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혜(大慧)선사
대혜선사가 말하였다.
근래에 법을 잡고 행하는 자 중에 진여철(眞如喆)과 같은 사람은 없으며 총림을 잘 보호하기는 양기회(楊岐會)만 같은 사람이 없다. 자명(慈明)은 진솔(眞率)로써 짓는 일(법을 쓰는 것)에는 소홀하고 간략한 데가 있다. 양기는 몸을 잊고서 그를 섬기되 다만 그의 공부가 뚜렷하지 아니할까를 두려워하였으며 바르게 판단하지 못할까를 걱정하였다. 아무리 추위가 몰아 닥치거나 폭서가 밀려와도 잠시도 자기 몸 돌보는 일을 급하게 여겨 공부자세를 흩은 일이 없었다. 남원(南源)선사에서부터 흥화(興化)선사에 이르는 30년 동안에 그가 법의 강률(綱律)을 다잡고 있었다. 그러나 자명은 자기 한 대로서 끊어지고 말았다.
진여는 처음에 행각하며 스승을 찾아 수행할 때부터 안목을 얻어 세간에 나와 대중을 거느리는데 이르기 까지 그 사이에 법을 위하여 몸을 잊고 굶주리고 목마름을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잠시라도 당황하는 기색 없고 한마디도 잘못된 말이 없었다. 다만 한 방안에서 수연히 앉아 고요한 것을 스스로 즐겼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만약 남자로서 안으로 높은 안목과 넓은 견해가 없고 밖으로 엄격한 스승과 어진 벗이 적다면 능히 그릇을 이룰 자, 드물다』하였으니 아, 두 노장이야말로 참으로 천 년을 두고 후배들의 아름다운 모범이로다.
[2] 석총공(石總恭)선사
석총공선사는 도행이 남달리 뛰어났고 또한 재주와 역량이 많았다. 천동굉지(天童宏智)선사에 오랫동안 의지하면서 총림의 크고 작은 직무를 모두 맡아 지냈다.
하루는 어머니가 찾아와서 그에게 말하였다.『스님은 도를 닦고자 출가하여 행각한 본래의 뜻이 생사를 요달하여 부모를 제도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소. 그런데도 스님은 오랫동안 총림의 주사(主事)가 되었소. 적어도 인과를 밝히지 못하면 장차 내가 죽어서 화를 입게 되리라.』 공선선사가 말하기를『저는 총림 일을 맡아 있으면서 삼보의 물건을 터럭 끝만큼도 속임이 없습니다. 불 하나를 키더라도 분명히 삼보의 불과 저의 것을 분별합니다. 그 일이라면 아무 걱정 마십시오』하니 어머니가 말하였다.『그렇지만 물을 건너매 어찌 발이 젖지 않을 수 있으리까.』
[3] 대혜(大慧)선사와 굉지(宏智)선사
소흥(紹興)의 계해년 겨울(서기 1143년), 대혜선사는 그때까지 귀양살이 하다가 사면이 되어 북으로 돌아왔다. 그때에 육왕사(育王寺)는 산주가 비어 있었다. 굉지선사가 그 후임으로 대혜선사를 추천하였다. 굉지선사는 대혜선사가 육왕사에 오면 대중이 많아서 반드시 양식의 곤란을 받을 것을 미리 알았다. 그래서 미리 지사(知事)에게 이르기를,『너는 내 부탁이니 앞으로 살림살이를 특별히 간소하게 하여 재정을 꾸려가도록 하라. 그리고 향적(香積)창고에는 평소의 배를 비축해 두도록 하라.』하였다. 지사는 이른 대로 하였다. 다음 해에 과연 대혜선사가 돌아오니 대중이 만 명을 넘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양식이 부족하게 되었다. 대중들이 모두 당황하였는데 대혜는 대중을 어기지 않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굉지선사는 마침내 쌓아 두었던 물건을 모두 보내어 그를 도왔다. 그래서 모인 대중들은 모두가 그 도움을 받았다. 대혜는 굉지에게 감사해서 말하기를『고불(古佛)이 아닌들 어찌 능히 이런 역량이 있으랴.』하였다.
어느 날 대혜는 굉지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우리 둘은 다 늙었소. 스님이 노래 부르면 내가 화답하리니, 내가 노래 부르거든 스님이 화답하시오. 누군가 먼저 죽거든 남은 사람이 뒤처리를 하도록 합시다.』하였는데 해를 넘어서 굉지선사가 입적하였다. 대혜선사가 마침내 상례를 주간하여 서로의 약속을 지켰다.
[4] 원각자(圓覺慈) 법사
원각자 법사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겸비하여 많은 학자들의 숭배를 받았다. 동액사(東掖寺)가 비니 능(能) 문(文) 두(兩) 대사가 자법사를 추천하여 주인이 되게 하였다. 자법사가 동액에 이르니 법석이 크게 성장하였다. 어느 여름날 크게 더웠다. 자법사는 강(講)을 마치고 방장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마침 문법사가 왔다. 자법사가 쉬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이 동액 도량은 대대로 모두 다 높은 자가 주장이 되었으니 강을 파하면 법당에 있지 아니하면 반드시 선당에 있어서 드러누워 편안히 행한 적은 아직 없었소.』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자법사는『어찌 감히 그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리까.』하고 그때 이후는 혹서에도 조금도 구애하지 않고 행하였다.
[5] 마조(馬祖)선사
남악 회양선사가 육조선사에게 참예하였을 때 육조선사가 말하기를 반야다라(般若多羅)의 예언이「그대로 불법 한 가지가 그대를 떠나서 앞으로 한 말을 낳아 천하인을 밟아 죽이리라」하였는데 마조가 바로 그 분이다. 마조에게서는 84인의 선지식이 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관음보살의 응화신이라 하였다. 가는 곳마다 왕신이 모두 와서 공급하였다.
마조선사에게 한 원주가 있었는데 그는 20년간을 삼보의 상주물을 관리하면서도 한 장의 문서도 하지 않았었다. 한번은 관리가 그를 조사하여 옥에 가뒀다. 잘못한 일은 없어도 상주물을 관리하는 동안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이라 증거할 말이 없었다. 원주는 옥에 있으면서 말하였다.『우리화상은 범부인지 성인인지를 나는 모르겠다. 내가 20년간을 저를 도왔는데 오늘날 내가 이런 고생바다에 빠지는 과보를 얻었으니∙∙∙∙∙∙.』 마조는 이 일을 알고 시자를 시켜 향로를 갖추게 하고 단연히 정(定)에 들었다. 그때 원주는 옥중에서 홀연히 마음이 열려서 20년간에 다루었던 물건과 돈의 출입을 일시에 생각해냈다. 그리고 선사를 불러 말을 하여 모두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계산이 하나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6] 고암(高庵) 법사
설당행(雪堂行) 법사가 말하였다.『고암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곧으며 매사에 법도가 있었고 자기 스스로를 처신하는 데는 이를 데 없이 간소하였지만 남에게 베풀 때는 매우 너그러웠다. 혹 병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자기 때문에 병든 것처럼 대하고 밥 먹고 똥 오줌 받아내는 일까지 스스로 살폈다. 그리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 들어주고 죽은 후까지라도 정성을 다하여 그가 가진 모두를 털어 내놨다. 그의 깊은 자비심이 지극하기를 이와 같았으니 참으로 말세에 훌륭한 규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