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경봉 노사의 설법 요약인데 싣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問責 記者)
佛法은 마음의 당체
원래 불법은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불법이라 하면 무슨 특별한 문자나 기이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처럼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불법 즉 마음의 당체는 문자를 여의고 말을 떠난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빌린다면 오늘 남은 따사롭고 바람은 화하며 산은 층층하고 물은 잔잔히 흘러가는데 눈 소에 매화꽃은 방긋이 웃음 짓고 들새는 노래하네. (今日日湲風和 山層層水潺潺 雲梅笑野鳥歌)
아침 안개는 새벽하늘에 오르고 비는 청산을 지나가니
머리 머리에 비로자나불이요 물물이 화장세계로다
이곳에 이르러 구리쇠 눈동자와 쇠눈으로 보아라 그림자 없는 기러기는 일천
시내 달에 날고 돌사자가 동쪽을 향해 투구려 소리 지르니 하늘의 두우성은 서쪽으로 옮기네
(麚登曉日雨過靑山 頭頭 盧物物華藏 到這裏 銅晴鐵眼看 無影鴈飛千澗月 石獅東吼斗移西)
이것이 억지로 문자를 빌려 진리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말을 여읜 것이다. 그대로가 진리며 그대로가 실상인 것이다.
진리니 실상이니 하는 것도 억지로 빌려 쓴 문자요 말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능금 하나를 먹었을 때 그 맛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느냐? 만일 말로서 대답하였다면 그것은 말이지 맛이 아니다. 그 맛은 먹은 사람 자신이 마음으로 체득할 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처럼 진리도 마음으로 개달을 뿐이지 말이나 문자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석가여래께서 49년간 설하신 팔만 사천 법문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열개의 손가락의 의미
헤아려 보면 손가락도 열개고 발가락도 열개며 몸의 구멍도 열개다 손가락과 발가락 열개는 보이는 대로이지만 몸의 구멍을 살펴보자 눈알이 둘, 콧구멍이 둘, 귓구멍이 둘 입이 하나 대변 소변보는 곳이 둘 뱃구멍까지 하면 모두 열이다. 화엄경에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모두 수행의 점차며 증득의 계단이다. 이 계단을 실수 없이 잘 오르면 기어코 성불하고 만다. 남은 속일지라도 자신의 마음은 속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수행이나 증득도 속이지 못하는 것이다.
닦으면 닦은 만큼의 공덕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것을 모르는 우둔한 사람들은 이 수행과 증득을 스님 네들이나 화엄경 같은 데서 하는 것인 양 생각하지만 당치않은 말씀이다. 우리들 몸에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열 구멍이 잇는 것은 수행과 증득이 우리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수 행도 증독도 모두 우리들 마음으로 한다는 말이다. 피가 나도록 수행하여 증득하면 행경십신(行境十身 : 菩薩身· 願身· 化身· 力持身·相好莊嚴身· 威勢身·意生身· 福德身· 法身·智身) 해경십신(解境十身 : 衆生身· 國土身· 業報身· 聲聞身· 報支佛身· 菩薩身· 如來身· 智身· 法身·虛空身)이 저절로 원만하게 성취된다. 행경십신·해경십신도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心淸淨이 佛이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는 불가설 불가설 미진수 부처님이 계신다. 이 부처님들은 각기 맡은 바 세계가 있는데 극락세계의 주불은 아미타며 사바세계의 주불은 석가모니다. 이렇게 우주에 가득 찬 부처님을 총칭하여 불보(佛寶)라 한다. 그런데 이 부처님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맡은 바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법을 설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사바의 중생을 제도하기위하여 49년간 설법하셨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2520년이나 그 설법내용(經·律·論 等)은 아직도 이 사바의 구석구석에 메아리치고 있다. 이렇게 부천미들이 설법한 내용을 총칭하여 법보(法寶)라 한다. 이 설법내용을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전달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보살·성문·연각이고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한 조사님들이며 선사·법사·율사·비구·비구니다. 이들은 부처님의 유족을 받들어 이 우주의 곳곳에서 불법을 홍포하고 있다. 이렇게 혜등(慧燈)을 호지하여 불법을 홍포하는 분들을 승보(僧寶)라 한다. 이상은 사적(事的)으로 삼보를 살핀 것이지만 이적(理的)으로 보면 이러하다. 마음이 깨끗하고 맑은 것이 불보(心淸淨是佛)이고 마음이 청정하여 광명을 발하는 것이 법보(心光明是法)이며 맑은 광명이 곳곳마다 걸림이 없이 비추는 것이 승보(淨光處處無碍是僧)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통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삼보가 있다. 이 삼보는 마음을 환히 통달한 이가 아니면 수용하지 못한다. 그것은 벼는 불보이고 보리는 법보이며 콩은 승보다. 이 도리를 알려면 도안(道眼)이 열려야 한다. 벼 보리 콩은 음식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얻는 영원한 음식이며 보배다.
昭昭靈靈한 한 물건
지금 이 법석에 앉아있는 불자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각기 밝고 묘한 마음으로 법문을 듣고 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만 족할 수 없다. 한 가지 묻겠노라!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현재 이 법을 듣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데 정신을 팔지 말고 바로 여러분들을 목전을 살피라! 그저 소소영영한 것이 이 법을 듣고 있지 않는가? 이 소소영영한 것을 찾아내어 갈고 닦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곧 나를 찾는 길이다. 석가여래가 설산에서 고행하신 것도 이 소소영영한 마음자리를 찾아서 잃어버린 자기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잃어버린 자아를 발견하려면 정신을 한곳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걸핏하면 뜻대로 안된다는 말을 자주한다. 나도 모르는 주제에 마음이 뜻대로 될 리 없다. 마음을 뜻대로 하려면 「나」를 찾아야 하고 나를 찾으려면 정신을 통일해야 한다. 우리들의 생활은 무척 고되고 바쁘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마음을 찾아야 되겠다는 결심이 있으면 정신통일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전반에 걸쳐 하루 24시간을 쪼개어 보면 9시간을 근무한다고 하더라도 5시간은 밥 먹고 쉬게 되며 6시간은 잘 수 있다. 이렇게 따져도 4시간이 남는다. 이 4시간만이라도 적절히 이용하여 정신통일에 전념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4시간이 다 이용이 안 된다면 3시간도 좋고 2시간도 또는 1시간도 좋다. 이와 같이 조금씩이라도 매일 계속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료하고 한가한 시간은 저절로 정신통일로 변한다. 이렇게 정신통일의 상태를 오래오래 이끌어 가면 점차 9시간의 집무 중에도 5시간의 밥 먹고 쉬는 사이에도 6시간의 잠자는 동안도 모두 흔들림이 없는 일념의 경지(一念之境地)로 화한다. 그렇게 되면 매사에 관찰력이 빨라지고 기억력이 좋아지고 지혜력도 좋아진다. 이처럼 통일된 정신으로 사업에 임한다면 그 사업은 저절로 잘된다. 잘 될 수 있는 길을 환하게 비추어 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혼란된 정신과 암담한 마음으로 사업에 임한다면 그 사업은 저절로 망한다. 앞길이 캄캄하여 아무 것도 안 보이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잘 한다고 하는 것이 꼭 망할 짓만 한다. 결과적으로 빚더미에 눌리고 부도가 나면 남이 나를 망하게 한 것 인양 이 핑계 저 핑계로 남을 원망하고 증오한다. 이렇게 망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통일하고 마음을 밝혀야 한다. 마음을 밝히면 사업도 순조롭고 번민도 고통도 없어지며 원망도 증오도 생기지 않는다.
國家을 위하여 정신통일
우리는 개인을 위해서도 정신통일을 이워야 하겠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이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빠르고 좋은 무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일된 정신이다. 정신통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귀하고 값진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잇을 지라고 아무 소용이 없다. 도리어 적을 이롭게 하는 결과를 빚는다. 그 무기들은 뺏기고 말테니 말이다. 벽에도 구멍이 있어야 바람이 새는 것처럼 정신에도 틈이 생겨야 적이 엿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물샐 틈 없는 정신통일로 조상의 얼과 동족의 혈통을 굳게 지켜야 한다. 불교의 진리를 바탕으로 단결된 신라의 화랑은 백절불굴의 정신력으로 삼국통일의 위대한 과업을 달성하여 세계적으로 찬양받을 수 있는 민족문화를 형성케 하였다. 그 유적과 유물은 여러 곳에 많이 산재되어 있지만 특히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유명하다. 석가탑은 5층이고 다보탑은 11층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잘 모르고 있지만 우리의 몸뚱이는 석가탑도 되고 다보탑도 된다. 어째서 우리의 몸을 석가탑이라 하는가? 석가탑도 5층이고 우리 몸도 5층이기 때문이다. 발목이 1층, 무릎 뼈까지 2층, 허벅다리까지 3층, 허리까지 4층, 목가지 하면 5층이다. 또 어째서 우리 몸을 다보탑이라 하는가? 다보탑도 11층이고 우리 몸도 11층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석가탑의 5층에다 팔의 관절 여섯 개를 합하면 바로 11층이 된다. 우리의 두 손을 번쩍 들면 그대로가 다보탑이다. 그런데 우리 몸뚱이 탑에는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이 나 다보탑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기계들이 장치되어 있다. 그것은 망원경(눈) 선풍기(코) 청수기(귀) 방송국(입)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곧 호국탑이라는 사실이다. 이러니 우리의 몸뚱이도 훌륭한 호국탑이다. 이 호국탑은 천하일품이다. 망원경 등의 중요한 기계가 부착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활동까지 할 수 있다. 여기에 일념통일의 정신무장만 되어 있다면 국방은 철통같고 국력은 충천하라!
生命價値를 구현하는 길
정신을 통일하는 목적은 생명의 참된 가치를 구현하는 데 있다. 욕락에만 들떠 살아가는 허무한 생명을 본래 티 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의 당체로 환원케 한다는 말이다. 마음의 당체로 환원하려면 각자의 본분 상에서 길을 택해야 한다. 팔만대장경도 거두어 드리면 마음심(心)자 (여기서 말하는 心도 부득이해서 표현한 것이다.) 뿐이고 펼쳐놓으면 팔만사천문이다.
문이 이렇게 많아도 어느 것 하나 버릴게 없다. 문문(門門)이 마음[心佛及衆生 是三無着別]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일상생활도 도(道)아닌 것이 없다. 우리의 모든 것도 마음을 떠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업에는 상도(商道)가 있고, 농업에는 농도(農道)가 있으며 공업에는 공도(工道)가 있다. 또 밥 먹는 데 식도(食道)가 있고 차 마시는데도 다도(茶道)가 있으며 행·주·좌·와·어·묵·동·정에도 각기 그에 따른 도가 있게 마련이다. 이 길을 어기면 진리라 할 수 없다.
安心立命의 길
그러나 이렇게 고귀한 생명을 망각하고 도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사소한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고귀한 생명은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옷을 입을 때마다 깃과 동정 칼라와 앞 주름 등에는 신경을 곧추세우면서도 자기의 위대한 생명은 손질은커녕 찾는 것도 싫어한다. 안신입명(安身立命)의 진의를 몰라서 그런거다.
안신입명의 참뜻을 알고 싶으면 내가 묻는 말을 자세히 살피라! 「이 몸을 이 자리까지 끌고 와서 법문을 듣게 하는 그 소소영영한 것은 뭐꼬? 여러분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고 가는가? 안신입명처가 별게 아니고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바로 이 마음자리야!」
끝으로 문자는 아니고 언어도 아닌 법문이 또 하나있다.
[할 일할하고 법좌에서 내려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