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 수기 <14>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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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망명 수기 <14> 항전
  • 달라이 라마
  • 승인 2009.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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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제 9장 항전

날씨가 개이고 길이 열렸다. 두 나라 국경에서 인도 시킴측에 이별하고 고국땅에 들어서니 티벹??염불, 깃발 속에 커다란 중공기와 모택동 초상이 환영한다고 나왔다. 서글픈 풍경이다. 중공군 장성도 보였는데 다행하게도 덜 사나운 사람이었다.

중국사람 중에도 공산주의만 아니면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1958년 우리쪽에 가담하여 자기나라에 9개월간 대항하고 인도로 함께 망명한 사람도 있다.

나는 라사까지 가는 연도에 들르는 마을마다 법문을 했다. 형들이 인도에서 중공의 약속이행을 기다리고 있으니 나도 슬쩍 중공 태도를 떠보기 위하여 속에 든 말을 해봤다. 1955년 중공방문이래 우리는 중공과 종주관계가 아니고 자치를 약속받았으니 각자는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했다.

우리 의무는 누구의 잘못이든 옳게 고쳐야 하고 중공은 우리를 도우러 왔을 뿐이니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들 정부를 거역하는 짓이라고 했다. 그 대신 우리 정부도 중공과의 조약을 철저히 지키도록 지시했다.

중공군이 처음엔 잠잠하다가 외국 영향을 받았구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편 동부의 항전은 가열되고 피난민은 라사 근교까지 몰려, 이들의 입을 통한 중공군의 만행은 점점 티??전국으로 소문이 나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중공군은 얌전한 체 노력했고, 내가 인도에 가 있을 동안 티??사람들이 자기들의 주둔 이유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라며 향후 6년간 개혁계획을 연기 했다고 사과했단다. 그러나 무마책은 너무 늦었다.

동부에 폭동이 일어나서 우리 정부에 알릴 사이도 없이 처리했다고 공표했다. 당황한 쪽은 우리 정부였다. 물론 동부의 내막을 몰랐다고야 못하지만 중공이 내놓고 떠들 줄 상상도 못했다. 공식발표라고 끝나기 바쁘게 그들은 본연의 성질로 되돌아 갔다.

나는 인도에서 환대받은 답례로 네루를 라사에 초청했다. 오기만 하면 우리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중공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 했다. 네루는 수락했고 중공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뭐가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았어야 했다.

거의 준비가 다 돼 가는데 중공은 티??내의 보안문제를 책임 질 수 없으니 불가하며 티??사람들이 환영은커녕 가해할 것이라고 묵살했다. 중공은 외국 지도자에게 티벹??현실을 보일 수 없었고 나는 다시 외국과 단절되고 말았다.

피난민들이 전하는 말은 동부 일대의 실상을 점점 묘사하기 힘들어 아마도 영원히 알려지지 못하게 돼 갔다. 이런 유격대는 수만 명으로 늘었고 중공은 폭격기까지 지원받고 비전투원인 사찰 내부까지 반동분자 동조자로 처리했다.
고문하거나 투옥하거나 살육하고 사찰을 포함한 마을은 없애버렸다. 사찰의 기물은 몰수했다. 종교적 상징은 파괴했다. 또 종교는 인민을 착취하고 석가는 반동분자라고 선전했다.

이 기사가 라사에 흘러 들어오고 티??사람들이 분노하자, 중공군은 한 장에 5원 준다며 회수하기에 혈안이 됐다. 만일 중공이 티벹??조국이요, 같은 국적의 인간으로 대접하려면 최소한 동부에 시도한 방법은 취소해야 했다.
티??사람들이 받드는 신앙을 훼손한 중공의 수단에는 용서할 수 없었고, 어떤 탄압이라도 겁내지 않고 항전을 각오했다. 내가 인도에서 귀국하자 전국에서 무력 항전이 속속 일어났다. 서부와 중부가 비교적 평온했다. 나는 중공군에게 무차별 폭격을 항의했고, 그들은 중지시킨다 말뿐 공습을 계속했다.

라사에 집결한 동부인들이 1만 명을 육박했다. 이들은 피난 온 보복을 막아달라고 정부에 청원했다. 중공군은 그러지 않는다고 확약했으나 피난민들은 믿지 않고 서면으로 공포하라고 요구했다. 중공군은 거절했다. 만일 이 증빙이 다른 나라로 새 나가면 보통일이 아닐 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대신 서면 확약을 했었으나 피난민들은 당장 박해의 위협을 느끼며 라사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못된다고 밤사이 빠져 나갔다. 결국 유격대에 합류했다.

중공군은 우리 정부에 화를 냈다. 이런 일이야말로 나를 진퇴양란의 구렁텅이에 빠뜨렸으나 유격대를 이해하고 존중했다. 남녀노소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싸울 일 밖에 없다. 동부의 만행을 듣고 복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유격대는 달라이라마를 위하여 싸운다고 했다.

다시 간디를 생각했다. 이처럼 변하는 생활이라면 어떤 충고일까, 아무리 큰 폭력이라도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반면 동부에서 우리 민족을 없애는 예를 봐서 똑같은 폭력을 쓰면 얼마나 간단히 국토가 악랄한 고초를 겪을지 뻔했다. 나는 백성들에게 무기를 들지 말고 티??전체가 동부처럼 되지 않도록 자제하자고 호소했다.
정부에서는 유격대에 대표를 파견해서 내 뜻을 전했다. 중공군의 확약서도 보냈는데 무력을 포기하면 지금같은 보복을 않을 것이라 써 있었다. 그리고 중공은 무장해제를 원했으나 우리 정부는 가당찮다고 말렸다.

나는 매일같이 중공 수뇌들과 만났으나 그들은 무관심 뿐이었다. 주은래가 인도에서 한 약속을 상기 시키고 6년간은 별일 없을테고, 티벹??소망과 어긋나는 짓도 하지 않는다고 되풀이었다. 그러나 동부는 그 되풀이의 반대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티??땅이 아니고, 자기들의 영토니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나도 끈질기게 항의했다. 그러자 듣는 척 엉뚱한 제안을 해왔다.

동부진압을 티벹군??맡으면 후원만 하겠단다. 우리 정부는 겨우 라사의 치안유지 규모인데 유격대와 손을 안잡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했다. 결과는 우리 정부와 중공군의 정면대결이 되고 말았다. 중공군은 뭐든지 얼렁뚱땅 식으로, 동부는 꼭 반동분자라는 말을 넣으라고 고집했다. 반동분자라는 단어가 그들에겐 특별한 뜻이 있는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무의미했다. 그들은 유격대가 얄미워 하는 소리고 우리는 존경하는 뜻으로 썼다. 그런데 이 문제가 외국에 잘못 알려진 모양이다.

중공 당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7년씩 통치한 지방에서 반군이 나왔다니 우리 정부를 비난할 일이 못됐다. 우리에 대한 불평과 규탄만 끝이 없었다. 반동분자를 진압하지 않는다, 티벹군??해이하게 둬서 반동분자가 군사장비를 마음대로 갖고 가서 수백의 중공군을 죽게한다, 중공군도 할 수 없이 대항하겠다 등의 내용이다.

중공군은 우리가 싫어하는 점을 알려 하지 않고, 왜 항전하는지 모르고, 왜 죽기를 각오했는지 관심이 없었다. 우리 정부를 욕하는 한편 제국주의자 망령을 쫓아 다녔다. 인도로 망명한 티??사람들이 제국주의자들과 제휴하고 그 사람들이 티벹내??분란을 충동하는데 명단 속에는 지난번 해임시키라고 해서 해임된 수상, 나의 형들, 모두 9명의 국적을 박탈하랬다. 그 9사람들은 국적의 유무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박탈한다고 해서 불편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라사 공기는 험해졌다. 중공군과 우리 정부는 기왕에 말다툼이 시작됐고 그들은 자신들 민간인에게 무장시키고 요새를 강화했다. 인제 자위 수단으로 중공인의 권익만 보호하지 그 외는 책임 못진다고 소리쳤다.

시민들 앞에서는 너희 정부가 반동분자와 한 패니 처단할 수밖에 없다고 선전했다. 방법은 총살뿐만 아니었다. 여자들 모임에 가서는 고기에 파리가 낀 까닭은 고기가 썩어서 그러니 석은 고기를 없애야 파리가 없어진다고 빗대어서 하는데 여기서의 파리는 유격대이고 썩은 고기는 나라는 것을 암시했다.

중공군은 정부가 유격대 편이라 하고 유격대는 정부가 중공편이라 했다. 유격대에 보낸 대표들도 싸움터에 합세했다. 너무 늦게 보냈고 내 호소는 되려 항전만 부채질 했다. 유격대는 돌아갈 집도 없어졌다. 이때 나는 단념상태였는데, 중공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고를 냈다.<계속>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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