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한국불교,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신도단체는 재가신도(在家信徒)의 단체이다. 재가신도가 하나의 집단적 경향을 띠고 활동한 시기는 불교에 있어서 매우 오래이다. 법화경(法華經)이나 유마경(維摩經) 결집(結集)의 배경에 재가신도의 움직임이 짙게 깔려 영향을 준 사실에 근거를 둔다면, 재가신도가 집단을 형성하고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부처님 입멸 후, 백년 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에 재가신도들이 독립하여 나름의 활동을 전개한 것은 앞에서 든 대표적 대승경전인 법화경, 유마경 결집에 미친 영향으로 대승불교의 대두와 깊게 관련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교사의 전개나 교리의 발달에 전환점을 가져온 계기가 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처님 입멸 후, 백년이 되자 출가교단(出家敎團)이 여러 부파로 나뉘어 서로 다투게 되었을 때 재가신도들은 그러한 출가교단에서 떨어져 나왔으며 출가교단 내에서도 그 교조주의(敎條主義), 권위주의 전통만을 고집하는 보수주의(保守主義)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나오게 되어 세존께서 가르친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싹텄고 거기에 재가신도의 지지를 받아 대승불교가 전개 되었다.
경에 의하면 그러한 재가신도의 중심인물은 예를 들면 유마경의 유마힐(維摩詰)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북인도(北印度)의 대도시 『바이샤리』에 살고 있는 대상(大商人)으로 수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빈민을 구제하는 일에 힘쓴다. 이 『바이샤리』市는 불탑(佛塔)에 공양하는 물건을 교역하는 중심지였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유마힐을 중심으로 한 『바이샤리』시의 재가신도들이 불탑신앙(佛塔信仰)을 가지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교단이 불탑을 중심으로 모인 재가신도의 집단으로부터 발달 하였다고 보고 있는데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차치하고 당시의 재가신도들 사이에 불탑신앙이 성행하였고 불탑을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한 것은 사실이다. 불탑을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한 재가신도의 중심인물은 유마힐과 같은 도시의 자산가, 무역상, 촌락공동체의 대표자, 산업조합의 지도자, 지주, 씨족대표, 학자 등이었다. 이들 재가신도에 대해 법화경의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는『자산가와 바라문 모두가 보살에 끼인다.』하였고 법화경 서품(序品)은 『재산을 보시한 많은 보살들』이라고 해서 보살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재가신도의 집단은 재가보살의 집단으로, 이에 상대적으로 출가보살의 집단이 승단(僧團)으로 가리키게 되었으며 재가보살이란 지칭(指稱)은 자연 재가신도 내지는 재가신도 단체에 대한 성격을 규정짓게 되었다. 불탑신앙이나 승단에 대한 공양에서 더 나아가 유마힐과 같이 자신의 수행을 증진하여 전에는 승단에 맡겨졌던 중생 제도의 원대한 책무(責務)를 스스로 지게 되었으며 활발하게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행하며 고난 속에 있는 자를 찾아 나서서 고난을 함께 하여 덜어 주며 악에 물든 자를 찾아가 개도하는 임무가 자발적인 발원에 의해 주어졌다.
부처님 생존 시의 목소리가 아직 메아리치고 있을 때 형성된 재가신도 단체의 형성 과정에서 우리는 오늘의 신도단체가 어떠한 바탕 위에 서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 문제를 볼 수가 있다.
최근 우리는 일부 신도들중에서 출가 승려를 수도에만 전념케 하기 위하여 사찰 관리를 신도 단체가 맡아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며 신도가 종회의 원이 되어 종단을 함께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신도 단체 자체가 최초의 재가신도 단체의 형성 과정에서 보이는,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이다. 옳은 바탕위에 서있지 못할 때 그러한 노파심이나 참여의식은 불사(佛事)를 오도(誤導)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리 불교계에 재가 신도 단체가 등장한 것은 일구○○년대 전후이다. 본산(本山)이 포교소를 설치하면서 생긴 신도 단체는 각각 그 단체가 표방하는 신행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체명으로 알 수 있듯이 신행을 중심으로 해서 단체가 구성되어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화주(化主)의 성격을 겸한 신도 단체도 있으나 오늘과 같이 전국신도회의 통할기관 속에 행정적으로 묶어진 단체는 아니었다. 일제치하의 단체 중에 이색적인 것으로는 불교청년회를 들 수가 있는데 구성원 거의가 재가신도가 아니라 출가한 학승(學僧)이나 현대 교육을 받은 승려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서 승단에 속하는 단체라고 할 수도 없고 재가신도 단체에 속한다고도 할 수 없으나 그 활동은 재가신도 활동의 요소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광복 후, 청년 회원이었거나 청년회에 가입하지 않았던 학승과 일부 젊은 승려들이 스스로 교도(敎徒)라고 자칭하면서 교도는 교단을 외호(外護)하는 데 힘쓰고 출가 승려는 본연의 수도에 매진할 것을 주장한 예가 있는 이때의 교도는 재가신도이기보다 사판(事判)에 종사하는 승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과 같은 성격의 신도단체는 재가보살의 집단이라고 지칭 받기에는 거리가 먼 것을 신도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입멸 후, 백년이 되자 출가교단(出家敎團)이 여러 부파로 나뉘어 서로 다투게 되었을 때 재가신도들은 그러한 출가교단에서 떨어져 나왔으며 출가교단 내에서도 그 교조주의(敎條主義), 권위주의 전통만을 고집하는 보수주의(保守主義)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나오게 되어 세존께서 가르친 본래의 뜻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싹텄고 거기에 재가신도의 지지를 받아 대승불교가 전개 되었다.
경에 의하면 그러한 재가신도의 중심인물은 예를 들면 유마경의 유마힐(維摩詰)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북인도(北印度)의 대도시 『바이샤리』에 살고 있는 대상(大商人)으로 수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빈민을 구제하는 일에 힘쓴다. 이 『바이샤리』市는 불탑(佛塔)에 공양하는 물건을 교역하는 중심지였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유마힐을 중심으로 한 『바이샤리』시의 재가신도들이 불탑신앙(佛塔信仰)을 가지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교단이 불탑을 중심으로 모인 재가신도의 집단으로부터 발달 하였다고 보고 있는데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차치하고 당시의 재가신도들 사이에 불탑신앙이 성행하였고 불탑을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한 것은 사실이다. 불탑을 중심으로 집단을 형성한 재가신도의 중심인물은 유마힐과 같은 도시의 자산가, 무역상, 촌락공동체의 대표자, 산업조합의 지도자, 지주, 씨족대표, 학자 등이었다. 이들 재가신도에 대해 법화경의 안락행품(安樂行品)에서는『자산가와 바라문 모두가 보살에 끼인다.』하였고 법화경 서품(序品)은 『재산을 보시한 많은 보살들』이라고 해서 보살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렇게 해서 재가신도의 집단은 재가보살의 집단으로, 이에 상대적으로 출가보살의 집단이 승단(僧團)으로 가리키게 되었으며 재가보살이란 지칭(指稱)은 자연 재가신도 내지는 재가신도 단체에 대한 성격을 규정짓게 되었다. 불탑신앙이나 승단에 대한 공양에서 더 나아가 유마힐과 같이 자신의 수행을 증진하여 전에는 승단에 맡겨졌던 중생 제도의 원대한 책무(責務)를 스스로 지게 되었으며 활발하게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행하며 고난 속에 있는 자를 찾아 나서서 고난을 함께 하여 덜어 주며 악에 물든 자를 찾아가 개도하는 임무가 자발적인 발원에 의해 주어졌다.
부처님 생존 시의 목소리가 아직 메아리치고 있을 때 형성된 재가신도 단체의 형성 과정에서 우리는 오늘의 신도단체가 어떠한 바탕 위에 서야 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 문제를 볼 수가 있다.
최근 우리는 일부 신도들중에서 출가 승려를 수도에만 전념케 하기 위하여 사찰 관리를 신도 단체가 맡아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며 신도가 종회의 원이 되어 종단을 함께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신도 단체 자체가 최초의 재가신도 단체의 형성 과정에서 보이는,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이다. 옳은 바탕위에 서있지 못할 때 그러한 노파심이나 참여의식은 불사(佛事)를 오도(誤導)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리 불교계에 재가 신도 단체가 등장한 것은 일구○○년대 전후이다. 본산(本山)이 포교소를 설치하면서 생긴 신도 단체는 각각 그 단체가 표방하는 신행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체명으로 알 수 있듯이 신행을 중심으로 해서 단체가 구성되어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화주(化主)의 성격을 겸한 신도 단체도 있으나 오늘과 같이 전국신도회의 통할기관 속에 행정적으로 묶어진 단체는 아니었다. 일제치하의 단체 중에 이색적인 것으로는 불교청년회를 들 수가 있는데 구성원 거의가 재가신도가 아니라 출가한 학승(學僧)이나 현대 교육을 받은 승려였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해서 승단에 속하는 단체라고 할 수도 없고 재가신도 단체에 속한다고도 할 수 없으나 그 활동은 재가신도 활동의 요소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광복 후, 청년 회원이었거나 청년회에 가입하지 않았던 학승과 일부 젊은 승려들이 스스로 교도(敎徒)라고 자칭하면서 교도는 교단을 외호(外護)하는 데 힘쓰고 출가 승려는 본연의 수도에 매진할 것을 주장한 예가 있는 이때의 교도는 재가신도이기보다 사판(事判)에 종사하는 승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과 같은 성격의 신도단체는 재가보살의 집단이라고 지칭 받기에는 거리가 먼 것을 신도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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