휴, 벽암, 백곡 등 대사는 일인이 선교양종의 승려를 총섭했고 선교양종의 사무를 겸판하였다. 그러므로 자연히 선교를 분리하지 않고 화회하였으며, 모든일에 융통성을 보였다. 이력과목에 있었어도 한 사람이 반드시 선교양종의 서를 겸수하였으니, 그것이 곧 사집, 사교, 대교, 등의 과목이다. 강원교육에 있어서도 선교를 겸수하게 하여 선교를 총섭하고 선교를 겸판할 수있는 종사의 인재를 육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둔 것이라 하겠다. 지엄으로 부터 진작되기 시작한 이러한 학풍은 벽암 이후에 완비되어 현금에 이르기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와 함께 산라시대부터 화엄종으로 중심을 대중불교의 주축을 이루어 온 미타정토에 대한 신앙은 조선조 후반기에는 더욱 권진되어 염불결사가 무수히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교를 떠나서 따로 선이 있는 것이 아니요, 선을 떠나서 따로 교가 있는 것이 아니며, 염불문 역시 선사 강사를 막론하고 두루 일반대중에게까지 권진되었다. 선교융회, 삼교회통, 삼문수업, 원융수행이 조선시대 산승불교의 법풍이며 특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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