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만수산 무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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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만수산 무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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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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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아미타 도량

부여군 만수산 남쪽 기슭에
무량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차령산맥이 지나는 만수산(萬壽山) 남쪽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차령산맥은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충청북도 북부를 거쳐 충청남도의 태안반도(泰安半島)로 점차 낮아지면서 그 남서부에 구릉지를 이루고 많은 산을 일으킨다. 만수산은 그 하나로 보령군과 군계(郡界)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영화롭던 옛 백제의 고도(古都) 부여군 일대, 신라인은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서쪽인 이 지역에 무량사를 창건하였다.
부여읍(扶餘邑)에서 대천(大川)가는 국도(國道)를 따라 대략24km지점에 무량사가 있다. 사찰입구의 마을은 한겨울의 시골 마을 답지 않게 움직임이 활발하고 관광철도 아닌데 번화한 상가(商街)가 나그네의 눈을 의아스럽게 한다. 그러나 곧 그 의문은 무량사 계곡의 물을 보면서 풀렸다. 무량사 뒷산이 석탄산지로 탄광지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계곡의 물이 검을 수 밖에…

문성왕때 무염국사가
구전(口傳)에 의한 무량사의 창건배경은 통일신라 30대 문무왕(664~680)때, 무염국사(無染國師) 또는 범일국사(梵日國師) 창건설로 전해지나 두 국사의 생몰년대에서 시차(時差)가 있음을 알 수 있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두 분 스님의 약전을 살펴보아 무량사의 창건배경을 짐작해 본다.

무염국사
무염국사는 신라 29대 무열왕의 8대 손이다. 애자왕 2년(801년)에 출생하여 진성여왕2년(888년)에 입적하였다.
13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출가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이라 불릴만큼 총명하였다. 화엄종찰인 부석사에서 석징(釋燈)스님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21세에 당나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 여러곳을 다니며 수행하여,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란 칭호를 받을 정도로 그의 법력(法力)은 뛰어났다.
문성왕7년(845년), 44세의 나이로 귀국하여 웅천(熊川: 현 公州의 옛지명) 오합사(烏合寺)에 있으면서 제방의 납자들을 접하니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이 후,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개조(開祖)가 되어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진성여왕 2년, 88세의 나이로 입적하니, 국사가 주석하던 성주사(聖住寺)에 비를 세웠다. 지금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에 성주사지(聖住寺址)가 비와 함께 전해온다.

범일국사
범일국사는 신라의 관족(冠族)출신으로 현덕왕 2년(810년)에 출생하여 진성여왕3년(889년)에 입적하였다.
15세에 출가하고, 흥덕왕 때인 20여 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법을 구하고 문성왕8년(847년), 37세에 귀국하여 명주(溟州:현 강릉지방)에서 사굴산파(闍崛山派)의 개조가 되었다. 지금 강원도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에 사지(寺址)가 부도와 함께 전해온다.
위 두 스님의 약전으로 미루어 보아 무량사의 창건조는 문성왕때 무염국사로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현재 무량사의 위치는 보령군과 군계에 접하고 있어 옛날 무염국사가 주석하던 성주사지(聖住寺址)와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이다.
원래 큰 사찰이 있으면 법력있는 스님이 계시고 그에 따라 많은 수행자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많은 대중의 모임은 수용 능력의 부족과 대중이 많으므로 공부에도 장애가 되어 인근의 산중에 새로운 수행처를 마련하고 수시로 큰스님의 지도를 받는다. 무량사도 이러한 수행도량으로 창건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문무왕 대(代)는 무염국사의 생몰년대와 많은 시차(時差)가 있음을 볼 때 문성왕대(代)가 잘못 전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무량사의 창건조가 무염국사라 한다면 사찰창건은 당나라에서 귀국한(845년) 이후가 되리라 생각된다.

전해오는 이야기
무량사는 창건때부터의 사찰역사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산내에는 조선조 세조 때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의 부도가 전해온다.
수양군(世祖)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김시습은 비통하여 벼슬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만년에 무량사에 머물다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지 않고 묘를 썼다가 3년 후 파보니 육신은 부패되지 않고 잠자는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화장을 한 후 사리가 나와 부도를 세운 것이다.
또 진묵대사(震黙大師)와 무량사의 불상 점안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조선조 광해군 14년(1622년), 무량사에서 불상을 봉안하고 당시의 기승(奇僧) 진묵대사에게 점안(點眼)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송광사(松廣寺)에서도 불상 점안이 있다고 청을 받았다. 진묵대사는 두 곳을 갈 수 없어 무량사에는 수주(數珠;영주)를 보내 증명(證明)을 하였다고 한다.
앞의 진묵대사 이야기로 보아 광해군 때, 1622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무량사는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했으리라 짐작이 되며 오늘날 무량사의 주요 건물인 극락전과 삼존불은 이때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소장문화재
· 극락전 : 보물 제 356호
· 오층석탑 : 보물 제 185호
· 석등 : 보물 제 233호
· 당간지주 : 지방유형문화재 제 57호
· 김시습부도 : 지방유형문화재 제 25호
· 김시습영정 : 지방유형문화재 제 64호
지난 1972년 문화재 관리국의 협조로 퇴락된 오층석탑을 해체·복원할 때 탑에서 녹색사리 1과, 수정사리 93과 금동불상 5불이 발견되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한 산중에 있는 사찰의 창건은 커다란 의미을 부여받는다. 법력있는 한 스님이 국토를 밝히며 중생성숙의 구세원력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만수산 무량사(無量寺) 주불(主佛)이 아미타 부처님이시다. 아미타불 국토, 서방국토, 무량광명 국토를 생각게 한다. 끝없는 광명으로 시방세계를 두루 비치며 중생에게 한량없는 안락을 베풀고자 원력을 세우신 아미타 부처님, 이 국토에 나투시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무량사의 정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무량사를 돌아보면서 옛 선인들의 창건의지는 도량에 살아 숨쉬고, 구석구석 남아 있어 후세인들에게 귀의처가 되어야 할텐데 지워져 버린 사찰의 역사, 창건정신, 묻혀버린 기왓장 하나하나에서 순례자를 가슴 아프게 한다. 경내에 있는 탑과 석등, 당간지주 등만이 긴 역사를 말하는 듯 나그네를 맞는다.
다행히 1970년대 삼호(三護)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오늘의 무량사로 일신 복원하였다. 그리고 지난 83년 현 주지 성운(性雲)스님에 의해서 요사체가 신축되어 도량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지나간 무량사의 역사를 돌아보며 아미타 부처님의 자비하신 광명이 온누리에 가득히 부어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산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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