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미지산(彌智山)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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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미지산(彌智山) 용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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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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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1) 뜨거운 신앙의 역사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합한 곳이 한강 양수리다. 양수리는 팔당댐에 이어지고 한강 본류를 형성한다. 양수리에서 남한강 줄기를 타고 약 30km 이곳이 용문이다. 용문이 바로 용문사가 위치한 미지산(彌智山)의 입구가 된다. 미지산은 서울에서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버스로 약 1시간 30분.

 용문역에서 동북쪽으로 9km가면 용문사에 이른다. 짙은 숲사이를 올라가는 길은 수 많은 발자욱에 아랑곳 없이 의연 태고의 모습이다. 일주문을 지나 길을 올라 가면 큰 은행나무가 우뚝 솟아 하늘을 가린다. 이것이 바로 용문사의 상징인 은행나무이다. 용문사는 그 뒤편에 전개된다.

 오늘날의 용문사는 옛모습을 찾기 힘드리만치 많이 변했다. 정면에, 지금 새로 중건한 대웅전 그리고 그 앞에 종각, 종각 뒤에 삼성각 그리고 서편에 요사등 가람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 땅은 긴 역사의 숨결과 함께 뜨거운 신앙의 역사가 잠겨 있는 곳이다. 신라때 창건하여 고려 조선조를 잇는 동안 맥맥히 끊임없이 수행의 향풍이 이어왔다. 그리고 삼보의 위덕과 불법의 진실을 증거하면서 시대와 역사를 지켜왔다. 그렇지만 이 역사들을 누가 있어 알랴. 아마도 하늘을 덮은 은행 나무만이 알고 증거할까! 이하에 용문사에 새겨진 묵은 역사를 더듬어 본다.

 (2) 창건과 중건 중수

 용문산의 둘레는 100리다. 봉우리가 빼어났고 골이 깊다. 그중에 한 개울이 있어 상봉에서 흘러나와 용이 굽이치듯 흘렀고 아래에는 두 석봉이 좌우로 대하여 솟아올라 석문이 되었으니 이름이 용각석이다. 그 아래에 용문사는 펼쳐 졌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 (서기 913년) 대경(大鏡)대사가 초창 하였다고 전해 온다. 일설에는 보다 늦게 경순왕이 이곳에 친행하여 창건하고 은행나무를 심었다고도 전해오나 고증할 길은 없다. 그후 고려시대를 지나 우왕4년 (서기 1378년) 지천(智泉)대사가 개성 경천사에 모셨던 대장경을 모셔와서 이곳에 대장전을 지었다. 다음 조선 태조4년(서기 1395년) 조안(祖眼)대사가 중창하고 세종 29년 (서기 1447년)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昭憲)왕후 심씨를 위하여 대웅전을 새로 짓고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존상외 8보살 존상을 봉안했다.

 그리고 다음 해 4월 초파일 부처님 봉안 경찬법회를 이곳에서 개설하였는데 수양대군 부부가 함께 참석하여 서원을 세워 기도하여 사리6과를 얻어 감격하고 원찰로 삼았다. 세조 3년 (서기 1453년)에 중수 하였고, 성종11년(1480년) 정희(貞熹)왕후가 승당을 중수 하였으며, 고종30년(1893년) 봉성(鳳城)대사가 조대비의 외호를 받아 가람을 중창 하였고, 융희원년(1907년) 군난으로 소실한 것을 취운(翠雲)대사가 대방등 일부를 중건 하였다. 서기 1938년 홍태욱(洪泰旭)주지가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사무실, 요사, 고방 등을 건축 하였으나 1950년 6.25전란에 대부분이 소실되고 대웅전, 종각, 삼성각 등은 1958년에 중건하였다. 오늘날은 대웅전을 위시 가람의 일신 중건이 진행중이며 천불을 봉안 한다고 한다.

 (3) 대장경 모신 내력

 용문사에는 종래 대장경을 모시는 대장전(大藏殿)이 있었다. 오늘에는 전해지지 않지만 용문사로서는 잊을 수 없는 유래가 있는 대장전이다.

 고려 말 조선조 초까지만 해도 바다건너 왜구들의 침범, 노략질이 심했었다. 해안은 말할 것도 없이 내륙까지도 종종 침범했다. 강화(江華)에 용장사(龍藏寺)가 있었는데 그곳에 대장경이 모셔져 있었다. 왜구들이 침범하니 위험이 많았다. 인쇄술이 미숙했던 당시의 대장경은 비상한 서원력과 막대한 비용을 들여 조성한 시경장경으로 추측되는데 이 장경은 구씨(具氏)등 수인이 정성을 모아 조성한 것인듯 하다.

 이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 선조들이 대법에 귀의하여 대장경을 모셨는데 불행이도 도적들의 침범을 받아서 거의 반이나 잃어 버렸다. 이것을 보충하여 안전한 곳에 모시기로 하자.] 결국 대장경은 개성 경천사(敬天寺)로 모시고 완전한 장경으로 보관하였다. 그러나 경천사 또한 물에 가까운 것이 흠이었다. 불가불 깊은 산에 모셔야 안심이 되었다. 그 무렵 용문사에 계시던 지천(智泉)스님들이 대장경을 모시고자 서울에 모연을 나섰다. 구씨 등이 이 소문을 듣고 기뻐서 지천스님과 의논하여 장경을 이전하기로 하였다. 지천대사는 큰 보배를 얻어 환희 용약하여 절로 돌아왔다. 대장전 3칸은 원(元)씨부인의 시주로 봉건하였는데 아까울세라 오늘날에 장전이 전해오지 않는다. 군난에 타버린 것으로 짐작됐다.

 (4) 수양대군의 기도 

 조선 세종때 수양대군(후에 세조)은 모후 소헌(昭憲)왕후를 잃고 애통 망극한 가운데 1447년 정묘년 봄에 꿈을 꾸었다. 모후가 나타나 하는 말이 [나를 위하여 2불 8보살을 조성하여 용문사에 모셔 달라]고 했다.대군이 널리 고승들을 청하여 2불 8보살이 누구신가를 물었다. 그때에 고승 신미(信眉) 학조(學祖)등 스님이 말하기를 [이땅 중생을 고해에서 건져 극락으로 인도하는데 큰 인연이 있는 성인은 석가여래. 아미타불. 문수. 보현. 관세음. 대세지 . 금강장 .제장애. 지장. 미륵보살이라]했다. 대군이 곧 명승을 청하여 궁중에서 존상을 조성하여 경복궁 청연루(淸嚥樓)에 모시고 공양했고 그해 7월 용문사로 이안하고 보전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다음해 무진년 4월 초파일에 경찬법회를 갖고 대군과 부인이 친히 기도했다. 대군이 불전에서 발원하였다. 그리고 스님 10분이 불전에서 7일 동안 일심 정근했다. 그러던 중 제6야에 탁상에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불사리가 강림한 것이다. 대군이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여 친히 향갑을 열으니 불사리6과가 찬연히 빛을 발했다. 그때는 깊은 밤인데 도량 안팎이 대낮 같이 밝았다. 그러기를 3일 후에야 그쳤다. 대군이 눈물을 흘리며 [우리 부처님의 자비하신 영감이 어쩌면 이럴까]하고 용문사를 원찰로 삼았다. 대군이 보위에 오른 것은 그후 8년 1456년이다. 세조는 전각을 중수하고 사찰 이름위에 동국 제일도량이라 얹었다고 한다. 불사리는 후에 부처님 복장에 모셨다. 

 (5) 정지국사와 은행나무

 용문사에는 정지(正智)국사 부도와 비가 있다. 정지국사의 내력인즉 비에  분명한데 고려말 충숙왕 11년 (서기 1324년)에서 조선 태조4년(서기 1395년)까지 재세한 지천(智泉)스님이다. 천마산(天摩山) 적멸암에서 입적하신 용문산의 고승인데 다비후 사리를 얻어 이곳으로 이안하고 세조는 정지국사라 추증했다.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30호로 지정된 용문사의 상징적 나무이기도 하다. 높이가 61m, 둘레 10여m 수령 1,000여년으로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고목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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