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회고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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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회고와 전망
  • 관리자
  • 승인 2009.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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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ꊲ 한국 불교 회고와 전망



  인간을 인간답게 화육(化育)하는 길은 다기다양하다. 인간은 이 세상에 나면서부터 개체적인 빛을 안으로 발산하기로 하지만 밖으로 빛을 흡수하기도 한다. 안으로 발산하는 빛이 자각의식의 길이라고 한다면 밖으로부터 받은 덧은 역사의식의 투영인 것이다.
  인류문화가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를 살펴보면 자기 빛의 발현보다 남에게서 받은 빛과 소리의 영향(影響)이 큰 것이다. 이 영향의 누림이 이기적인 자기세계에서만이 이룩된다면 소아적인 자기국집에 함몰하게 되고 영향의 누림의 세계가 보편적인 방향으로 뻗어나갈 때 그것은 자기성장을 약속할 뿐만 아니라 문화 창조의 빛살을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계몽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역사가 비롯할 때 이미 문화는 배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는 정신적인 내분비적 자양분이 핵으로 응결되어 개체와 전체를 영양하고 또한 조화된 문화체(文化體)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문화체의 중심은 인간사고의 차원을 창조와 화합으로 인도하는 일심(一心)에서 기원한다. 인간의 마음이 항상 불변의 일심에 자리하게 하는 힘은 믿음에서 생성된다. 이 믿음을 우리는 종교라고 이름 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정신문화형성의 기초적 핵인 것이다. 오늘날 인간들은 정신문화형성의 원동력에 대해서는 하열시(下劣視)하는 경향이 짙고 문명한 생활의 범주 속에서 안일(安逸)을 일삼으려고 한다. 물질적인 향유로 사는 것만이 인간최대의 욕락을 누리는 것이고 행복증장의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정신문화 형성에서 겪어야할 자기고통을 도외시하고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형성은 전체의 조직이 원활하게 이룩되는 세계에서 차지하는 부분이다. 전체의 조직이 조화를 유지하지 못하면 그 전체 속에 내재되어 있는 개체도 파괴되고 말 것이다.
  종교는 전체를 형성하는 힘이다. 본래 선재(先在)하였던 존재를 본모습 그대로 존립케 하려는 화합의 율동이다. 그것이 기도·발원·노래·찬탄· 고행· 참회 등 그 무엇으로 표현될지라도 그것은 인간마음의 자리를 태양처럼 존재시키려는 힘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상실하려고 한다. 망각하려고 한다. 아니 짓이기고 살려고 한다. 오늘날 종교는 특수신분의 판도라의 상자인가. 아니면 그 특수신분도 판도라의 상자를 활용하는 묘법을 망각한 것인가. 그리하여 특수신분도 판도라도 겉도는 회전목마처럼 인간세계 제도 밖으로 우회하는 세기말의 목마가 되어버린 것인가. 우리 한번 이 겉도는 목마를 멈추게 하고 우리 마음에서 새롭게 회전시킬 오늘의 마음도 찾아 나서자.




  정화(淨化)란 무엇인가. 순수의 결정체로 형성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불순물이나 불결성을 제거하는 것을 정화작용이라 한다. 물리적 방법으로 취하는 정화작용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단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화라는 개념이 어떤 조직의 정화나 제도의 정화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복잡성을 면치 못한다. 유기적인 인간관계에서 이룩된 조직의 정화는 물리적 정화방법에 비하여 간단치가 않다. 인맥·지맥·혈연 등 얽히고 설 켜서 순일한 단일체로 변용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 어려운 정화운동을 한국불교는 시도하였고 그 시도는 혁명적으로 완성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외양적인 통합은 있어도 핵심적인 통일은 이룩되지 아니하였다. 일불제자(一佛弟子) 하나로 귀일한다고 하였지만 급기야 조계·태고 양종으로 분립하는 비극을 초해하였다. 처음 정화의 깃발이 나부낄 때는 교단정화가 선결문제였다. 즉 「불법에 대처 없다」는 법고를 크게 울려 한국불교 교단은 부처님이 화합 승가를 조직할 때와 마찬가지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로 하여야 한다는 원칙으로 승려 취처를 절대로 반대하여 교단조직의 정화부터 수행하려 하였다.
  교단조식의 정화 이것은 한국불교교단의 기필코 이룩해야 할 명제였고 이 지상명제를 위하여 법란(法亂)과 희생이 뒤따랐다. 어렵고 지루한 정화불사였다. 물리적 전화작용이 아니라 인간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명분과 현실은 걸맞지 아니하였다. 승려취처측의 완강한 항거, 수좌 승들의 법정투쟁 등, 서로의 공방전은 종교인이 자행할 일들이 아니었다. 법연(法緣)에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인연(人緣)에 얽매인 것이라 해결될 것은 막연하였다. 5·16이후 최고회의의 간여도 비상총회가 구성되어 일련의 결말이 오는 듯 하였으나 무위한 결과로 빚어지고 하나는 대한불교조계종 또 다른 하나는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분립하게 되어 양자간에는 간헐적인 분쟁은 있어도 일단 휴전을 선언하게 되었다.
  단일 교단의 순수성으로 정화하려다 완결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한국불교조계종의 득실(得實)은 대단한 것이다. 일제치하 승단생활 때 멸시와 방랑을 일삼다가 종권의 노른자위에 올라앉게 되었다. 정화의 전일체(全一體)를 이룩하지 못했으나 조계종단의 통수권을 수임 맡는 한국불교 수위교단을 형성하는 데 그 열과 성을 다하여 불교근대화의 근간이 될 3대 불사를 한 국민 앞에 약속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민과 한국의 불교신도들은 환영하였다. 전당한 수행 승단의 길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가는 길이라고 쌍수로 박수하고 이제 자각의식의 종교로 나아갈 차비를 차리고 성장과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을 염원하였다. 그러나 그 염원이 가시기도 전에 이제 조계종단에서 내분이 잦게 일어나고 도하 일간 신문지상에 기사거리로 타락하였으니 참괴참괴 천만번 가슴 아프다.

 

  흙탕물로써 증류수를 만들면 그 물은 좀 체로 흐려지지 않는다. 물리작용의 묘미가 이렇다면 심리작용은 이것보다 웃돌게 되어야 한다. 정화가 되고 나면 정화이전도 정화이후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정화이전 정화중간 정화이후가 이토록 부동하니 불법(佛法)의 정화는 물리법의 순화작용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이것은 깨달음의 바탕으로 된 무리가 모여서 정화한 것이 아니라 아리석고 아집에 가득한 무리가 모여 정화라는 이름에만 집착하여 명색만 정화한 것이 아닐까 고 자문하여 본다.
  세상이 혼돈한 것은 마음이 혼돈한 것이라고 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는 청정하다고 하는데 이렇게 쉬운 이치를 어디에 두고 왔을까
  오늘에 살고 있는 부처님의 제자 그리고 모든 스님들 한번 깊이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제일의제(第一義諦)가 세속제(世俗諦) 보다 낮은 것인 가고, 부처님 재세 시에는 왕, 판사 등 뭇사람이 불법에 귀의함으로부터 그 직분을 발휘할 수 있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그 불법의 제자들이 세속법에 준거하여 살려고 하는가를, 불법의 모든 세속법에 준거하여 살려고 하는가를, 불법이 모든 세속법 보다 우위에 있음을 자각할 때 또한 자각된 위치에서 실행할 때 정화는 영원한 것이다. 정화는 한번 하면 되는 것이지 두 번 세 번 할 것이 아니다. 정화를 거듭한다는 것은 일심의 자각 없이 정화란 구두선에서 한 것이다. 제도의 정화·의식의 정화·마음의 정화 하나로 귀의하는 참다운 정화 이것이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난제를 새롭게 해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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