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심 연작소설
“여보세요.”
신호가 가고 한참 후에 전화를 받는 친구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아퍼?”
강여사는 걱정이 돼서 이렇게 물었다.
“아니 괜찮어. 잠깐 잠이 들었었나봐.”
“그럼 내가 괜히 깨웠구나.”
강여사는 진심에서 미안해 하며, 너무 일찍 전화를 한 걸 속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시를 쓰는 그 친구는 새벽까지 책을 읽거나 원고를 쓰기 때문에 아침에는 늦게 잠을 잘 때가 많았다.
그런 날 아침 무심히 전화를 해서 친구의 잠을 깨우고 나면 강여사는 속으로 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는 그 생각 속엔 친구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기는 어때?”
친구는 미안해하는 강여사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쪽 안부를 물었다.
“그냥 그래. 머리도 계속 아프고...”
“긴장 때문에 그럴 거야. 참 엊그제 금강경 다 읽었어.”
친구는 자신이 금강경을 다 읽은 것을 강여사 한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인 듯 이렇게 말했다.
강여사는 그마음이 우정의 표시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슴한끝이 찌릿해졌다. 그것은 진실의 교감같은 것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친구는 외로움 속에서도 인생의 본질을 찾아, 인생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과 부단히 싸워오고 있었다. 그런 친구를 볼 때마다 강여사는 친구에 대해 깊은 신뢰감을 갖게 되었고, 그 친구가 하루빨리 불교 쪽으로 귀의해서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얻게 되기를 빌고 있었다.
이런 강여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그 친구는 자신이 지금 불교 쪽으로 한발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잘했어. 내용이 좀 어렵지?”
“응. 하지만 전에 반야심경을 몇 번 읽었던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았어.”
“그렇겠지. 반야심경은 금강경 진수를 모은 것이라니까.”
강여사는 누구의 해석서를 읽었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책도 인연따라 만나지는 것이므로.
“날씨가 참 좋지?”
친구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게 말이야. 우리 오늘 절에 갈까?”
날씨가 좋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강여사는 자신도 전혀 예기치 않았던 제안을 했다.
예기치 않았다고는 했지만 그 제안을 하기까지에는 친구 건강이 좋지 않다는 생각과 친구가 불교 쪽으로 다가오고자 하는 마음을 내고 있다는 생각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절에?”
친구는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응, 그냥 서울에 있는 절에.”
“서울에 있는 어느절?”
“승가사. 경치도 좋고 하니까 그냥 갔다 오자.”
강여사는 경치를 팔았지만 실은 경치보다는 약사전에 모셔져있는 약사여래불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승가사는 신라 때부터 있던 고찰인데 그 절 석존에는 도를 이룬 스님이 숨어 계시면서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그 스님은 신통자제한 힘을 지니고 계셨던 듯 가난한 신도가 그 스님 생각을 하면, 먹을 것이 생겼고 몸이 아픈 사람이 그 스님 생각을 하면, 아픈 몸이 나았다.
이 소문은 멀리 서라벌까지 퍼져서 진흥왕은 그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일부러 승가사까지 찾아 왔다고 하는데 그렇게 찾아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가 바로 오늘날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이다.
그 스님은 열반하신 후 자신이 공부하던 석굴 안에 약사여래불로 모셔졌는데 지금도 수 많은 사람이 가피력을 입어 소원을 성취하고 있다고 한다.
강여사는 우연한 기회에 어느 스님 안내로 그 절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오늘은 강여사 자신이 안내자가 돼서 친구를 약사여래님께 데려가고 싶었다.
가피력을 입어 친구가 건강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마음속으로 해보면서.
“그럼 어떻게 가야하지?”
강여사 마음이 전달 됐는지 친구는 선선히 갈 뜻을 밝혔다.
“세검정 구기터널 앞에서 일단 만나자.”
“그럼 시화라는 카페로 와.”
“알았어. 한 시간 반쯤 후면 되겠지?”
“응”
강여사는 한 시간 반 후에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 약속한 장소로 가니 친구도 뒤미쳐 따라 들어왔다.
강여서는 친구와 함께 승가사 입구로 올라갔다. 계곡입구는 이미 주택가로 변했지만 그래도 돌과 수목이 우거져 있어서 자연의 일부를 느끼게 했다.
“지난번에는 저기서 트럭을 타고 갔는데 우리 저 빌라쪽으로 한번 가볼까?”
강여사가 언덕위에 있는 빌라를 가리키며 말하자.
“트럭?”
친구가 얼른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산길이라서 승용차가 못 다니니까 대신 트럭이 손님들을 실어나르나 봐.”
“재미있겠다.”
“응, 재미있어. 오픈카를 탄 기분하고도 비슷하고….”
“그럼 나무나 꽃들을 보며 손을 흔들면 되겠네.”
“손을 흔들긴. 그랬다간 그 자리에서 내동뎅이 쳐지고 말거야.”
“당연히 내동뎅이 쳐지겠지. 서툰 흉내낸다고.”
두 사람은 즐겁게 웃으며 빌라 밑으로 걸어 올라갔다.
빌라 앞에는 승용차들이 늘어서 있고 좌판상들도 몇사람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 혹시 승가사 가는 차 안 와 있는가요?”
강여사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좌판대 위에 떡을 놓고 파는 여인한테 가서 물었다.
“가만 있어라. 지금쯤이면 올라갈 시간이 됐는데… 저기 오는구려. 저 차요.”
여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작은 트럭이 막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맞어 저 차야.”
강여사는 며칠 전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 때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트럭위에 탔는데 산길이 하도 가파러서 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차는 잠시 후 강여사 앞에 와서 멈춰 섰다.
“승가사 갈려고 하는데 좀 태워주세요.”
“올라가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안으로 타십시오.”
기사는 운전석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오픈카 기분을 못 느끼는데.”
강여사가 친구를 돌아다보며 웃자
“손도 흔들 수 없다면서….”
그 친구도 따라 웃었다.
“그럼 안으로 타자.”
강여사가 먼저 차안으로 들어가자 친구도 따라 들어왔다.
장정 몇 사람이 차에 오르고 곧이어 기사도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차는 전날과 같이 꼬불꼬불한 비탈길을 기세 좋게 올라갔다. 수려한 삼각산을 바라보며 거의 직선으로 있으려니 전에처럼 산으로 가는 게 아니라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차 위험하지 않아요?”
친구가 불안한 듯 물었다.
“부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에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기사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겨울에도 위험하지 않아요?”
“그럼요. 저번에는 짐을 싣고 가다가 차가 세 바퀴를 굴렀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가 소나무 가지위에 나비처럼 사뿐히 앉아 있더군요. 차고 사람이고 전혀 다친 데가 없었습니다.”
기사는 영험한 가피력을 체험한 듯 즐겁게 말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짐을 실은 트럭이 소나무 가지위에 나비처럼 사뿐히 올라앉을 수 있다니, 그게 어디 있을 법한 일인가.
그러면서 기사는 절에 와서 차몬 지가 3년쯤 돼는데 그동안 한 번도 자신을 위해 복을 달라고 빌어 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스님을 모시고 지방에 갈 때면 “부처님 무사히 스님을 모셔다 드릴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하고 빌었고, 또 스님을 모시고 돌아올 때면 “부처님 무사히 스님모시고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요”하고 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신도들을 실어 나를 때도 절에서 필요한 짐을 실어 나를 때도 같은 발원을 한다는 것이었다.
강여사는 흐뭇한 마음으로 옆에 앉은 기사를 돌아다보았다. 운전을 직업으로 한 보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의미를 발견하고 그일을 가장 잘해내고자 최선을 다한다면 그게 바로 보살아니겠는가. 그러면 틀림없이 주위 사람들을 도와주게 마련이니까.
“부처님하고 인연을 맺도록 도와주면 좋은 아내를 얻는다고 했는데 그 말이 정말 맞는가 봐요. 결혼한 지가 지금 석달 됐는데 제가 생각해온 좋은 아내를 얻은 것 같거든요.”
기사는 휘파람이라도 불 것처럼 행복하게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행복해 보였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친다면 하잘 것 없는 직업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행복한데야 어쩌겠는가. 행복은 어떠한 상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에 있다는 것을 강여사는 옆에 앉은 기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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