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 먼 자유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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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 먼 자유민주주의
  • 관리자
  • 승인 2009.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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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우리나라는 심각한 사회적 소요를 경험하고 있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 추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 종교 차별 등에서 시작된 이러한 상황은 용산 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사건을 거치면서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으로까지 심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상황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피다 만 꽃, 자유ㆍ민주
최근 사회양극화·비정규직 문제·민주화 퇴보 등 우리 사회의 그늘진 면이 다시 부각되면서 국민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이 압도적 힘을 실어준 여당이나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2/3선을 넘었다고 하니 사회불안의 도를 짐작케 한다. 주요 정책마다 우왕좌왕하거나 대화와 설득보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을 해온 정부에 대해 근본적인 신뢰가 안 간다는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명박 정권은 그 자체로 역할도 있고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주문은 명확하다. 경제를 살리는 동시에 사회통합과 민주발전도 이루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정부’ 출범 시 걸었던 기대에 비해 경제 살리기도 신통치 않고 사회통합은 더욱 어려워져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해 대운하 사업, 미국산 쇠고기 수입, 종교 차별 등으로 불신을 자초하더니, 근래 들어서는 용산참사, 미디어법 논란, 공안정국 재현 등 힘에 의한 정치를 하기로 작정하면서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질문을 받게 된 것이다. 미네르바 구속을 필두로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편 갈라 위협하는 분위기가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독재개발을 연상케 하는 용산 철거민 참사의 경우 정부의 무리한 진압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고, 6개월째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데도 그 참혹한 죽음에 대해 공식 사과 한마디 없다. 미디어법만 해도 그렇다. 신문과 재벌의 방송 겸영을 두고 방송시장의 세계적 추세니 경쟁력 제고니 하면서 밀어붙이지만, 특정한 색깔의 보도와 해설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때 생겨날 여론독과점의 파장을 다수의 국민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시작되면 되돌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처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왠지 현 정권은 다수당일 때 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이 서두르는 게 불안하다.
정치보복성 수사와 그로 인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도 그렇다. 물증도 없이 심증만으로 전직 대통령을 서울로 불러 조사를 하고 언론플레이로 잡범 취급하듯 조롱한데다 주변까지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심리적 압박감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했던 권력이 아닌가. 전국의 애도물결도 우매한 민중들의 일시적 감성 배출로 애써 치부해 버린 정부를 어떻게 국민과 함께할 의지가 있는 정부라 할 것인가.
“정권은 짧고 인권은 영원하다.”던 국가인권위원장의 이임사가 이명박 정권의 핵심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좌익 척결을 빌미로 민주주의를 척결함으로써 과거 독재정권 시절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소리마저 들린다. 자기와 사고가 다른 사람에게 색깔론으로 누명을 씌우던 우리 현대사의 고질병도 도졌다. 이러한 반민주·반인권적 행태는 수십 년에 걸쳐 어렵게, 그러나 장하게 이루어낸 우리 사회의 민주화 성과를 무력하게 만든다. 산업화 30년에 이은 민주화 20년을 두고 이제 자유민주사회를 이루었다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우리 국민은 그것이 노 전 대통령의 탈권위 스타일과 인터넷 광장의 소통마당에 의한 착시현상에 불과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무한경쟁·승자독식의 한물간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용트림하려는 세력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결과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뭐든지 넘치면 미치지 못함과 같다. 이견과 비판을 못 견디는 정권은 그 유연성의 부족 때문에 사회를 불안으로 몰아갈 공산이 크다. 오죽하면 어느 시인이 “단지 길을 물었을 뿐인데, 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 물을 뿐인데 느닷없이 뺨을 때리는 시절, 아주 오래된 과거가 돌아왔다.”며 안타까워했겠는가. 새도 좌우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는 것처럼, 서로 다름을 상생의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고 죽이려 든다면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가진 자는 ‘자유’를, 못 가진 자는 ‘평등’을 앞세우지만 그 둘은 결코 대립될 수 없는 양 날개인 것이다.


대통령은 통합의 정치를 하라
대통령의 직무는 생명·존엄·자유·평등의 헌법적 가치를 지키고 국권을 수호하는 것이다. 국가는 경제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정치가 싫어도 정치를 해야 할 자리가 바로 대통령이란 자리다. 당선 확정 기자회견에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 국민의 뜻에 따라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경제를 반드시 살리고, 분열된 우리 사회의 화합과 국민통합도 반드시 이룰 것이다.”라고 다짐한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 다짐이 지금은 오히려 공허하게 들린다.
대통령이 아무리 중도와 통합을 외쳐도 인사와 정책에서 특정 색깔이 지나치다고 느껴지면 ‘늑대 소년’의 거짓말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독재정치와 패거리정치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포용과 통합 대신 ‘KKC(고려대·경상도·기독교)’, ‘고소영’ 같은 말들이 나오게 한 대통령의 행보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거나 그들의 입장을 고려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보니 이분법적 선악 구분도 잦다. 그래서 대통령이 말하는 ‘근원적 처방’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어 보인다. 뒤로는 내 사람, 내 종교인, 내 취향의 단체만 챙기고, ‘법질서 확립’을 외치면서도 극우단체의 폭력행위는 방조한다는 것을 국민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중도·서민·소통·변화를 내세우며 노점상, 떡볶이집을 들르지만, 이미지만 필요해 다급하게 움직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80년대까지 독재정치에 저항하여 시민적 권리와 민주적 사회를 쟁취한 국민은 더 이상 일방주의와 독단적 정치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정치지도자는 명심해야 한다. 때론 쉬어가고, 때론 돌아가며, 때론 열린 자세로 국민을 설득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건설 공기를 맞추려는 공사감독관이나 목표 달성을 이루려는 회사 사장의 이미지만으로는 편안하면서도 자발적 기여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국민은 사장의 지시에 따라야만 하는 회사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금으로 급여를 주며 5년간 계약직 심부름꾼인 대통령을 뽑은 것은 오히려 국민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가 이를 말해준다. 또 종교적 편견으로 인해 일반국민이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일부 약삭빠른 사람들은 출세를 위해 그쪽으로 쏠리기도 하겠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5년 뒤를 기약하며 아예 등을 돌릴 수도 있다. 한마디로 사회통합의 최대 걸림돌은 대통령 자신의 소통 부족과 조급증, 그리고 독선과 패거리 문화이며, 그 뿌리는 CEO의 ‘성공신화’와 기독교의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산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올라온 길을 돌아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성공신화와 기독교 덕으로 대통령에 올랐지만, 이제 그것이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이 대통령이 깨닫길 바랄 뿐이다.
정치란 사회적 자원의 분배를 위한 통합의 기술이다. 따라서 정치의 잘잘못에 따라 국민의 행복도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성장 추구의 리더십 못지않게 고통 분담의 리더십도 보여주는, 그래서 경쟁에서 탈락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따뜻한 대통령을 국민은 원한다. ‘다른 것’을 ‘옳지 않는 것’과 구분함으로써 이견을 가진 이들을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획일적이고 경직된 사회로부터 벗어날 다양성과 건강성을 보여주는 징표로 받아들이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그래서 집토끼와 산토끼를 가르는 분열의 정치가 아니라 모든 국민을 끌어안는 넓은 정치를 하는 통합의 대통령이 필요하다.
뒤틀린 정치풍토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냉소·무력감, 심지어는 혐오·불신·분노로까지 이어지면서 사회를 서서히 허물어지게 한다. 우리 정치판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정치권 못지않게 국민의 뒤떨어진 정치의식도 한 몫을 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영국 경제학자였던 콜린 클라크), “정치가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정치인을 말하고, 정치꾼은 자신을 위해 나라를 이용하는 정치인을 말한다.”(전 프랑스 대통령 조르주 퐁피두)는 명쾌한 정의를 대통령은 물론 국민 모두가 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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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서 _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참여불교재가연대 종교자유정책연구원 공동대표. 서울대학교와 미국 브라운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으며, MIT에서 연구원으로 있었다. (사)우리는선우 이사장, 참여불교재가연대 상임대표 등을 역임했고, 국가인권위원회 조정위원과 공직자종교차별신고센터 자문위원으로 현재 활동하고 있다. 2001년에 불이회에서 수여하는 불이상을, 2003년에 대한불교진흥원에서 수여하는 대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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