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찬란한 민족의 별
파란 많은 가시밭 길을 걸어 온 우리 근대의 역사는 그 흐름의 강 기슭을 비춰준 수많은 민족의 성좌(星座)들로 인하여 어둠 속을 헤치고 밝고 힘찬 전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성좌 가운데에서도 가장 찬란한 민족의 별이 바로 만해 한용운 스님이었습니다. 실로 우리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만해 한용운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해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어느 한 부분의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 불교사에 우뚝 솟은 높은 스님이었고, 조국 광복을 위해 피나는 투쟁과 대쪽 같은 지조를 지킨 민족의 선각자이었으며, 아름답고 고운 사랑의 노래를 부른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부분에서 크게 성취한 전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만해로 인하여 우리 불교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깊이 있는 불학(佛學)을 개척하였으며, 유심현묘(幽深玄妙)한 선(禪)의 세계가 더욱 새롭게 열렸습니다. 그리고 만해로 인하여 투철한 주체적 민족의식의 자각을 이룩하였고, 잠자는 민족적 양심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또 만해로 인하여 우리의 문학사는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만해는 흔히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와 비교되기도 하고, 인도의 독립투사 간디에 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해의 시를 깊이 연구한 송욱 교수는 타고르와 간디를 합쳐도 우리 만해만은 못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타고르는 시인일 뿐이었고, 간디는 독립지사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만해는 시인에다 독립지사를 겸하였고, 그 위에 심오한 불교학자였고 고매한 선승(禪僧)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인과 지사와 선승, 이 세가지를 높게 성취하고 이 세가지를 원만하게 지닌 이가 만해였기에 이 세가지 측면을 알지 않고 만해를 올바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만해를 말한다는 것은 범속한 속인으로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이 글은 이상 만해의 세가지 측면 중 시인으로서의 만해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만해의 시라 하더라도 만해의 불교적 인생관 그리고 불교사상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만해의 시에 나타난 불교적 측면을 동시에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미리 이야기해 두고자 합니다.
2. 님의 정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해는 시인 ∙ 지사 ∙ 선승을 겸한 이였고, 또 이 세가지 면이 일체화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 밑바탕이 되는 것은 불교인으로서의 만해였습니다. 즉 시인 ∙ 지사 ∙ 선승이라는 삼각형의 저변(底邊)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해의 인생관에 일찍부터 뿌리 박은 불교적 체험과 사상은 그의 모든 분야의 원리가 되었고, 그의 모든 언행의 강령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고 억압받는 민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굳은 절개도 그의 불교적 인생관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고, 그의 곱고 아름다운 사랑의 시도 역시 불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불려진 노래였습니다. 따라서 만해의 모든 것은 모두 불교에 귀일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만해의 시는 모두「님의 노래」라 할만큼 그의 시에는「님」이 나옵니다. 곧바로「님」이 안 나온다 해도「당신」이니「애인」이니 하는 것이 모두「님」에 해당되는 말들입니다.
그러면 그「님」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님」의 정체를 파악해내는 일이야말로 만해 시의 핵심을 캐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시인 평론가들은 이 만해의 시에 나오는「님」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고민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님을 불타라 하기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하며, 또는 조국이라고도 하고 민족이라고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해방이라고도 단정지어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들은 모두 맞기도 하고 또 모두 틀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만해 시에 나타나는 님은 이상의 여러 가지 말에 모두 해당되기도 하면서 또 그 본바탕에서 볼 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해의 시 전체에 나오는「님」을 개별적인 어느 한 작품에만 국한하여 단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만해의 시 전체에 나오는「님」의 본 뜻의 극히 피상적인 작은 부분만을 지적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해 시에 나오는「님」은 단일한 것이 아닌 복합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불타 중생 조국 민족 해방∙∙∙∙∙∙ 이 모든 것을 일체화한 것이「님」의 정체인 것입니다.
만해는 시집「님의 침묵」의 서시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했습니다.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서 볼 때 그리워하고 존경하고 우러르고 기다리고 어여삐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나아가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고 싶은 것, 이 모든 것이「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 위로는 부처님에서부터 아래로는 범부 중생에 이르기까지「님」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법열(法悅)의 경지에서 깨달음의 세계에 비추인 모든 것이「님」이요, 생사고해에 떠도는 불쌍한 일체의 중생이 또한「님」입니다.
그러면 만해는 어떤 위치에서「님」을 노래하였을까요? 그것은 보살의 위치였습니다. 깨닫고서도 깨달음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다시 중생의 세계에 내려와 세세생생 그들과 고락(苦樂)을 같이 하면서 모든 중생이 모두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함께 노력하고, 모든 중생이 모두 깨달음의 세계에 가지 않으면 자신도 영원히 피안(彼岸)에 가지 않는다는 보살, 그 보살의 경지에 만해는 있고, 또 노래한 것입니다.
즉 모든 중생을 모두 제도하여(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모든 중생과 함께 불도를 이룩하고자(아등여중생(我等與衆生) 개공성불도(皆共成佛道)) 보살행(육바라밀(六波羅蜜))을 하는 과정에서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한 것이 만해의 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만해의 시가 중생제도(하화중생(下化衆生))의 교화적(敎化的)인 시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이에 관련하여 선승으로서 법열의 경지에 이르는 깨달음의 과정과 그 기쁨을 노래한 증도가(證道歌) 또는 오도시(悟道詩)의 측면을 동시에 지니기에 말입니다.
유현(幽玄)한 만해 시를 불교의 어느 단일한 측면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말하기에는 어려운 일이기에 이 글에서는 만해 시의 보살사상적 측면을 한 작품을 통하여 살피고자 합니다.
3. 나룻배와 보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로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 갑니다.
만해의「나룻배와 행인」이라는 이 시에서 우리는 보살로서의 만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살로서의 만해는「나」요 <나룻배>입니다. 당신은 곧「님」이요,「님」은 곧 <행인> 즉 중생입니다. 극고(極苦)의 차안(此岸)과 극락(極樂)의 피안(彼岸)의 사이에는 도도히 흐르는 생사고해(生死苦海)가 있습니다. 이 생사고해에서 사바세계로부터 저 깨달음의 피안으로 건네 주는 것은 나룻배입니다. 나룻배는 보살이요, 곧 만해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은 나룻배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그러나 나룻배는 모든 것을 참고(인욕忍辱)) 행인을 건너줍니다. 그리고 <깊으나 얕으나> 행인을 태우고 물을 건너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정진하는 보살행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보살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온갖 욕됨을 참고 견디며 끓는 물, 타는 불 속을 뛰어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희생으로써 다 바치고, 나를 생각하지 않는 이타행(利他行)을 합니다.
만해는「님의 침묵」서시에서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고 한 바 있습니다.
또 「알 수 없어요」라는 시에서는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야말로 바로 깨달음의 세계를 모르고 육도에 헤매는 중생들입니다. 만해는 그들을 위하여 시를 쓴다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밤>이란 말 역시 무명(無明)의 암흑 속에 잠들어 있는 중생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만해는 중생의 앞길을 밝히는 등불로서 그칠 줄 모르고 가슴을 태우고 있습니다.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번뇌에 차 있는 중생의 제도를 위한 보살의 정진(精進)과 자비를 볼 수 있습니다. 즉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중생의 깨달음을 위해 한없는 자비를 베푸는 보살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삼독(三毒)과 오욕(五慾)에 빠져 있는 중생은 보살의 참뜻을 모릅니다. 그래도 보살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 중생이 깨우치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 알아요>나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라는 구절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중생구제의 보살행을 그칠 수 없다는 강렬한 서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국 만해는「나룻배」를 의인화(擬人化)하여 보살의 근본사상과 그 실천요목인 육바라밀의 정신을 곱고 아름답게 그리고 절실하고 간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하는 노래, 그것이 바로「나룻배와 행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