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린 시절, 절은 그렇게 자주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는 매달 초하루가 오면 양초와 제법 묵직한 쌀, 그리고 과일 몇몇으로 보따리를 만들어 산으로 나들이를 다니곤 하셨다. 이 일은 지금도 좀처럼 거르지 않는, 그리하여 60이 넘으신 어머니가 반평생을 수행했던 가장 경건한 행사가 되고 있다.
방학이면 나도 가끔씩 어머니를 따라 산 속으로 부처님을 뵈러 가곤 했다. 따뜻한 햇살이 환하게 쬐던 그 정갈한 툇마루에 앉아 주변경관에 어우러진 풍경소리를 들어가면서 맛있는 절밥을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자주 찾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절이 내 마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고요하고 청정한 분위기가 어린 나로서도 좋아보였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머니를 따라 절을 찾아가는 횟수도 자연 줄어들었고, 그렇다고 학창시절에 불교학생회 활동을 열성적으로 한 것도 아니었다. 몇번인가 가입하려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정기적으로 모여 무엇인가 공부를 하고 또 특별한 행사를 하는 행동들이 그때의 내 눈에는 다소간 번잡한 것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스스로 시간을 내어 한적한 절간을 찾아가는 일상의 여유는 더더구나 없었다. 그러면서 극히 잠깐, 군 생활을 하는 동안에서야 비로소 부처님을 뵙는 아주 초보적인 절차만 습득한 채 내 젊은 시절은 지나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이십대의 중반 어느해 여름, 계룡산 암자에서 지낸 두 달의 생활이 그나마 나로서는 가장 가까이에서 부처님을 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십수 년 전, 그러니까 내가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던 때였다. 수험생을 두고 계시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두 분만의 호젓한 시간을 내어 교외를 돌아보셨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발길 닿는 대로 찾아간 곳이 부여의 고란사였다고 한다. 큰 일을 앞에 둔 부족하기만 한 자식이 그래도 안쓰러워, 아마 부처님께 간구하고자 하는 심정이 결국 그곳으로 두 분의 발걸음을 인도했을 것이리라. 나로서는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연히 찾아간 그 날이 부처님의 성도일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연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렵게, 그러나 용케도 나는 내가 원하던 대학에 진학 할 수 있었다.
그 후 두 분은 지금껏 그 날이 되면 어김없이 부여 나들이를 하고 계신다. 입시철만 되면 등장하는 교문 앞의 애끓는 모정을 볼 때마다 나는 부소산 숲길을 따라 손을 잡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고 계셨을 두 분의 뒷모습을 헤아려 보게 된다.
한국문학을 전공으로, 그것도 고전문학을 다루면서 나는 작품을 통해 여러가지 모습의 불교와 만나게 된다. 얼핏 보아서 탈춤이나 사설시조에 등장하는 승려들의 형상은 한결같이 파계승에 가깝고, 반대로 소설이나 설화속에 등장하는 승려들은 그와는 달리 고승대덕에 어울린다. 이러한 현상이 왜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한때 가져보았다. 아마도 내 스스로 불자라는 생각이 들어 그 언저리에서 생겨난 연구거리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불교 외적인 측면에서 쉽사리 찾아질 수 있으나, 나는 좀더 내 생각 속에 그 물음을 넣어 두고 더 익혀 보려고 한다. 부처님 말씀을 찾아 우리 문학유산에 넓고도 깊게 드리워진 불교의 그림자를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해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참말로 게으른 불자였다.
지난 달 중순에 가족을 데리고 칠갑산 어느 절을 다녀왔다. 안면이 있는 스님이 그 곳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여느 사찰과는 달리 포장이 잘 된 진입로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별로 없는, 길가 감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로 인해 더욱 고적해보이던 그런 절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뵙고자 했던 스님은 그 곳에 계시지 않았다. 잠시 실망하면서 경내를 둘러보던 즈음, 한 스님이 부러 내 손에 있던 꼬마를 불러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실망이 슬며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것도 인연일 테고, 또 인연은 나도 모르는 새, 나만 알고 있어야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새삼 돌이켜본다.❁