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의 환경적 요인
지리적으로 중국과 인도는 놓은 산맥과 열사의 사막이 가로놓여 고대로부터 인간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험준한 지형적 악조건을 넘어서 교통이 길을 제시한 것은 -경제 교류를 위한- 대상(隊商)에 의한 무역로의 개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몇 갈래의 길이 있는데 크게는 천산남로(天山南路)와 천산북로(天山北路)라 할 수 있다. 이 길들은 소위 비단길(Silk Road)로 불리우며 돈황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돈황은 북경에서 비행거리가 4천km나 되는 중국의 서북변방 사막지대 한가운데 위치한다.
고대로부터 유럽,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며, 서역과 밀접한 교류를 하던 시대에 중국불교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고, 지금은 중국 불교미술의 가장 큰 석굴사원일 뿐만 아니라, 세계최대 채색소조, 벽화박물관으로 중국문화사에 우뚝선 기념물이라 하겠다.
돈황미술은 중국미술에서 분리하여 중앙아시아 미술로 정리하여야 하나, 한정된 지면으로 인하여 중국미술에 포함시켜, 중요 석굴사원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중앙아시아 미술로는 오늘날 중국의 신강(新强)지방과 소련의 투르케스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돈황을 비롯한 카쉬가르, 코탄, 쿠차, 투르판을 말한다.
이들 지역은 한(漢)시대로부터 서역으로 이르는 통로로서 점차적으로 중요성을 갖게되었고, 그 중 돈황은 중국 국경선에 위치한 군사.정치.상업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이러한 지정학적 성격은 돈황의 불교미술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간다라 불교미술을 근간으로 하면서 중인도의 마투라미술과 중앙아시아 여러지역의 조형적인 요소가 가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미술 및 당시 이 지역에서 부침하던 티베트, 흉노등의 미술까지 어우러지면서 가이 백천의 강이 바다에서 합일하듯한 국제적인 미술양식을 창출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각 지역의 다양한 조형미술의 특성이 가미되었다고 하나 ‘불교’라는 종교에 융합되어 불교의 도상적 규범속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초기에는 국제적인 여러 양식들이 뒤섞여 복잡한 양식적 전개가 있었으나 기간이 지날수록 중국화로 기울어졌었다.
돈황 막고굴의 개착 및 석국유형과 미술사적 위치
감숙성 돈황 명사산(鳴沙山) 동쪽기슭 1.6km에 이르는 천불동(千佛洞) 또는 막고굴(莫高窟)이라 이름하는 무수한 석굴이 있다. 증국대륙에 현존하는 50여개의 석굴중 채색 벽화 · 소조불로 불국토을 현현한 듯한 이 천불동은 366년에 락준(樂樽)이라는 스님이 명사산 꼭대기에 천불이 하현하는 것을 보고 석굴을 개착했다고 하며 본격적인 석굴개착은 4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7세기(698 A.D)까지 천개 이상의 석굴이 개착되었다고는 하나 신뢰성이 없고 최근 ‘돈황문물 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총492개의 석굴이라 한다. 현재 가장 오래된 유적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엽사이의 석굴이다.
돈황의 석굴은 14세기까지 북위(北魏), 수(隋), 당(唐), 오대(五代), 서하(西夏), 원(元)대에 이르는 천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조성되었지만 그 중 당(唐)대에 조성된 것이 가장 많다.
돈황의 석굴은 2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그 첫 번째 유형은 268, 285동으로 대표되는 복합굴 형식으로 예배를 위한 주실(主室)과 수도자들이 거처하는 승방(僧房)이 함께 있는 마치 인도의 비하라(vihara, 毘河羅)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두 번째 유형은 254, 257, 251, 248동으로 대표되는 예매굴 유형으로 이것은 중심에 탑주(塔柱)가 있는 석굴과 272, 249, 296동으로 대표되는 돔형 천정이 특징인 석굴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모두는 승방이 없고 예배굴만 있는 예배굴 형식이다.
돈황의 석굴들은 인도의 마제형(馬蹄型)인 탑원 형태보다 승원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초기에는 인도식으로 모방을 했겠지만 후일 중국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고 보겠다. 굴내 좌우 벽면에 불감을 만들고 여기에 불보살상을 배치한 구조를 갖고 있다.
돈황 명사산 석질은 왕모래가 섞여있는 역암(礫岩)으로 개착하기는 쉬우나 벽면에 바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기에는 부적당하다. 이런 까닭으로 석굴을 개착하고는 벽면에 흙(석고)을 발라 벽화를 그렸는데 당시 성행하였던 석가, 미타, 약사 등의 정토변상(淨土變相)과 법화, 유마, 화엄경등의 변상 및 본생담, 불전도 등의 그림이 그려져있는데 이를 연이어 보면 높이 5m, 길이 25km가 되는 엄청난 스케일의 벽화이다. 제일 초기 그림들은 북위 태무제 폐불이후 문성제에 의한 흥불기인 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다. 그 후 불교의 최전성기인 당나라를 지나 송대 이후 불교가 쇠퇴해가면서도 이곳에 불화와 불상의 제작은 맥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14세기까지 계속된다.
석굴 개착에 용이한 역암은 입체로 조각하기에는 부적당하여 조각(彫刻)이 아닌 소조(塑彫 Stuuo)의 기법으로 불상을 만들게 되었다. 이 소조기법은 아프카니스탄 동부지방의 쿠샨왕조 후예들에 의한 신간다라양식(New Gandharaism)의 소조기법을 계승한 것으로 나무골재에 짚, 갈대등을 새끼로 묶고, 강바닥에 침전된 고운 점토(粘土)와 삼베, 모래등을 섞어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백토로 마감한 후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하고 금박등으로 장식을 하였다.
이것을 채색소조라 하며 현재 2천4백여구가 남아 있지만 역사의 격동기에 훼손당하고 각국에서 도굴해간것을 상상으로 복원해 본다면 그 규모와 숫자는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돈황의 막고굴은 채색소조 벽화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돈황 석굴의 불상양식
돈황의 소조불상들의 양식적 전개는 막고굴 개착의 역사와 비례한다 하겠지만, 우선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것은 극히 한정된 일부이다.
초기 불상으로 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북량(北凉)때 것(275,272,268洞)으로 중국과 인도의 양식이 혼재하고 있지만 인도 양식이 돋보인다.
북위가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시킨 439년을 기점으로 돈황은 서역 경영의 전진기기로 군사, 정치, 상업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얼마후 태무제의 폐불(446년)과 문성제의 흥불조치(452년) 이후 서역과의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이곳 불상양식에도 인도미술의 영향이 심화된다. 제259동의 불상을 위시하여, 253, 254, 251, 263동들의 불상군(群에서 건강하며 균형잡힌 불신(佛身)을 통하여 당당하고 수려한
용모를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제259동의 북벽의 불상(도판Ⅰ)을 보자. 사실적인 인체표현은 간다라 전성기의 불상을 참고한듯 하며, 분명한 이목구비와 얇은 법의 속의 불신에서 외외하고 넘치는 기상은 선비족의 젊은 귀족을 모델로 하였으리라 추측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원색의 강렬한 색채를 통하여 더욱 신비화하고 이지적이며, 강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육계는 크고, 머리카락도 굴곡이 심하지 않은 파상형으로 정리하였으며, 넓은 이마, 이목구비가 분명한 가운데 미소짓고, 어깨는 힘이 들어있지 않아 부드럽고, 두손은 선정인을 취하였으나, 보통 선정인의 수인과 달리 오른손은 왼손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법의는 얇으며, 법의 주름선을 음각으로 처리하여, 전신을 감싸고 있는데 굽타시대 신마투라양식과 유사하다. 한쪽 무릎이 파손되어 있지만 좌우· 대칭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같은 굴(제259동) 서벽면의 2불병좌상(도판Ⅱ)을 보면, 역시 당당하고 유연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높은 육계, 자유스러운 유희좌 편단우견의 법의, 원만한 상호, 유려한 의습문(衣褶文) 표현, 법의속의 건장한 불신 등에서 이 시대 미술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물론 내용은 법화경 견보탑품(見寶搭品)의 다보(多寶)불, 석가불을 표현한 것이다.
지난번에도 지적을 했었지만, 중국미술에서는 균제성, 정면성, 완벽성등이 실감나게 강조되는데 앞에서 예를 든 두 불상이 거의 좌우대칭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후일이는 주존(主尊)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들의 삼존불, 여기에 나한이나 천황이 각각 2위가 첨가되는 오존상(五尊像), 칠존상(七尊像)의 인물 구성에서도 좌우대칭의 안정감과 주존중심의 상징성이 돋보이는데 이는 중국사상의 특색인 억음부양(抑陰扶陽)의 원리와 가부장적 성격의 일면을 불상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하겠다.
남북조시대 화북을 중심으로 한북조의 특징적인 불상의 좌세로는 교각상(交脚像), 사유상(思惟像), 이불병좌상은 특기할 만하며 법의의 양식 또한 중국적인 도포(道袍)양식의 출현으로 불교가 중국에 완전히 토착화 되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돈황 막고굴의 영광은 수(隨)나라 양제, 문제의 흥불기를 지나 당나라에 들어와 중국 불교문화의 황금기를 이루면서 더욱 화려한 꽃으로 개화하였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