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ꊲ 한국 불교 회고와 전망
많이도 변해 가는 사회다. 그 중에도 두드러진 것이 경제발전과 우리의 의식구조다.
외국을 다녀 보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보면 허수하기만 했던 서울과 시골이 이젠 서울의 어느 거리는 홍콩처럼 빌딩의 숲 속을 걷는 것 같은 착각이고 시골도 돼지 움막집 같은 속에서 깨끗이 초가지붕들이 사라졌다. 쌀이 부족해 수입해 오느라 절절매고 이웃 일본은 식량이 남아 쌀을 짐승의 사육에 까지 쓰고 또 정부가 농사를 짓지 못하게 묶어 둔 땅을 보며 너무도 격세의 감을 느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나라도 이젠 쌀이 남아돌아 잡곡을 섞어 먹어야 될 단계에서 쌀 술도 해먹도록 되니 참 놀라운 발전을 찾아보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의 의식구조 역시 자기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가정으로 돌아가며 또 이웃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제 일 제쳐놓고 가 관심을 표명했던 마음씨들이 이젠 밖에 사람이 죽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각박한 마음가짐으로 변해가고 있는 변천.
이러한 변천 속에서 우리 승단의 현재도 과과에 비해 엄청난 변모를 가져오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첫째 경제적인 상황이요 둘째가 계율적인 의식이다. 배낭을 지고 완행열차나 타면 乞人 취급의 인상까지 받았던 승려들이 2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특급 아니면 타지를 않고 또 자가용과 비행기도 보통이니 그 경제적 지위도 中上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계율적인 면에 있어서는 무명옷에 고무신만 신고 五辛菜도 절대로 먹지 않았던 우리들의 초기의 수행 생활이 지금은 毛織에 구두를 싣고 五辛菜는 물론 절에서 굴까지 나오게 된 형편이니 세월의 변천이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기 먹는 일이 가장 무서운 죄악처럼 생각했던 우리들 출가 당시의 계율이 지금은 대부분의 승려가 공공연히 먹게 되고 또 여자 문제만 해도 가장 몹쓸 수행인으로 낙인을 찍고 했었는데 지금은 뭐 그런 정도 덮어주지 하는 식의 무감각 상태로 변해 왔다. 우리 승단도 불과 20여년의 사이 큰 변모를 했다고 볼 수 있다.
6.25 사변 후 비구승단은 대처승과의 싸움에 한창 열들 올리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계율적인 목표가 엄격히 시행되어 계율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고 또 수행이 중심이 된 때였는데, 그래서 그때는 지대방의 분위가가 참 좋아 放禪을 하고 지대방에서 누가 정진을 잘하고 어느 스님의 道力이 어떻고 하는 信心을 일으키는 이야기들뿐이었는데 요즘은 승려들이 다방이나 科亭에서 여자나 절 뺏는 일들을 이야기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末世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는 주지를 하면 돈을 만지고 공부가 되지 않아 서로 주지를 하지 않으려 비어 있는 절도 많았는데 요즘은 이러한 주지도 돈을 주고 거래하게 되었으니 무척도 승단은 변해 가고 있다.
절에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莫行莫食하는 대처승이 중이 아니라고 그들을 내쫓고 들어앉은 비구승들이 불과 1,20년 사이에 그들과 별 차이 없는 생활로 변해가고 있으니 애당초 이 정화사업이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사회가 그토록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사회의 변천도 분명 그러한 일 단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로마 법왕청의 혁신적인 발언, 동남아 불교와 일본 불교의 교류, 그러한 가운데서 먹고 帶妻하는 일들이 별로 이상현상이 아닌 우리들 보다 더 발전되고 대우를 받는 이곳의 불교 속에서 우리들이 고집했던 일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을 안 데서 온 변천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사회도 여유 있고 노출되어 종래의 고집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 불교는 많은 발전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우선 한국 불교의 신도도 3백만을 이야기하던 단계에서 1천만을 넘어섰고 사찰의 보수 佛事들도 예년에 볼 수 없는 정도 큰 자취들을 남기고 있다. 내 가람이 세워지고 大佛像이 조성되며 大鐘이 여기 저기 달려지며 빌딩도 여기저기 솟아지는 불교의 자취, 12여 년 전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가운데서도 옛 것에 대한 향수를 느껴지는 것을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外形적인 발전 그것이 결코 종교의 발전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에는 사회에 대한 활동도 중요하지만 보다 앞선 것은 수행이다. 깨끗하고 순수한 수행, 이것이 종교의 眞髓며 이 진수에 의해 사회에의 효과 있는 활동도 가능한 것이다.
요즘의 사원의 수행의 도량보다 사람이 복잡한 관광지가 되었는데 옛날은 사람도 보기 드문 산중에서 먹물 옷의 수행인들이 도량을 거닐며 또 발우를 펴 展鉢偈 五觀偈 등 小心經을 외우고 공양을 하며 죽비에 맞춰 入禪에 들던 그러한 때가 그립기만 하다. 머리만 깎아 중을 만들어 내보내는 것이 아니고 행자 시절에 모든 것을 다 익히고 배워 무겁게 계를 받아 나가는 그러한 때가 그립기만 하는 것이다. 또한 수행과 기도가 자랑이었고 무기였던 그 때가 그립기만 하다.
그러나 어차피 사회는 발전되고 종단은 변천해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얼마간은 이러한 형식의 발전인지 퇴폐인지도 모를 변천이 진행해 갈 것이다. 그것은 그 동안의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지체의 상태에서 탈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위한 불가피한 귀추며, 너무 사회에 어두웠고 행정에 미숙했던, 또 학문이 없었고 지위가 없었던 때문에 그러한 것을 찾기 위한 방향으로 발전해 갈 것은 사실이다. 계율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날의 억압된 상태에서 더 개방적으로 변천해 갈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律師와 몇 분의 老僧이 이것을 저기하려해도 이 大勢의 물결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흘러가기 마련인 물결, 이 大勢와 물결을 어떻게 잘 타고 종단을 인도해 가느냐에 따라 한국 불교는 거듭 발전되고 훌륭한 지도자도 탄생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물결에 빠지지 않고 그 물결에 順應하며 한국불교를 사회의 발전 속에 치켜 올리는 이 작업이 앞으로 필요하다 생각된다.
종교의 본래 목적인 수행은 모르지만 그 밖의 외적인 것은 분명히 발전해 갈 것이다. 佛誕日이 公休日이 되었다는 것도 이에 큰 촉진제며 또 사회가 우리 것을 찾고 지성인이 동양을 찾는 경향도 이에 큰 도움인 것이다.
문제는 이 물결 속에 빠져 계율도 죽여 버리고 수행도 없애 버리는 폐를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근본을 살리고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制度의 妙를 살리고 교육을 강화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발전해 갈 것들을 정상적으로 끌어 올리고 비정상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역량이 필요하다. 사회가 요구하는 불교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질도 중요하지만 量的인 것도 더 시급하기 때문에 이러한 量的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계율적인 개방과 포교사의 절대 증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에만 급급하다 전통적인 것을 완전히 죽여 버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여기에 제도의 묘가 앞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 단계로 역시 수행의 발전과 정이 올 것이다. 이것은 사회도 안정이 되고 불교도 사회 속에 제자리를 잡았을 때의 일이다.
☆ 착한 일은 필경에 번영하고 악한 일은 마침내 망한다.
☆ 직업은 자기를 훈련하고 인류에 봉사하며 불국토를 가꾸는 일이다.
<불광 聖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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