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컬럼
불교라 해서 원만하고 관대하고 초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삶 자체가 투쟁이요. 무엇이 옳고 그른 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다면 갈등과 충돌은 오히려 필연일 수밖에 없다. 불교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 온통 靜寂이 지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불교하면 원만· 관대· 초연 그대로인줄 만 아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불교처럼 生의 괴롬과 사는 고뇌에 투철하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집념으로 일관하려는 생명력도 없을 것이다.
그런다면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괴롬이 어디 있고, 사는 기쁨과 대립하지 않는 고뇌를 생각이나 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으로부터 저항 없이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을 근거가 없으니 불법은 처음부터 대립·갈등·투쟁을 전제한다 할 것이다.
불교처럼 갈등의 歷程을 끝없는 쟁투로 살아가는 길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체념으로 대립을 외면하고 무기력하게 투쟁을 포기하며 無爲의 패배주의를 가르친다고 여겨짐은 이상하다 할 수 밖에 없다.
실상 佛敎史처럼 옳고 그름의 쟁투로 점철된 역사도 없을 것이고 불교사상사 같이 참과 거짓의 끝없는 투쟁사도 없을 것이다.
불교의 진면목은 이렇듯 破邪顯正의 운동이다.
더 오래는 그만 두고라도 쇠망의 국운 속에서 新生의 사상과 행동을 마련하여준 것은 萬海 였으니 그는 20세기 한국불교가 낳은 튼 별이 아니었던가.
이즈음 한국불교가 심상찮은 내분을 들어내고 있어 보는 이에 따라서는 불교가 갈 데까지 간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도 한다. 불교가 겉으로는 어느 때 보다도 융성한 모양인데 지도력 분규가 일고 있으니 形而下의 외모로 불교의 활력을 가름하기란 얼마나 피상적인가 하는 생각이 듣다. 한데 曹溪宗의 사정이 복잡·미묘한 모양이지만 불교의 내면 대립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내부 모순을 들어내는 불교계는 공동묘지에나 깃들일 고요에 싸여 있기 보다는 적어도 훨씬 건강하지 않겠나.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상 고요하고 무사하며 그래서 만족스런 표정 아래서 정착 병이 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에 비추어 또 인간의 본성으로 보아서 종교를 포함하여 모든 人間事란 겉으로 평정의 모습을 보일 때가 반드시 정상이란 법은 없다.
말썽이 일고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무엇이 문제인가가 뚜렷이 들어나 모두가 지켜보는 시선 속에서 잘못이 쌓여갈 염려만큼은 없게 된다.
말썽이 난다는 것은 문제를 덮어둘 의사가 없다는 증거다. 본질적으로 그런 긴장된 상황에서 문제가 더욱 악화일로를 갈리야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그리고 대처하기 나름으로는 공동체의 문제를 밝혀냄으로써 그 해결 방도가 들어날 수도 있다. 다만 분규의 초점이 인사문제 및 종권을 에워싼 것이어서 그것이 아무리 중대하다 해도 정신공동체의 문제치고는 꾀나 표피적이란 평을 피할 수 없다.
그런 것이 불교로서의 내면적 실질논란의 전부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물의는 아직도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다.
지도력 문제에는 발끈할 줄 아는 지도층이 어찌하여 그 밖의 영역에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무사안일을 일삼을 수 있을까. 밖에서 보는 不可思義다.
중생의 괴롬에 대하여는 할말도 없고 행도의 이유도 없는 것일까.
세상의 실상을 보는 불교의 역사의식은 과연 어떤 것인가.
불교가 처한 난국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苦가 문제인 것을-. 민생고 좌절· 허탈· 불만· 외로움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정신의 아픔. 불교는 무어라 입을 열어야 한다.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