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군은 마한시대부터 백제시대까지 항상 왕권과 연결되어 많은 문화유산을 그 땅에 남기게 되었다. 수많은 성터와 사지, 석불과 유서 깊은 현존 사찰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옛날의 그 현장에서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이 익산군에 산재한 유적을 대충 훑어본다고 하여도 하루로는 어림도 없다. 적어도 이틀은 보아야만 하고 그것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지나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깊은 가을, 역사의 향기를 그 현장에서 고전을 읽듯 천천히 음미해 보자.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석탑은 단연코 미륵사지 석탑이다. 현재 높이 14.24m인 이 탑은 한쪽이 붕괴되어 6층까지 남아있으나 조선조 영조대왕 때에 강후진(姜候晋)이 쓴 금마와유기(金馬臥遊記)에는 "7층 석탑 상층 개석 위에는 수삼인의 농부가 앉아 있었다."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좀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때에도 일본 학자들이 9층 탑으로 복원도를 제시한 바도 있어 상륜부까지 포함한다면 실제로 20m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석탑이 단순하게 높고 크다는 것, 오래됐다는 것만 자랑했다면 그 이름에 값하는 일은 아니다. 이 석탑은 석탑이지만 목조건물의 양식을 그대로 적용하였고 이러한 양식은 바로 백제탑의 특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는 이러한 백제의 기술력이 서라벌에 들어감으로써 불국사의 다보탑을 낳게 되었으니 전쟁의 승패를 차치하고 본다면 문화적 통일은 공평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더구나 이 미륵사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꾀로써 결혼한 서동 (곧 백제의 무왕)이 왕비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한 원찰이라는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삼국유사> 권 2 무왕조에 "하루는 무왕이 왕비와 함께 지명법사 (知命法師)가 있는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나타남으로 둘은 수레를 멈추고 경배를 올렸다.
왕비가 이 터에 큰 절 세우기를 청함에 무왕이 이 불사를 지명법사와 의논하니 지명법사는 신력 (神力)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웠다. 이에 미륵 삼종의 존상과 법당, 탑, 회랑을 각각 세곳에 세우고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에 앞서 무왕 바로 앞의 왕인 법왕 (法王)은 그 이름에 나타났듯이 `불법의 왕`으로서 어명을 내려 모든 살생을 금하게 하고 민간에서 기르는 솔개나 매 등을 모두 놓아주고 어업과 수렵에 쓰이는 기구도 모두 불살랐다는 기록이 또한 <삼국유사> 권 3에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금살생이란 미륵불의 계법과 고기를 먹지 않는 자비로운 행을 지킴으로써 미륵정토를 이루려는 전 국민적 신앙심이 백제 땅을 관류함으로써 무왕이 이렇게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하는 정신적 기반을 다져두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 이후에 발굴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지금 남아있는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조 동탑이 있었고 그 사이에 더 큰 규모의 목탑이 있었으며 각각의 탑 뒤에는 금당이 하나씩 있고 그 뒤로 설법전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제였음을 증명하였다.
서탑의 기단부 네 귀퉁이에는 둔한 모습의 석인(石人)이 놓여 있는데 서남쪽 모퉁이의 것은 유실되었다. 사천왕인지 수문장인지 아니면 백제 고유의 인물상인지 아직까지도 확인이 안되고 있는 기이한 유물이다.
사실 미륵사의 삼탑가람식 배치구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예이다. 비록 보령성주사지에 석조로 된 세 개의 탑이 나란히 남아있으나 여기에서처럼 각 탑마다 금당을 갖추지 못했고 또한 처음부터 동시에 설계 건조된 탑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남아있던 서탑은 1915년에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일제가 시멘트를 발라 보기 흉한 몰골이 되었으나 무너지지 않은 쪽만으로도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목조건축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왕궁리의 5층 석탑은 마한시대의 도읍지였던 궁터 앞, 넓은 들판 가운데 있는 구릉의 끝 부분에 서 있어 어디서나 잘 보인다.
이곳에서 수습된 기와에는 상부대관(上部大官), 관궁사(官宮寺), 궁사(宮寺)라고 써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삼국유사>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8년조와 연결된다.
곧 "금마군의 대관사(大官寺)에 있는 우물물이 피가 되어 넓이가 다섯발이나 되게 흘러갔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아마도 백제 말기의 왕궁이었다는 이곳의 궁궐 안에 세운 궁사가 아닌가 보아진다.
이 탑은 1965년에 문화재 관리국에서 해체복원하였는데 그 당시 금으로 만든 사리함과 사리병, 금을 종이 모양으로 펴고 금강경을 새긴 경판 19매가 발견되어 국보 12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이 탑도 역시 백제계의 목탑양식이 여전히 살아있으나 또한 신라식도 가미되었으며 대략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은 이 탑의 해체 복원공사를 맡았던 김천석(金千石)씨와 얽힌 일화이다. 탑을 해체하면서 옥계석 이음새에 사용했던 꺽쇠가 나왔는데길이 40cm, 폭 10cm 정도의 녹슬은 꺽쇠에 한문으로 천석(千石)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탑을 처음 쌓은 이도 천석이요, 천년 후에 탑을 고쳐 쌓은 이도 천석이었던 것이다.
김천석씨는 탑 상층부를 해체하면서 원인 모를 병을 얻어 전주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탑안에 안치되었던 유물들을 경건하게 모두 수습하자 병세가 갑자기 호전되어 수일만에 거짓말같이 완치되었다. 결국 복원 공사의 마무리는 김천석 씨가 끝마치게 되었는데 불교인의 인연법이 아니고는 어찌 해석해 볼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숭림사는 웅포면 송천리 함라산 자락에 안주하였다. 달마대사가 주석하였던 숭산(崇山) 소림사(小林寺)에서 두 글자를 빌려 숭림사라 하였는데 고려 충목왕 1년(1345)에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보광전만 남기고 모두 불탔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인 이 법당이 바로 보물 825호이다.
보광전 안에는 1613년 (광해군 5년)에 조성된 비로자나불을 모셨는데 이 부처님을 모실 때 보광전도 중수한 건물로 추정한다. 그 후에도 몇 번의 중수가 있었고 1819년에는 조희호의 조부가 중수하였으며 영원전. 나한전은 1923년에 성불암에서 옮겨 복원한 건물이다.
이때에 건물의 규모가 작아졌는지 영원전(명부전_)에 모셔놓아야 하는 동자. 판관들이 일부 나한전에 옮겨져 있어서 사찰재정의 어려움을 실감케 해준다.
정혜원(定慧院)이라는 현판은 성당(惺堂) 김돈희의 필력 넘치는 글씨이며 나머지 현판과 주련의 글씨들도 각인각색의 명필들이다
우화루(雨花樓) 벽에 걸린 수많은 중수기(重修記) 현판들이 내방객에게 고사(古寺)의 향훈을 넌지시 알려 주는데 떠들석한 관광객들은 이를 아는지 모르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