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님의 침묵」을 통해 본 만해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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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님의 침묵」을 통해 본 만해 사상
  • 장호
  • 승인 2009.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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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용운 사상의 원천

□ 자비행(慈悲行)의 나룻배

불교사상의 특색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누구나 먼저 <자비>란 말을 생각해내게 마련이다. 자비란 말할 것도 없이 어진 마음으로 남에게 친절히 대함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의 말뜻밖에는 안된다. 역경에 처하여 불행에 우는 자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친절히 대한다는 것일까. 가령 물질을 베푼다면 남에게 베풀만큼은 저에게 먼저 그것이 넉넉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리고 동정심을 베푼대도 제 처지가 각박하면 그것도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저는 헐벗더라도 제가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자에게 내어 주라고 가르친다. 저는 괴로움의 심연에 빠질지라도 먼저 남의 괴로움부터 덜어주라고 가르친다. 그러자니 거기 자연, 스스로 잃어야 하고 또 스스로 몸을 내어던져야 하는 범상한 뜻으로는 쉽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고, 또 그 일을 실천하는 행동에 더 큰 갈등이 따른다. Benevolent와 Mercy와 또 Charity가 그 뜻에 있어 조금씩은 차이가 지듯이 자비란 말은 그만큼 시여(施與)나 박애(博愛)라는 말보다는 좀 유다른 면모를 띈다. 그것은 오히려 저는 여태 제도되지 못했더라도 아니 제도되지 못했으니까 남부터 제도해야 한다(자미도극도타(自未度克度他))는 보살의 사상을 낳는다. 남부터 제도함으로써 저도 제도될 기연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행동적 성격을 <자비>의 개념에서 떨어낼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곧 불교 특유의 자비사상이다. 흔히 유복한 자가 넉넉한 웃음을 띄며 가난한 사람에게 무엇인가 베풀어주는 정경을 자비로서 머리에 그려내기 쉽지만 그래서는 불교를 잘못 이해하게 된다는 까닭도 여기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이런 진리의 길을 한용운은 쉽게 그려 보여준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시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룻배와 행인)

여기서 등장하는 <당신>은 말할 것도 없이 중생이다. 중생을 피안정토(彼岸淨土)세계로 제도하기 위해서는 <나룻배>는 <흙발로 짓밟>히는 괴로움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면서 저 자신은 강 기슭까지 바래다 줄 뿐 그 행인 따라 저도 상륙해 버리는 법이 없다.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당신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다음에 제도해야 할 중생을 위해서 다시 괴로움의 사바세계로 되돌아 선다. 봉사자의 정신은 바로 이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젓가락은 수 없이 맛있는 음식을 입에까지 날라다 주건마는 한번도 그 자신 음식을 맛보는 법이 없다.>는 법구경(法句經)의 정신도 바로 이런 정신이다.

그러나 다시 첫머리의 <나>와 <당신>을 마지막의 그것에 대비해 보라. 첫머리에서 여전히 그것은 대립의 관계에 있었으나 마지막에 와서 어느새 그것은 일체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니, 그것은 온전히 <나룻배>인 <나>의 수행으로 인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것이다. 수행자와 중생은 어느새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드높은 뜻으로 합일되어 해탈, 열반의 자유세계로 나란히 나아가고 있음을 볼 것이다.

여기에 중생을 나에게서 따돌리지 않는 오히려 나를 중생의 운명아래 예속시킴으로써 중생과 나를 함께 대아(大我)로 발전시켜주는 비리(非理)의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다시 이 한편의 시에 등장하는 <당신>을 눈여겨보라. 전번에 당신은 탐진치(貪嗔痴)에 연연한 중생이었지만 끝에 당신은 이미 그것을 깨끗이 해탈한 부처가 되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나룻배에 실려 이미 피안정토로 제도된 후의 중생의 모습임이 분명하지만 주로 여덟 번째 <당신>과 아홉 번째의 그것이 사태를 온전히 변화시켜 놓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날마다 낡아가>며 <언제든지 오실 줄 알>고 기다리는 <당신>은 그때 비로소 <부처>가 되고 그리고 초반의 중생으로서의 행인인 <당신>과 나룻배인 <나>도 함께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록스타인도 지적하고 있듯이 근대 기독교 문학 예술은 주로 그 신앙의 회의(Doubt in faith)에 더 큰 뿌리를 넓히고 있는 데 비하여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님의 침묵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님의 침묵>에는 그 침묵, 그 이별로 인한 고뇌는 있을지언정 추호의 회의도 없다. 따라서 <나룻배>는 그 <당신>이 꼭 <오실 줄 알>고 있으니 <날마다 낡아>가면서까지 <당신>을 기다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신념은 어디서 오는가. 자신의 나룻배로 스스로 몸을 내어 던져야 한다고 한용운은 말한다. 한용운 사상의 행동적 성격은 바로 여기 있으니 그것이 곧 자비행의 나룻배이다.

  □ 님의 상징(象徵)

 시집 <님의 침묵>은 1925년 을축년에 설악산에서 집필되었다. 한용운은 3 ∙ 1운동의 선봉자로서 옥고를 치르고 난 뒤 곤빈한 심신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하여 설악산으로 몸을 숨겼던 것이다. 이 시기가 곧 한용운 생애의 꼭 한가운데 분수령을 이룬다. 저돌적이리만치 좌충우돌하던 생애의 전반기에 그는 먼저 불교 자체에 대하여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니 임제종(臨濟宗)의 발기와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의 발표가 그것이다. 산간에 은둔하여 일제의 질곡에 허덕이는 민족적 현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들 식민지정책에 아부하기만을 일삼는 당시 타락 불교를 채찍질하여 진흙에 들고 물속에 뛰어들어(입니입수(入泥入水)) 싸웠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불교의 운명까지도 포괄하는 조국과 민족의 궁극적인 구제를 위하여 33인중 가장 치열하게 3 ∙ 1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리고 후반기 즉 설악산 자복기(雌伏期)를 벗어난 이후에 그는 주로 신간회(新幹會)와 만당(卍黨)을 이끌고 사회운동에 나서되, 혹은 합법적으로 또는 비합법적인 지하운동으로 신축성 있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니, 이를테면 한용운의 설악산 은거는 그의 재생의 한 길목을 이루었던 것이고 그 길목의 지표로서 스스로 들고 나선 것이 그때 집필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와 이 <님의 침묵>이었던 것이다.
  

<십현담주해>와 <님의 침묵>이 같은 해, 같은 처소에서 집필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적 형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자못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오세암의 다락 구석에 먼지에 서린 고문서 한 권을 찾아내어, 그는 그보다 수백 년을 앞서 섭현담에 주를 단 김시습의 글씨를 보고 감분하여 그도 거기 잇달아 주해를 붙였던 것이다. <님의 침묵>에 수록된 시편들과 이 십현담에 그가 붙인 주를 낱낱이 대조해보면 쉬 짐작이 가는 일이거니와, 그는 실로 님의 침묵의 발상(發想)을 바로 여기서 얻어내었던 것이다.

   <요요요시무가요(了了了時無可了)>, 십현담의 이 구절을 그가 <불법본무가요지사(佛法本無可了之事) 요화불법즉실무가요(了和佛法則實無可了) 유가요즉비요야(有可了則非了也) 학자이무득위득(學者以無得爲得) 시득(始得)>으로 주할 때 벌써 <님의 침묵>에 질펀하게 깔린 그 <침묵>과 <이별>의 참뜻은 밝혀지는 것이다. 불법에 끝이 없듯이 배움에 얻은 것이 없다고 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곧 <이별>로 하여금 <만남>으로 지양시키고 또 <침묵>을 <진리의 소리>로 환원시켜주는 것이다.

   고통의 가시덤불 뒤에 환희의 낙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님을 떠난 나는 아아 행복입니다. 
                                                                                                      (낙원은 가시덤불)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美)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미의 창조)
   이별은 일천 줄기의 꽃비다/ 이별은 거룩한 태양이다. 
                                                                                                      (이별)

   이런 잠언(箴言 ∙ epigram) 혹은 격언(格言 ∙ aphorism)들은 사실 오관에 와 닿는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관념적 실체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영적 고뇌로 몰아넣어서는 마침내 내면세계에 눈뜨는 전기(轉機)를 기약해주는 것이니, 그것이 곧 묘유(妙有)로써 현현(顯現 ∙ epiphany)되는 것이다.
   묘체본래무처소(妙體本來無處所)
   주일묘체부재내(注一妙體不在內) 부재외(不在外) 적부재중간(赤不在中間) 
   역역현로(歷歷現露) 무처부재(無處不在) 소재무처(所在無處)
   아무데도 없으면서 어드메나 있는 묘유는 망상이나 분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들레르의 상징의 숲도 끝내 오의(奧義)에 달한 사람에게만 정다운 눈길을 보내었던 것이다. 이 교감 혹은 조응(照應 ∙ Corres pondence)은 풀 포기 하나에서도 부처를 발견하게 된다.

   일경초(一莖草)가 장육금신(丈六金身)이 되고 장육금신이 일경초(一莖草)가 됩니다.
                                                                                                      (낙원은 가시덤불)

   일체화의 체험이 이렇게 구체화되면 현실적인 그 모든 곤경과 치욕의 끝에 행동적 이념은 다시 자비행의 사상으로 그득 차오른다.

   부정(不定)의 부정으로 시작된 <님>의 설정은 여기 와서 생명고의 제도행위로서의 기틀을 굳히기에 이른다. 중생과 불교란 많은 생애를 다하기까지 그의 지표가 된 것은 바로 이 <님의 침묵> 한 권에 집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런 도리를 터득함으로써 시를 얻게 되었음(이도득시(以道得詩))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바이거니와, 한용운은 실로 당시 문단의 테두리 밖에 처하면서 시 형식에 대한 뚜렷한 집착도 없이 한국 시에 투철한 사상적 근거를 심어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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